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의혹 한젬마씨 초고 분석해보니…

[한국일보   2006-12-25 18:43:47] 

문헌 자료 등 짜깁기·대필작가가 채워 넣도록 지시…원고라기 보단 메모·자료더미 가까워

“본인이 직접 쓴 내용을 작가가 다듬었을 뿐이다.” 대필 논란에 휩싸인 방송인 겸 화가 한젬마(37)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일보가 25일 대필 의혹이 제기된 한씨의 책 4권 중 <화가의 집을 찾아서> <그 산을 넘고 싶다>의 초고를 입수해 책 본문과 비교한 결과, 한씨와 출판사(샘터)의 주장과는 달리 ‘고쳐 쓰기’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확인됐다.

한씨가 직접 썼다는 초고는 글의 형태를 띤 초벌 원고라기 보다는 메모와 자료더미에 더 가까웠다. 초고에는 한씨가 기존 방송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원고, 인터넷과 각종 문헌에서 발췌한 자료들이 짜깁기 된 흔적이 역력했다. 또 글 중간중간 한씨 자신이 궁금한 부분이나 추가했으면 하는 부분들을 ‘V’자로 표시한 뒤 대필작가가 채워 넣도록 표기했다.

화가의 작품세계 설명부분도 짧게 메모만 한 뒤 대필작가에게 채워 넣도록 지시한 부분이 상당수 발견돼 ‘저자가 책임져야 할 내용까지 대필작가가 대신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더욱이 책에 등장하는 20명의 화가 중 양달석 윤두서 박생광 유영국 등과 관련된 글은 아예 초고에도 없어 “책에서 다룬 화가 중 일부는 대필작가가 전부 썼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필요한 내용 채워 넣도록 지시

한씨 초고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V’자 표시다. 한씨가 지난 13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대필작가가 조사해 채워넣도록 부탁한 부분으로, 개별 화가마다 수 차례씩 등장한다. 예를 들면 운보 김기창 화백의 초고에는 ‘이력을 보니 운보의 할머니도 한씨, 어머니도 한씨. 한씨는 청주 한씨 밖에 없다.

파는 V 몇 있지만 본은 하나다’라고 적혀 있다. 청주 한씨 문중에 파가 몇 개인지를 파악해 채워 넣으라는 의미다. 이 밖에 ‘조선 전람회 도록 있나. 국정의 역사에 대해’(서동진), ‘이인성 사망 당시 경찰자료 체크,(이인성), ‘오지호 기념관 언제 지어졌나, 현재 뭔가, 어떤 계획?’(오지호) 등이다. 고암 이응노의 경우 수덕여관의 미래, 미술관 운영의 어려움, 파리에서 이응노의 위상 등 20여개 가까운 항목을 대필작가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이쾌대를 다룬 초고에서도 유가족을 인터뷰해 첨가하라는 내용이 10여개에 달했다.

사색의 결정체인 표현과 비유 전혀 없어

대필작가가 ‘또 하나의 창작’ 수준에 가깝게 표현들을 바꾼 부분도 허다했다. 박수근을 다룬 책 본문에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처럼 친근한 사이지만 잘 챙겨주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글이 전개된다. 박수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체험을 통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씨 초고는 ‘박수근의 그림을 모르는 이는 간첩이다. 아니 간첩도 박수근을 알지 않을까’라는 구절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박수근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응노의 작품 <군상>을 설명하면서 비교 사례로 들었던 고은 시인의 <만인보>나 중국 테웨이 감독의 애니메이션 <피리부는 목동>, 영화 <바이바이블루스> 등은 초고에 전혀 포함돼 있지 않았다.

화가 작품세계까지 대필작가가 채워 넣어

더욱 심각한 것은 화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도 대필작가가 상당부분 썼다는 점이다. 김기창 화백의 경우 책 본문에는 운보가 다녔던 내수성당의 수녀 형상을 띤 스테인드글라스와 운보의 작품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비교하면서 수녀가 된 운보의 막내딸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지만 초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운보의 작품 <태양을 먹은 새>를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대조한 부분도 초고에는 없다. “운보의 이 새는 오히려 반대이다. 파괴한 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품으면서 창조한다. 불덩어리를 삼키면서 그 뜨거움과 고통을 딛고 또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침묵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운보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받은 입선작 <널뛰기>를 통해 운보의 무의식을 엿 본 감상 또한 적혀있지 않다. 또 본문에는 거의 한 페이지 분량으로 고암의 작품세계인 <문자추상>을 설명하고 있지만, 한씨 초고에는 방송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원고와 ‘작품설명 보충’이라는 지시사항이 전부다. 결국 대필작가가 고암의 작품세계를 한씨 대신 설명한 셈이다.

이쾌대의 <자화상>과 <군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초고에는 ‘자화상이 많다.(자화상) 집단누드 자료이며 국내 최초를 기록함.(군상)’으로만 적혀 있지만 책 본문에선 4페이지에 걸쳐 작품설명이 돼 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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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2-2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건 너무하네요. 완전 작업지시만 하고선.

키노 2006-12-2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완존히 충격 먹었습니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