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돌이 > 남도의 마지막 겨울 햇빛 - 둘째날 해남
해남은 여러번 왔었는데 역시 기억에 남는건 신혼초에 남편이랑 둘이서 배낭매고 버스타고 왔던 때다. 걷기도 많이 걸었지만 그 때 참 맘씨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차를 많이 얻어타고 다녔었다. 추억을 떠올리며 나중에 아이들이 좀 더 큰다면 넷이서 배낭매고 여행다니자는 얘기를 둘이서 두서없이 해대면서 옛날 우리가 참 맛나게도 먹었던 명동정에 가서 게장백반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이 집은 그 허름한 분위기하며 주인집 부부하며 하나도 변한게 없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음식맛이 여전히 맛있긴 한데 옛날처럼 그렇게 환상적인 맛은 아니다. 아마도 그동안 쓸데없이 입맛만 비싸진게 아닌지...
'녹우당'으로 향했다. '녹우당'은 윤선도의 고택이다. 여기도 그 아득한 옛날 갔던 기억은 있는데 생각나는거라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참 정겨웠다는 것과 집앞의 커다란 은행나무뿐... 다시 찾은 녹우당은 그동안의 정비사업으로 집앞이 깔끔하게(너무 깔끔하게) 정비돼버려 옛날의 정겨운 맛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은행나무만이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채 여전히 서있을뿐... 새롭게 해남윤씨 소유의 문화재들을 전시하기 위한 전시관이 있었는데 도난 문제 때문에 진품은 없고 중요한건 모두 사진들이라 김이 빠졌다. 다만 인상적인건 엄청난 양의 책들과 분재기(분재기란 옛날 재산을 자손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나눠준다는 기록이다.)였다. 그 시대에 저 정도의 책을 소유한 집이라면 엄청난 부자라는 얘기, 거기다가 분재기의 길이가 저렇게 길다는 것 역시 나눠줄 재산이 무지 많았다는 얘긴데... 분재기 안내문에 윤선도가 재산을 나눠줄 당시 노비의 수만 500여명이었다는 기록에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러면서 작년 여름에 갔던 보길도가 생각났다.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 침대를 몇개나 만들수 있을까?
보길도는 윤선도의 별장이라 할까? 부용동 정원이란걸 만들어 윤선도가 보길도 전체를 거의 자기 개인의 정원처럼 만들어놓고 노년을 즐겼던 곳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간 사유와 그의 이후 보길도 생활은 이해하기 힘든 불협화음이다. 그가 보길도에 간건 조선 인조가 병자호란에 패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더러운 세상에 살 수 없다. 세상을 멀리하자'며 제주도에 가다가 잠시 들른 보길도의 풍광에 반해 눌러앉은 곳이다. 그후 그곳에 세연정이란 정원을 만들고 곳곳에 거처를 만들어 살면서 거의 날마다 세연정에 나가 그위 옥소암이란 바위위에 악공과 기생들을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하면서 그 모습이 아래 세연정 연못에 비치는걸 보고 풍류를 즐겼다는 것. 이게 나라의 운명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선비의 모습과 도대체가 매치가 안되는거다. 고등학교 때 배운 그의 어부사시가가 왜 훌륭한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나로서는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그것을 즐기는데 온힘을 아끼지 않은 전형적인 지배층으로서의 그가 이미지로 떠오를 뿐... 씁쓸하다. 갑자기 남편이 묻는다. "이 집안이 아직도 그렇게 부자일까" 글쎄 나도 궁금하다.
녹우당은 윤씨 종가의 사랑채를 말하는데 여전히 집 전체의 구조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옛날보다 더 황량해진 느낌에서 그저 밋밋하게 둘러보고 나와 완도로 향했다.
완도는 요즘 드라마 해신의 인기에 힘입어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장보고, 그가 가져다주는 부와 진귀한 보물들에는 환호했지만 귀족이 아닌 그가 가지는 권력은 참을 수 없었던 신라 귀족에게 장보고는 반역자에 불과했다. 장보고를 제거한 후 그의 본거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섬의 주민들까지 다른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해야 했었다. 그로 인해 완도에는 그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제대로 남아있는게 없다. 그래서 몇 번의 이쪽 답사여행에서도 번번히 빠졌던 곳이다. 어쨌든 이번에 이곳을 다시 찾은건 나 역시 드라마 때문이니 텔레비젼의 위력이란...(드라마를 한참 재미있게 봤는데 요즘은 장보고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오바하는 장면들이 거슬려 안본다. 성질머리 하고는...ㅡㅡ;) 두 곳에 세트장이 건설되어있었다. 먼저 가까운 신라방 세트장을 찾았는데 문경에 있는 왕건 세트장의 썰렁함에 비하면 훨씬 볼거리가 있다. 혹시나 촬영팀이라도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기대감에 갔는데 곳곳에 관광객만 넘쳐나는군. 갑자기 남편이 월요일엔 촬영을 안하고 쉰단다.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거없이 한마디 해놓고는 딴청이다)
다음에 간 청해진 세트장에서는 본격적인 장보고의 청해진 활동을 위해 세트장 건설이 한창이었다. 왕건 세트장 보고 지나치게 얼렁뚱땅 만들어진 건물들에 황당했었는데 여긴 공사가 장난이 아니다. 거의 건물들을 새로 짓는 수준이다.(우와! 우리나라 방송국들 돈 많아) 바다쪽으로 촬영에 쓰이는 배들이 점점이 떠 있어 구경갔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찬바람에 얼어죽는줄 알았다. 나 추운것도 안괜찮은데 우리 예린이야 오죽하랴? 예린이 갑자기 가자고 난리다. 아이가 견디기에는 바닷바람이 너무 엄청났다. 게다가 아침밥을 깨작거리기에 과자를 못먹게 했더니 그 심통까지 겹쳐서 심술이 바닷바람만큼이나 세다. 점심은 잘 먹겠다는 약속과 함께 매점에 가서 과자와 음료수를 안겨주고 나서야 기분이 풀렸다.(단순한 것^ ^...)
