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한민국 - 변화된 미래를 위한 오래된 전통
심광현 지음 / 현실문화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 봉산탈춤반이었다. 한참 기본기를 닦아야했던 고1때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도 빼먹어 결국 유령부원이 되고 말았지만, 나름대로 탈춤에 대한 관심은 키울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의아하게 여겼던 것이 2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양반과 스님을 풍자하고 희화하는 게 주된 내용인 탈춤이 우리네 놀이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탈춤패가 오일장이나 추수철만 쫒아다녀 먹고 살았던 것이 아니다. 원님 부임이나 행차와 같은 관아행사나, 마을 지주가 명절이면 돈을 내는 놀이마당에서도 봉산탈춤판이 벌어졌다.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少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로 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아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양반을 찾으려고 찬밥 국 말어 일조식(日照食)하고, 마구간에 들어가 노새 (원님)을 끌어다가 등에 솔질을 솰솰 하여 (말뚝이님) 내가 타고 서양(西洋) 영미(英美), 법덕(法德), 동양 3국 무른 메주 밟듯하고, 동은 여울이요 서는 구월이라, 동여울 서구월 남드리 북향산 방방곡곡(坊坊曲曲) 면면촌촌(面面村村)이, 바위 틈틈이 모래 쨈쨈이, 참나무 결결이 다 찾아다녀도 (샌님 비뚝한 놈)도 없습디다.

은근한 풍자나 비유도 아니고, 대놓고 개잘량, 개다리 욕을 해대며, 천지사방을 찾아봐도 사람다운 양반을 찾을 수 없다는 말뚝이의 저 대사가 버젓이 원님 앞에서 늘어졌었다니,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라 해도 도가 넘었다. 상인들 노는 양이니 모른 척 해줬다고? 오히려 구성진 골계미와 춤사위에 양반님네조차 흥이 났던 것일게다. 결국 조선시대 상류계급도 한자로 남겨진 무심미 보다는, 구전예술의 맥이 끊기지 않게 은근히 장려해준 것처럼 흥의 미학이 우위였던 것은 아닌지.

또 하나의 궁금증 역시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보기에 우리 가락은 대개 흥겹고 춤판이 꼭 따라붙는데,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한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고 국어며 음악이며 국사며 미술이며 교과서들이 입을 모으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지훈의 '승무'야말로 민족 정서의 체현이라고?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그 누구냐
절세가인이 그 어디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대신이야 대활련으로 설설이 나리소서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시구절시구 차차차(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

말뚝이의 성주풀이를 가장 잘 이어받는 것은 노래가락 차차차가 아니던가? 관광버스춤이 왜 생겼는데? 골목마다 노래방이 늘어선 나라가 얼마나 있단 말인가?

프랙탈이니, 퍼지니, 과학이론을 들고 와 우리 미학을 풀이했다고 하나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가 오로지 한이라는 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낱낱이 풀어헤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너무 낱낱이 헤치느라 남도 자연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김치 얘기로 건너뛰질 않나, 산수도를 얘기하다 전통 건축과 정원 이야기로 넘나드는 게 탈이라면 탈이다. 물론 프랙탈한 우리 자연의 멋과 퍼지한 김치의 맛이 일맥상통하고, 차경을 정원으로 끌어들인 조상의 지혜를 생각하면 산수를 그림으로 즐기나 건축으로 즐기나 매한가지겠지만, 논리 전개마저 프랙탈한 듯 해 정신이 없다.

약간의 불만을 말하긴 했지만 저자의 노고를 배은망덕 배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몇몇 논문을 통하여, 혹은 책의 한 대목으로 우리 민족의 흥에 대해 논한 바를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문화현상과 시대를 넘나들며 엮은 책은 처음인지라 드디어 구슬을 꿴 듯도 하고, 굴비 두름을 엮은 것 같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흥취론이 널리 자리잡아나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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