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출처: 글틴 - 김경연 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시애틀 추장>에서와 비슷한 물음을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사진왼쪽. 아름드리미디어발간)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이래 상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서점의 독자 서평에 꾸준히 서평이 올라오고 있고, 언론의 찬사는 물론 곳곳에서 추천도서로 권해질 정도로 많은 독자들의 호응과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고 잔잔하고 훈훈하면서 애틋한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을 독자가 얼마나 될까 싶다. ‘따뜻한’ 이라는 가슴 푸근해지는 형용사가 ‘영혼’이라는 신비로운 명사와 조합된 제목에서 이미 그런 감동을 예고해 준다. 그에 반해 원제인 ‘작은 나무의 교육(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은 얼마나 건조한가. 여기서 ‘작은 나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이다. 그러니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다섯 살에 고아가 된 ‘작은 나무’가 산에서 사는 인디언 혼혈인 할아버지와 순수 인디언 할머니에게 보내져 그들과 함께 산 어린 시절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 시절은, 그 종족의 삶의 방식은 이미 상실되었음이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과거형으로 제시된다.



작은 나무의 교육



부모를 여읜 작은 나무는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낯선 환경 속으로 들어선다. 그런 외롭고 두려운 어린 아이를 인디언 할머니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부드러운 노래로써 ‘아버지’ 산, ‘형제’ 시냇물, 어린 사슴, 메추라기, 까마귀들이 ‘작은 나무’를 환영한다고 알려준다. 작은 나무는 편안한 잠으로 첫 밤을 보낸다. 그의 편안한 잠은 훗날 이어지는 따뜻한 날들의 예고이기도 하다.

작은 나무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배운다. 자연의 세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약육강식의 세계이지만, 이 법칙은 인간의 세계에 적용될 때와는 다르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디언 할아버지는 깨우쳐준다. 매가 메추라기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고 슬픈 얼굴을 하는 작은 나무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슬퍼하지 마라, 작은 나무야. 이게 자연의 이치라는 거다. 탈콘 매는 느린 놈을 잡아갔어. 그러면 느린 놈들이 자기를 닮은 느린 새끼들을 낳지 못하거든. 또 느린 놈 알이든 빠른 놈 알이든 가리지 않고, 메추라기 알이라면 모조리 먹어치우는 땅쥐들을 주로 잡아먹는 것도 탈콘 매들이란다. 말하자면 탈콘 매는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 거야. 메추라기를 도와주면서 말이다.”(24쪽)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인간들 사이에도 적용된다. 작은 나무의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으며, 신도 마찬가지”임을 작은 나무에게 알려준다. ‘이해’는 영혼의 마음을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는 것도.

우리는 책장을 넘기며 작은 나무와 함께 몸과 마음에 대해, 생명의 순환에 대해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체로키 종족의 역사에 대해, 인디언들의 참담하고 비극적이며 기나긴 눈물의 여로에 대해, 그들의 자긍심에 대해, 미국의 대공황기의 생활에 대해 알게 되며, 종교와 법, 위선 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것들의 복원을 꿈꾸며 아릿한 감동과 함께 책장을 덮게 된다. 비록 많은 인디언 이야기처럼 인디언을 신비화시키는 계열의 작품인 것이 살짝 거슬렸던 독자라고 해도 그 감동이 줄지는 않을 성싶다. 필자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그랬다.



변신은 무죄?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책을 혹시 인디언에 대한 일반화 내지 신비화가 내재해 있더라도 문화적 전유가 아닌, 당사자의 자기표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시애틀 추장>과는 달리 ‘조잡한 본질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전유가 아닌 작품의 한 예로 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는 한국어판의 작가 소개에서 싹튼 것이었다. 1976년에 처음 출간된 이 작품을 1985년 복간하면서 레나드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는 <무법자 조지 웨일즈>를 비롯하여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작품이 바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다. 당초 <할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저자가 동부 체로키 산 속에서 조부모와 생활했던 이야기를 엮은 자전적인 회상록인 동시에, 1930년대 대공황기의 생활에 대한 감동적인 서술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인간적인 기록이기도 하다.”(7쪽)



이 책을 복간한 뉴멕시코 대학출판부 역시 “포리스트 카터의 삶은 네다섯 살 때부터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의 할아버지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고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334쪽). 말하자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자전적인 작품임을 강하게 각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했고 뜻밖의 사실과 접하게 되었다. 그의 본명은 아사 카터(Asa Carter)이며, 그의 인디언 혈통에 대해서는 무관하다는 쪽과 유관하다는 쪽의 주장이 맞서고 있지만, 그 어느 쪽이든 그는 다섯 살 때 고아가 되지 않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던 자전적 요소가 허구로 밝혀진 것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원래 이 책은 ‘논픽션’이라는 부제를 달았다가 나중에 재출간되면서 삭제되었다고 한다.

 kkk단원이 '내 영혼이~'의 저자?


더욱 놀라운 것은 아서 카터가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철폐 정책에 강력히 반대한 ‘호전적 판사’이자 앨라배머 주지사를 4차례 역임한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의 연설문 작성자였고,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 단원이었다는 것이다.(사진왼쪽- 조지 월리스의 두 얼굴 사진)  심지어 한 사이트는 그를 “작가(Writer)/ 사기꾼(Fraud)"로 일컫고 있었다. 마치 열렬한 항일투사로 알려진 유명인사의 과거 친일행적을 접한 듯한 느낌이었다.

변신은 무죄다, 라고 했던가. 어느 날 문득,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따라서 변신 자체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 은폐가 내재해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공인이라면 특히 그렇다. 그러나 다행히 또는 불행하게도 문학의 영역은 윤리의 영역이 아니다. 다른 한편, 작가와 작품이 구별되는 것도 문학이다. 하지만 만약 <인어공주>를 사실은 히틀러가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 작품을 대할 수 있을까?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을 살펴보니 1996년에 저작권을 획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포리스트 카터가 실은 아사 카터임이 폭로된 다음의 일이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인어공주>를 히틀러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느냐 내치느냐 역시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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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9-18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아하하 결론이라기 보다 교훈 아닌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