완도 해신 세트장 - 신라방, 많이 보던 모습이군
완도 해신 세트장 -청해진, 무지 추웠다.
몇 년 전 남편과 단둘이 찾았던 미황사를 다시 찾았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묵언수행중이니 절대정숙이라는 커다란 표지판 하나. 순간 걱정이 되어 예린이에게 "예린아 여기는 조용히 해야되는 곳이야 그러니까 떠들지 말자" 순간 예린이 왈 " 다음부터는 조용히 하는데 가지말자 왜 맨날 조용히 하는데만 가노"(허걱!!!) 중창공사를 몇군데 했음에도 아직은 미황사는 조용한 절이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달마산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대웅전이 들어서는 이를 압도한다. 지붕의 선이 어찌 저리 산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질까? 그러면서도 곳곳에 건물없이 담장을 터서 문을 만든 절집의 담장들이 아기자기하게 방문객을 맞이한다.
부도밭을 가기위해 절 뒷편으로 난 오솔길을 산책했다. 드디어 떠들어도 된다니 예린이만 신이났다. 아빠에게 목마를 태워달래고는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둘이서 갈때는 얼마안되던 거리가 아이랑 같이가니 왜 이리도 머냐? 둘이서 예린이를 번갈아 업고 안고 도착한 부도밭은 너무 깔끔하게 정리되어져 예전의 그 아기자기하던 맛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도 세월의 무게를 담담히 지내온 돌들은 여전히 정겹고 부도에 익살스럽게 새겨져 있던 게나 거북이의 모습도 정겹다. 어쩌면 엄숙할 수도 있는 이런 부도에 이런 정겨운 조각을 새긴 석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여기에 묻힌 스님 역시 인간미가 풀풀 풍겨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예린이가 부도에 새겨진 게에게 "꽃게야 내 풍선 줄게 잘 가지고 놀아"란다.
달마산과 어우러진 미황사 대웅전과 응진전
대웅전 앞뜰에서 풍선들고 신난 예린이
부도밭 가는 길의 담장위의 나무 -나무의 자람을 위해 담을 허무는 마음이 아름답다
전망을 모두 가리는 건물의 지붕 - 대웅전 앞에 새로 건물이 들어섰는데 건물을 잘못 지으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도로변의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로 갔다. 길거리에 커다란 표지판이 있어 찾아갔는데 시인의 흔적이라곤 집앞에 고은 시인이 써서 세운 철판뿐이다. 시인의 약력이 간단하게 소개된 글이었는데 고은씨 정도면 좀 다르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다. 집안에는 곳곳에 가난의 내음이 묻어나오고 조그만 안채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듯한데도 폐가의 분위기가 집을 압도한다. 피를 토하듯 시를 썼으며 지배자에게는 서슬퍼런 칼날이었던 그의 시를 생각하면서 조그만 시비라도 하나 시인의 집앞에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이 집앞에서 윤선도를 다시 생각했다. 단순히 부자냐 가난하냐가 아니라 누가 진짜 시인일까를 생각해본다. 어부가 없는 어부사시사는 거짓일뿐이다.
큰일났다. 내가 운전을 하는 사이 예린이와 놀아주던 남편이 전화통화를 길게 하는 바람에 피곤했던 예린이가 잠이 들어버렸다. 이제 좀 있으면 저녁먹을 시간인데 한 번 잠들면 옆에서 폭탄이 터진다 해도 꿈쩍도 않을 예린이가 밤늦게 일어나 밥투정에 안자고 놀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애가 잠드는 것도 모르고 전화에만 집중한 남편한테 신경질을 퍼부었다. 좀 미안하긴 한가보다. 그러면서 1시간이면 일어날거야 하는데 흥 어림없는 소리....
자는 예린이와 함께 오늘의 마지막 일정. 고천암호에 철새를 보러 갔다. 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극한 남편을 위해 잡은 일정이다.(나는 동물 별로 안 좋아한다. 무섭다. 특히 날개달린 것들. 바퀴벌레도 날개달린게 제일 싫다.) 고천암호에 도착하자 끝도 없이 펼쳐진 갈대밭이 엄청나다. 멋지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으랴? 날이 너무 추워져 차안에 있다가 나갔다가 하면서 새들을 기다렸다. 해 저물 무렵 갈대밭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석양진 하늘의 장관에 감탄하면서.... 새들은 이제 다들 떠났는지 기대했던 만큼 많이 날아오르지는 않는다. 그래도 감탄을 연발하는 남편...(그래 새가 좋나? 나는 비둘기나 가창오리나 백로나 다 새일뿐인데...)
고천암호의 가창오리들 - 이 새들은 아직까지 안가고 뭘하고 있을까? 다들 간것 같은데
고천암호의 끝도 없는 갈대밭
해는 지고 잠시 둘이서 자는 예린이를 보면서 고민을 했다. 이틀의 강행군에 좀 많이 피곤하고 원래 예정대로 내일 강진까지 둘러본다면 모레 개학이 부담스럽다. 원래 여행이란 아쉬움을 남겨야 하는거야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6시간을 차를 달려야 하나? 피곤하면 운전 교대하기로 하고 집으로 출발(결국 운전은 남편 혼자서 다했다. 대단한 체력이야...에구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