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돌이 > 남도의 마지막 겨울 햇빛 -첫날 진도

드디어 올 겨울 벼르고 별렀던 전남 해안쪽으로의 여행이다. 부산에서 진도까지, 반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군...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이제 짐챙기는건 선수급이다. 10분이면 끝) 셋이서 출발. 5시간 좀 넘게 걸려서 진도에 도착했다. 오늘도 우리 예린이는 최고의 여행 동반자이다. 카시트에 앉아 어찌나 잘 노는지... 좁은 차안에서도 어찌 그리 무궁무진하게 놀거리를 찾아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드디어 해남에 들어섰다. 그런데 차도 옆으로 펼쳐진 배추밭들의 배추가 전부 수확도 못해보고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한둘도 아니고 이 지역 배추밭들은 거의 다가 이모양이다. 중국산 배추가 엄청 수입된다더니 그래서인가 보다. 마음이 아프다.




               망금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도대교 - 아래가 울돌목(명량)이다

 내 기억속의 진도는 거의 15년 전이다. 그 때는 남편과 단둘이였으면 좋겠지만 우리 둘 외에 60여명의 인간이 우르르 왔었다. 그때의 진도에 대해서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밤의 진도대교가 참 환상적이었다는 것과 여관의 밥이 무지하게 맛있었다는 것 외에 정말 전혀 기억이 안난다. 밤의 진도대교도 집사람과가 아니라 여자 후배 한명과 둘이서 거닐었었는데 한 밤의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둘을 도둑으로 오인한 여관집 진돗개한테 물려죽을 뻔 했다. 옛 추억을 더듬어 옛날 그 여관지에 다시 들려 점심을 먹었다. 아직 그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반가웠지만 여전히 맛있는 밥도 반가웠다.

  다시 온 진도대교는 기억속의 것보다는 썰렁하다. 하지만 진도대교 옆 망금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진도대교의 풍경은 기억속의 그것보다는 못하지만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진도대교 바로 아래의 물이 바로 울돌목(명량)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얼마전 읽은 칼의 노래에서 읽은 명량대첩의 대목들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그저 우리나라 전쟁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의 하나로 기억될 뿐이지만 잠시 그날로 돌아가면 지금 저 바다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묻혔을까? 그들의 사연은 얼마나 구구절절히 많을까? 칼의 노래에서 적이 무리들로가 아니라 개인으로 보이는 순간의 이순신의 고뇌와 두려움을 떠올려보며 잠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것이 일본군이었든, 조선 수군이었든... 지금은 언제 소용돌이쳤냐는 듯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바다는 고요하기만 하다.

  금골산 5층 석탑을 찾아갔다. 여태까지 본 진도의 산과는 다르게 높지는 않지만 험준한 바위산인 금골산 아래 금성초등학교 내에 있었다. 고려말에 만들어진 백제 양식의 5층석탑이다.(백제의 탑 양식은 다른 지역에 비해 2층 기단부를 유난히 높게 만든다. 따라서 탑은 실제 높이보다 훨신 높아 보이고, 안정감 보다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한 상승감을 갖는다.) 완벽한 비례는 아니지만 이런 시골 외진 구석에서는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탑이다. 특히 초등학교 쪽에서 봤을 때 하늘을 등지고 선 탑의 상승감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고려말이면 백제가 망하고 통일왕조를 이룬지도 거의 700년의 세월이 흘렀을 터인데도 그 지방의 문화적 특성이 반복 재창조되는 건 어떤 힘에 의해서일까? 고려 중부에서는 다양한 양식의 탑들이 실험되어지고 있었음에도 이 지역에서 여전히 옛 양식이 그대로 재현되는 건 단순히 이 지방이 변방의 한구석이므로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좀 진부하게 들리긴 하지만 전통의 힘 같은 것? 하지만 둘 다 별로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군.... 이럴 때 상상의 힘이 필요한데 내 상상의 힘은 좀 딸린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다른 역사적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금골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싶지만 산을 보니 도저히 예린이를 데리고 올라갈 엄두가 안난다. 아이를 데리고는 좀 위험할 듯.... 하긴 하나쯤은 남겨놔야 다음에 다시 진도를 찾을 이유가 되어줄테니 아쉬운 눈길만 총총... 용장산성으로 향했다.


