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이 책은 모파상의 <비계덩어리> 이상의 끔찍한 제목이다. <나쁜 피>라는 제목이 주는 절망감과 비교하면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제 한 몸을 희생했건만 그저 '비계덩어리'로 낙인찍혀버린 그녀란 그저 아이러니 수준이다. 나쁜 피가 있어 나쁜 운명을 만든다면, 나쁜 피가 은근슬쩍 이 집 저집 스며드는 나쁜 동네가 있다면, 나쁜 피를 가진 그미들에게, 나쁜 피와 결혼할 수 밖에 없는 그 세상에 과연 어떤 희망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작가는 어찌 하여 이토록 잔혹한 제목을 지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절망의 깊이가 한없이 아득하고 끔찍하다. 이 세상에는 '감히'를 외치는 고결한 피가 따로 있지 않다고 선포되어 있건만 굳건한 혈맹을 다지는 대기업 가계도의 복잡한 그물은 엄연히 존재하고, 21세기에도 '나쁜 피'가 스물스물 고이는 뒷동네가 도시 곳곳 숨어 있으며, '나쁜 피'가 되느니 차라리 투신하고 마는 목숨이 도처에 돋아나고 있다.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꾸준히 이야기하는 작가의 책 3권을 연달아 다시 읽고 나는 지인에게 졸라 '영자의 전성시대'를 선물받았다. 원래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읽고 하나씩 리뷰를 올릴 작정이었으나, 성말라 몇 자 먼저 끄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