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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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만 열여덟 되던 해 가을, 드디어 주민등록증 발급신청에 대한 통지를 받았다. 당시 우리 사회의 기준상 주민등록증이 생긴다 해도 만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선 주민등록증이 꽤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미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아이들은 이마에 주민등록증을 떡 하니 붙인 채 아직 못 받은 친구들보고 자기를 언니라고 부르라며 뻐겼고, 발급통지를 받은 애들은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운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부모님 몰래 드라이기와 화장품을 챙겨 사진관에 달려가곤 했다.

나 역시 설레임을 가지고 주민등록증 날라오기만 기다렸는데 황당한 일이 생겼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발급 불가 통지가 날라온 것. 신청서상의 이름과 호적상의 이름이 다르다나? 내 이름엔 '곧을 정'자가 들어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호적등본엔 '참 진'자가 기록되어 있었고, 동사무소에 문의를 해보니 호적상 이름으로 다시 신청서를 제출하든지, 호적등본을 정정하라는 것이다. 전산화가 이루어진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엔 정정신청을 위해 호적지까지 가야 했다.  나야 고등학생이고 부모님 두 분 다 가게를 비우기 어려운지라 차일피일하다가 족보에도 안 오른 이름이니 그냥 '진'으로 이름을 바꿔 신청하자는 얘기까지 나왔고, 난 그 말이 너무 서럽게 여겨져 방문 걸어잠그고 대성통곡을 했었다. 결국 아버지가 짬을 내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갔더랬는데, 무슨 서류가 하나 누락되는 바람에 그 다음달엔 어머니와 큰오빠가 또 대구에 내려갔더랬다. 호적정정이 완료된 후에서야 다시 주민등록증을 신청해야 했기에 결국은 해를 넘겨서야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땐 이미 한 해 일찍 학교를 들어온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주민등록증이 나온 뒤라 뻐길 상대가 없어 몹시 억울해 했던 기억이 난다.

90년대 초반엔 어머니를 잡으러 새벽같이 집으로 형사가 들이닥쳤던 사건도 있었다. 어머니가 사기 전과가 10개도 더 달린 수배자라는 것이다. 제대로 신발 신을 새도 없이 다짜고짜 연행하려고하는 형사에게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여 '그래, 경찰서에 가서 따져보자. 만약 내가 니들이 찾는 정영자 아니면 다들 내 손에 옷 벗을 줄 알아라'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끌려가셨다. 가족이며 친척들이 몽땅 경찰서로 쫓아가 항의를 하고,  지문 조회로 어머니와 그 사기꾼이 동명이인임이 확인된 후에도 온갖 조사에 시달리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어머니는 풀려나셨다. 알고 보니 전산화 작업을 하다가 어머니와 이름과 생년이 같은 사기꾼 기록이 어머니 기록에 오기된 것이었고, 행정상 오기야 경찰관의 잘못이 아니니 경찰서에 분풀이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잘못된 전산화 때문에 억울한 사정을 가진 이는 의외로 많아 뉴스 르포로 다루어지기도 했더랬다.

생사불명 야샤르를 읽으며 우리 집이 겪은 두 사연이 떠올라 마냥 웃으며 읽을 순 없었다. 사람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서류로만 증명 가능한 세상이 우리가 사는 사회이다. 터키의 한 공무원의 사소한 실수로 야샤르가 부정된 것처럼, 전산시스템의 오류로 나의 존재가 아예 삭제되거나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지즈 네신의 풍자는 관료주의를 겨냥한 것이지만, 지문날인으로도 모자라 생체정보가 담긴 전자신분증 도입이 현실화되고 있는 오늘날은 더 통렬히 풍자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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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9-2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이상 미룰 수 없겠는데요?
불끈=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