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피와 미국의 ‘눈에 보이는’ 충돌은 1981년부터 시작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시드라 만 전체를 자국영해로 선언한 리비아에 맞서 미국은 항공모함 전단을 파견하여 고의로 ‘어깨질’을 시작한 것이다. 1981년, 1983년, 1989년 3차례에 걸쳐서 리비아 전투기가 격추되는 충돌이 발생했다. 이를 ‘시드라만 사건’이라 한다. 3차례 공중전의 주역은 바로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몰고 다니던 F-14톰캣 전투기였던 것이다.

1984년, 서베를린의 디스코 클럽에서 폭탄이 터져 미군 사상자 다수가 발생하였다. 이 클럽은 전부터 미군의 출입이 잦은 곳이었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이 테러를 찬양하고 나서자 증거를 모으던 미국은 1986년 4월 14일 밤, 급기야 카다피 제거를 노린 기습 폭격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기지에서 출격한 전폭기가 공중급유를 받으며 유럽 서해안을 따라 남하(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공통과 거부),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지중해로 진입, 트리폴리의 가다피 관저를 비롯한 요지를 야간폭격한 것이다. 이 폭격에서 카다피의 딸이 사망하고, 카다피는 자기 관저의 잔해를 최근까지도 보존해 왔다.


노획한 리비아군 T-55 전차를 조사하고 있는 차드군 병사들(역시 흑인). 리비아는 막대한 기갑부대와 공군까지 동원했음에도 엉성한 전술로 참패한다. 1987년.

이에 맞서 리비아는 1988년 영국의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미국민항기에 폭탄테러를 가하는 것으로 맞섰다. 따라서 영국과도 돌아갈 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 이런 마찰이 생길수록 국제사회에서 카다피의 주가는 올라갔다. 하지만, 가다피의 주가는 1990년대 들어 급전직하하고 만다. 이라크의 ‘위대한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중동의 자존심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출처 : http://yeuleumsa.co.kr/bbs/view.php?id=ywz_editedreality&no=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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