                                                   금골산 5층석탑


  남편의 말로는 분명히 대학 때 왔다는데 나는 도저히 기억이 안난다. 오늘 현장에 와봐도 처음본 것이다. 용장산성! 산성이라니 당연히 성곽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눈을 씻고 봐도 성곽이 없다. 다만 뒷산을 기대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지은 건물의 축대들만 남아있다. 알고보니 여긴 행궁터다.(행궁이란 왕이 수도 궁성외의 다른 지역에 갈 때 머물기 위해서 짓는 궁을 말한다.) 여기는 고려 정사에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왕족 온을 왕으로 세웠으니 바로 그의 궁궐 터이며 삼별초의 진도 근거지이기도 하다. 아마도 옛날에는 앞쪽에 성곽이 늘어서 있었으리라. 지금은 산성은 없어지고 궁궐의 축대들만 이렇게 남아있다. 전쟁 중이었으니 방어를 위해 궁궐도 이렇게 산을 깎아 지었으리라.
  이 자리에 서서 삼별초를 다시 생각해본다. 삼별초는 평소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우리 교과서는 여전히 삼별초의 항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루고 있다.(이건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통시절의 유산이다. 자신의 군사쿠데타의 역사적 정당성을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인 삼별초에서 찾고자 했던...이순신 장군의 성웅화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박통시절 강화되었다.) 하지만 삼별초의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울까? 그들이 몽고에 대항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진 그들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했던 것을. 삼별초가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집단 중에서는 공병(公兵)적인 성격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다.(40년간의 몽고와의 전쟁기간 그들은 몽고와 싸우지 않았다. 다만 강화도에서 최씨정권을 지켰을 뿐이다. 그리고 가끔 몽고군이 물러가면 세금을 걷으러 육지로 나갔다.) 그런데 이들의 항쟁이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되어지면서 이들의 횡포에 의해 무신정권 기간 내내 괴롭힘을 당했던 백성들의 고통, 겨우 전쟁이 끝나고 이제 평화가 찾아오나 했는데 다시 삼별초에 의해 전쟁과 군역의 고통으로 내몰려야 했던 강화도, 진도, 제주도의 백성들의 고통은 실종되어졌다. 또한 항쟁의 주역이 삼별초뿐이었던 것처럼 다뤄지면서 당시 중앙정부에 대한 절망이 원인이 되어 삼별초의 항쟁에 가담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외침은 실종되어져 버렸다.(박통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아직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국사 교과서 역시 정말 대단하다 ㅡㅡ;) 이 행궁의 건설에 동원되어지고 몽고와 마지막까지 싸웠던 백성들은 후대의 역사가 이들을 이렇게 푸대접할지 알았을까?


                                                           용장산성 행궁터

운림산방으로 향했다. 운림 산방은 조선말 소치 허련이란 사람이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집이다. 이 지방의 다른 문화재와는 다르게 굉장히 공을 들여 보존사업이 이뤄진 곳이다. 처음 입구에 들어서자 굉장히 웅장한 기와집이 보여 우와! 이 사람 진짜 부자였던가보다 했다. 알고 보니 오른쪽의 건물은 소치 허련과 그 후대의 그림들을 전시해놓은 전시관이다. 조선말 허련이 살았던 공간은 운림산방이라는 정자는 아니고 정자의 형태를 가미한 아담한 건물과 그 뒤의 초가 살림집이다. 양반집 치곤 아주 소박하다고 해야되나? 가난하다고 해야되나? 그런데 운림산방앞의 연못만큼은 웬만한 대갓집 연못보다 훨씬 크고 훌륭하다. 특히 뒷산은 마치 이 집안소유의 병풍인듯 느껴질 정도로 이 집과 어울리는 모양을 하고 있다. 앞으로 연못과 뒷산이 이 집의 경계가 되어주니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제일 커다란 집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면 정치가는 되기 힘들 것 같고 시인이나 화가같은 예술가가 저절로 될 것같다. 이 집안이 대대로 화가를 배출하는 이유를 알듯도 하다.


