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망설이다 이 글을 씁니다. 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제 생각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 쓰는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사실 님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할 생각도 했지만, 제가 보기보다 소심해서 잘 모르는 사람과 감정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거든요. 페이퍼로 정리해두면 님이 볼 가능성도 있지만 안 볼 가능성도 높고, 제3자가 볼 가능성은 대단히 높기 때문에 나름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때 새벽 4시 19분에 문자를 받고 잠이 깨서 정말 놀랐습니다. 솔직히 화도 났구요. 그래도 급한 사정이 있나 싶어 알라딘 중고샵에 들어와 배송중인가 아닌가 확인하고 답문자를 보냈습니다. 추석 연휴 때문에 택배가 밀린 거 같다고, 중고가 아닌 새제품을 목요일에 주문한 저도 아직 그 물건을 못 받았다고, 문자를 드렸습니다.
혹시 님이 4시 19분에 문자를 보낸 게 아니라, 연휴 뒤끝으로, 혹은 서버 점검 등의 이유로 SK에서 문자발송지연이 발생한 것인가 싶어 제가 문자를 받은 시간도 님에게 알려드렸고, 만약 SK로 인한 문제라면 통신사에 항의를 하기 위해 받은 문자, 보낸 문자 모두 저장해두었습니다. 그날 오전이 되서는 상식적으로 그 시간에 문자를 보낼 사람은 없을 거다, 분명 SK 문제일 거다 나름 확신하며 SK 흉도 보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오후에 님의 문자를 받은 뒤엔 다시 또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보내셨다구요. 그 사람도 저처럼 새벽에 문자를 받고 황당했을 거 같았고, 덩달아 경우없는 짓을 한 거 같아 마음도 불편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이런 이야기를 한 건, 입장 바꿔 생각하는 훈련을 해보시길 권하기 위함입니다. 상대방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깨있으니 다른 사람도 깨있겠거니, 혹은 내가 잠자리에 들기전에 문자를 보내놔야 내가 편리하지, 혹은 설마 문자소리에 잠이 깨겠어, 등등, 님은 전적으로 님의 입장에서 행동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단 물건을 받았으니 수령확인을 하든 말든은 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저라면 실수로라도 새벽에 문자 소동을 일으켰다면 미안해서라도 받자마자 수령확인을 했을텐데 말이죠.
아, 그렇다고 수령확인을 눌러주십사 부탁하기 위해 페이퍼를 썼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이런 얘기하기 조금 구차하지만 전문판매자도 아니고, 나름 월급쟁이라 판매금이 들어오든 말든 제 생활에 하등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님이 수령확인을 했나 안 했나 확인하는 과정이 제게 불쾌한 기쁨을 주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제 속에 편견이 생겼고, 그 편견이 사실이구나 나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님은 이렇게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선입관을 주셨습니다. 비록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실명관계에서 님은 오점을 남긴 것입니다. 억울하지 않아요? 막상 만나보면 님은 참 괜찮고 좋은 사람일 수 있는데, 누군가에겐 그 매력을 발산할 기회조차 없이 단정지어진다는 게?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건 그 사람을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거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 살 수 없는 거고, 세상은 생각보다 좁기 때문에 다시 안 볼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을 외다리에서 마주칠 일도 있거든요. 즉 항시 내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노력을 하는 거고, 그런 훈련이 덜 된 사람은 잘 모르는 누구에게 안 좋은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지만, 사실 이미 주변의 사람들에게 속칭 '찍혔을' 가능성이 높고, 사회생활하기 힘들어진다, 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 말이죠. 지금부터라도 님이 입장 바꿔 생각해보는 훈련을 시작하길 바랍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제 생각을 정리해둔 것처럼 '역지사지'를 좀 더 가슴 속에 새겨둘게요.
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정리된 거 같네요. 그럼 여기까지 총총.
덧붙임)
굳이 왜 이런 페이퍼를 쓸까 저도 좀 더 고민했는데요. 님이 싸가지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믿었나봐요. 님이 보낸 미안하다는 문자, 보관하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