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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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아는 것은 없으면서 과학을 동경한다. 독서모임에서 누군가는 이 책이 장르를 정의할 수 없는 뒤죽박죽 책이라 했지만, 내가 읽은 바 대로라면 이 책은 내가 꿈꾸는 과학서 그 자체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걸출한 분류학자에 대해 중고등학교 어느 때인가 배운 적이 있다. 고등학교 국민윤리에서인지, 대학교 철학과 사회 수업에서인지 우생학 논쟁을 다뤘을 때도 분명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었다. 하지만 그 둘의 기억은 조각난 채 각기 다른 서랍 속에 잠들어 있었고, 이 책을 통해서야 간신히 퍼즐 맞추기가 가능했다. 책을 반 정도 읽을 때까지도 난 데이비드 스타를 새로 만난 과학계 스타로 점찍고 있었고, 그의 편집증적인 분류학 몰두에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주니 말이다

데이비드 스타는 나의 무지를 꾸짖으며, 동물분류학의 세계로, 과학 속으로 내 손을 잡아 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다윈의 뒤를 이어 진화의 선물을 전달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진화는 우월성을 장담하지 않으며,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진화는 환경에 대한 적응의 선물이며, 종의 다양성을 보존해주는 생명체의 신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우생학자들은, 어쩌면 오늘날의 무지한 인간들도 진화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 하고 있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

장애인들의 목숨 건 이동권 투쟁을 휠레반이라며 욕하는 무지한 자들이 바라는 세상은 얼마나 편협하고 취약한가. 유모차를 끄는 가족과, 지팡이 짚는 노인들이 사라진 나라에서 그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마침내 데이비드 스타에 대한 고발이 낱낱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의 학력에, 번지르르한 수상 경력에 휩쓸렸던 나 역시 한 없이 비과학적 인간인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이제 더 이상 데이비드 스타를 위대한 과학자로 평하지 말자. 그는 비과학적 인간으로 인류의 과학사와 진보에 해를 끼친 존재이다. 여지껏 그를 떠받들도록 방치한 보수적 학계와 사회는 다 같이 반성해야 하며, 어두운 지배자들은 물리쳐야 할 존재이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라고 착각하도록 나를 완벽히 속여준 작가에게 너무 감사하다. 오랜만에 기승전결이 완벽한 책을 읽게 되어 행복하다. 후기마저 완벽하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너대학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기쁘다. 난 변화와 진보를 만든 책을 뒤늦게나마 읽은 영광을 누린 것이다.


<뱀꼬리>

작가가 추천했는데, 왜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아직도 윤계숙씨의 책을 번역 안 하고 있는 거죠?

Naming Nature가 속히 번역되길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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