                                                               운림산방 전경

  옆에는 소치 허련 이후로 이 집안이 배출한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솔직히 동양화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는 허련의 그림은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선말 진경산수화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나선 한참 뒤에도 변방의 선비화가는 여전히 중국화풍 그대로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의 그림에 감응하기는 참 어렵다. 오히려 그의 3대째 후손 중 정말 멋지게 여백을 활용한 화가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기법이나 그런건 모르겠지만 산과 안개와 구름의 표현이 감탄사를 절로 나오게 하는 그림이었다.먹으로 그리면 산이요 여백은 그대로 안개가 되는 그림의 웅장한 기백에 입만 벌리고 섰다.



                            운림산방 전시실의 그림- 제목 몰라! 까먹었어요

  다시 오른쪽에는 진도 역사관이 있다. 말 그대로 진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놓은 진도 박물관이다. 곳곳에 만들어놓은 명량대첩이나 유배문화 등의 인형모형들이 예린이는 신기한가보다. 명량대첩의 모형 앞에서는 깨진 배와 물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엄마! 배가 부서졌어. 그리고 사람들도 빠졌어! 어떡해?"를 계속 되뇌인다. 표정은 또 울먹울먹...감수성이 유난히 예민한 예린이! 가끔은 엄마는 그런 예린이가 걱정스럽다.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갈려나...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서두러 세방낙조대로 향했다. 진도에서 낙조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곳. 세방낙조대!!! 30분가량을 차를 무식하게 달려 도착한 전망대앞 바다는 벌써 해는 넘어가고 마지막 여운이 섬들 너머 바다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이쪽 지역의 다도해는 경상도 지역의 다도해에 비해 별로 운취가 없었는데 여기만큼은 다르다. 바다에 점점이 섬들이 박혀있고 그 너머의 낙조는 말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얼른 "올해는 우리 예린이랑 해아랑 제발 아프지 않게 좀 해주세요" 소원을 빌었다. 남들은 일출보고 소원 빈다지만 늦잠꾸러기인 나는 불가능한 일이고 해야 그 해가 그 해인데 일몰의 해라고 안들어줄 리가 있겠나? 어디다가 빌든 내 맘이지.(^^)근데 해 떨어지고 나니 진짜 춥군.....



                                                                 세방낙조

  이제 오늘의 여정은 여기서 끝. 아니 아직 밥을 안먹었군.남편이 해남으로 가잔다. 해남가서 그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는군... 나도 역시 시간도 아낄겸 지금 해남으로 넘어가면 내일 동선이 좀 짧아질테니까.... 고픈 배를 움켜쥐고(우리는 항상 여행만 하면 배가 고프다. 그리고 한꺼번에 많이 먹는다.) 예린이는 남은 빵과 우유를 먹이고 컴컴한(정말 컴컴하다. 차가 거의 안다닌다)국도를 따라 해남으로 나왔다. 예전에 결혼 초에 둘이서 갔던 천일식당은 내일 찾기로 하고 오늘은 잘먹어 볼려고 잘한다는 해남 땅끝기와집이란데 들어갔다. 역시 음식은 맛있고 좋았지만 좀 많이 비싸다. 이정도 맛이면 다른 집에서도 훨씬 싸게 먹을 수 있을텐데... 본전 생각이 좀 나는군...



                                           밥집에서의 예린이 "예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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