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아직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나타나 제 마디에 들어맞는 것을 和라 하니, 中이란 천하의 大本이요, 和란 천하의 達道'라는 해석을 보면 중용은 道의 本이다. 또한 그 앞 부분만을 집중해 나타내지 않고, 나타낼 때 들어맞추는 것만을 크게 보면 처세술일 수도 있다. 길인지 방법인지 여전히 어리석은 나는 알지 못 하지만, 후자로 본다 해도 나는 中을 이룰 수는 있어도 和는 이루는 건 평생 요원할 거 같다. 

'마디에 들어맞는다(中節)는 말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지나치거나 모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랫동네 여자가 죽었는데 자기 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슬퍼한다든가 반대로 자기 어머니가 죽었는데 아랫동네 여자가 죽은 것처럼 슬퍼한다면 슬픈 감정의 발로가 中節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니 INFP인 우리 딸은 단박에 반박할 이야기다. 엄마는 감정이입을 너무 못 한다고,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늘 나를 비판하는 딸은 아랫동네 여자가 죽어도 슬피 울 거라 생각되는데, 이 와중에서도 中節에 禮를 잘못 입히면 딱 예송논쟁이 되겠다 싶다.


- '中庸이란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고 넘치지 않고 모자르지 않아 언제나 고르고 한결같음(平常)을 뜻한다'는 구절만 보면 중용은 내가 지금껏 바라온 삶의 자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군자는 중용을 실천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과 멈춤이 때에 들어맞는다'는 구절을 보면 딱 반박하고 싶어진다. 때에 맞추어 산다는 것이 노자의 無爲自然이 아님이 분명하니, 事勢에 맞춰 처신하는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고, 때를 앞당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쉬운 것은 中庸이다. 天命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 분수에 마땅히 얻을 만한 것을 기대한다. 그런 까닭에 원망도 탓하는 마음도 없다. 어려운 것은 反中庸이다. 요행을 바라는 자는 이치상 얻지 못하게끔 되어 있는 것을 구한다. 그런 까닭에 원망과 탓하는 마음이 많다'라는 구절 또한 오해의 소지가 많다. 무리하지 말고 분수에 맞춰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가?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를 누리고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하게 살며 오랑캐들 틈에서는 오랑캐로 처신하고 환난을 당해서는 환난을 겪으니 군자는 어디를 가든지 그 곳을 자기 자리로 삼는다'는 구절 역시 TPO를 따지는 게 무슨 道인가 싶다.

'中庸의 길은 자기 분수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할 만한 위치에 있어도 덕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고 덕이 있어도 그런 일을 할 위치에 있지 않으면 또한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 역시 위치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얘기로 곡해되기 딱 좋다.

가장 논란이 될 문구는 역시 27장이다. '나라에 도가 있다는 말은 다스리는 자가 도를 지킨다는 말이다. 그럴 때에는 말을 해서 자기 뜻을 이룬다. 그러나 다스리는 자가 도에서 어긋나 있을 때에는 침묵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事勢를 잘 알고 앞일을 밝게 보아 자기 몸을 잘 지키는 것이 곧 군자의 삶'이라니 춘추전국 시대상을 고려한다 해도 부끄러움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현주 목사 역시 하느님이 선악과를 둔 것은 당신을 거역할 수 있는 힘까지 인간에게 준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즉 인간은 때를 당기는 힘을 힘껏 써야 한다.

'知는 사람의 길을 잘 아는 것이요, 仁은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요, 勇은 굽히지 않고 나아감'이니 中庸은 重庸이어야 한다. 그러니 군자라면 용감하게 때와 장소와 위치를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곡진하면 능히 誠하게 되니 誠하면 꼴을 갖추게 되고 꼴을 갖추면 드러나게 되고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으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化한다'라니 誠을 다해 변화를 꾀하자.


- '반드시 中庸을 배워 학문이 깊어지면서 義가 精하고 仁이 熟하여 참으로 자기를 이길 수 있게 되어 사사로운 모든 욕심을 모두 버려야 中庸을 얻는다'라 하니 '남의 악을 숨김은 그 품이 크고 넓어서 능히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남의 선을 드러냄은 그 빛이 밝아서 아무것도 감추지 아니함을 보여준다'는 말이 남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주고 남에게 아부하는 간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사로움으로 남을 악하다 평하지 말고 내 사사로움으로 남의 선을 감추려 들지 말라는 공명정대함임을 알겠다.


- '중심에 서서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다는 말은 어느 한 쪽을 편들어야 할 경우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르지도 않게 편을 든다는 말이다. 누구를 끌어내려야 할 경우에도 그를 끌어내려야 할 만큼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르지도 않게 끌어내린다'는 말은 그 시대상에 맞춰 해석하자면 정의 실현=악인의 죽음으로 도식화되던 당시의 과한 형벌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德이 비록 모든 사람이 함께 얻는 것이라 하나 혹 誠하지 못한 자가 있어서 억지로 겉을 꾸미기만 한다면 知는 술수로 흐르고 仁은 질식하여 마르고 勇은 지나친 폭력으로 바뀌어 德이 아니게 된다'는 말 역시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죄형 법정주의의 근간이 중용일 수 있고 진실하고 성실한 中庸이 외교전에서 反戰을 꾀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의 사면은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어 혀를 차게 되고, 푸틴같은 또라이에게 국제사회의 誠이 과연 통하겠는가 싶기도 하다.


- '道는 사람한테서 멀지 않으나 사람이 道를 행한다면서 사람을 멀리 하면 그것은 道라고 할 수 없다'는 말에 난 또 대학 시절 나를 친절한 ATM기계라 비판했던 친구를 떠올린다. 중용이 한 발 떨어진 관조가 아니라 세속의 道여야 한다는 것이 좀 감동적이다.

'군자의 道는 뿌리를 자기 몸에 두어 서민에게 증거하는 것'이라니 크게는 국민의 소리를 듣는 것이고, '가까운 사람의 인정을 얻지 못하느 채 멀리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다면 그것은 군자의 길이 아니다'는 것처럼 내 곁의 변화를 일구는 것이다.

 

- 대체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장하신 목사님의 중용 해석은 한없이 따스하나 이게 맞나 싶은 해석도 있다. '上等 인간은 禀氣가 淸明하고 義理가 밝게 드러나므로 가르치지도 않아 스스로 안다 (중략) 그 다음 가는 사람은 사물의 당영한 理에 淸이 많고 濁이 적어 반드시 배운 뒤에야 안다 (중략) 下等 인간은 禀氣에 濁이 많고 淸이 적어서 고생을 많이 한 끝에 비로소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낸다'는 구절에서 인간이 타고 나기를 聖人이면 편안하게 행하고 大賢이면 이로우니까 행하는데, 누구는 애를 써서 행하지만 행하여 功을 이루고 보면 모두 일반이다라는 것은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도 갱생의 여지가 있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하등한 일반인이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애를 쓴 것이 그 功이 더 크다 해야 하지 않을까.  


- 뜬금없는 사족인데 '군자의 길은 겉으로 보아 검소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아무리 걸어도 싫증나지 않고 속에 비단옷이 있어서 보면 볼수록 무늬가 아름답고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에는 조리가 반듯하다'는 글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우리의 전통 미의식이 딱 중용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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