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 -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손정목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봄날이라고 여의방죽 벚꽃놀이가 연일 사진으로 올라온다. 허허벌판 모래섬이던 여의도에 어쩌다 벚꽃거리가 조성되었을까. 그 뒷 이야기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2권에 실려있다.

1971년 봄, 재일교포 한 분이 벚꽃 묘목 2,400주를 서울시에 기증했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으로 있었던 손정목은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벚꽃거리를 떠올리며 이 묘목들을 여의방죽에 심자고 건의했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걸쳐 시장을 비롯한 시청간부 전원이 나가서 묘목을 심었는데 당시 분위기는 몹시 침울했다고 한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김현옥 前시장이 벌인 또다른 대공사 여의도종합개발계획에 의해, 87만600평의 땅이 여의도에 조성되면 뭐하나.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일 수 있는 '훤하게 포장만 한' 대광장이 중앙부 요지에 들어서게 됐으니, 애당초의 개발계획은 공중누각이 되어버렸다. 317억의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서울시로선 여의도 택지매각이 유일한 타개책이었으나, 허허벌판의 택지는 거의 팔려나가지 않았다.

1971년 여름 새로운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고, 시범아파트가 성공하고, 결국 여의도는 서울의 제2도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벚꽃을 심던 당시로선 80만평의 모래밭을 둘러싸고 있는 제방에 주말까지 반납하며 묘목을 심는 기분은 참담했으리라. 미래의 계획도 없고, 현재 진행되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무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을 당시의 공무원들이 지금의 여의방죽 벚꽃놀이를 보는 감회는 참으로 남다를 것이다.

2권에서는 이외에도 소공동에서 화교들을 몰아내기 위해 시장이 사죄여행을 돌아다닌 사연과, 호텔사업을 통해 삼성과 롯데에 주어진 특혜의 뒷이야기도 구구절절 들을 수 있다.

* 윤중제는 일본식 한자어라는 숨은아이님의 지적에 따라 여의방죽으로 고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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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2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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