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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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반환점이란 대체 언제쯤 찾아오는 것일까?  

살아가는 것은 마라톤 레이스와 갈라서 반환점을 알려주는 표식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한번은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123p-  

<9월의 4분의 1>의 저자 오사키 요시오는 인생의 반환점을 찾는 작업은 과거를 돌아봄으로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의 반환점 찾기는 책 속에 담긴 네 가지 짧은 이야기에서 시도된다. 그런데 그의 반환점 찾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알려준다.  

예를 들면 지우개라고 하는 것은 미리 그 기능을 예상해서, 그렇게 되도록 설계해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달리 예상되는 기능도 설계도로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존재를 실존이라 부르기로 한다. -216p-  

그 깨달음이란 바로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목적을 가진 존재(지우개)가 아니라 이 책의 등장인물 각각에게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짐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들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추리해봄으로써 이야기 속에 몰래 침입한 쾌감을 맛본다.  

<보상받지 못하는 엘리시오를 위해>의 체스와 엘리시오 조각상,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의 장기와 명왕성. 그리고 동물들의 화폐단위 기린,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의 레드 제플린의 음악들. 그리고 <9월의 4분의 1>에서의 quatre septembre.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30페이지 정도에서 느꼈던, ‘쳇! 또 그 흔한 하루키식의 뻔한 사랑타령인가?’ 라는 실망감이 책장을 덮는 동시에 ‘실존에 대한 답은 이것인가?’ 라는 만족감. 그리고 ‘나에게 실존하는 것, 실존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나에게 반환점이란 언제가 될까?’ 라는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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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재산경영의 미래 - 비즈니스 전쟁에서 이기는 전략
고정식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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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스마트폰 전쟁을 주도하는 애플과 삼성. 이 두 거인의 싸움은 매일같이 우리들의 입과 입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 싸움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하는 특허분쟁과 관련된 기사들은 과연 누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인가라는 예측을 섣불리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 싸움의 결과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식재산경영의 미래』를 읽어본다면 위와 같은 동일한 업종간의 주도권 싸움보다 더 큰 싸움이 전 세계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플과 삼성의 승자가 궁금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표면적인 나무들 말고 숲을 보자는 것이다. 혹시 NPE라는 단어를 들어본적이 있는가? 'Non-Practicing Entities'라는 단어의 약자로 쓰이는 NPE를 두고 여러나라의 기업인들은 속된말로 특허괴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인터렉추얼벤처스(IV)라는 기업을 이 책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이 NPE들의 가장 큰 특징인 동시에 문제점은 실제 제품을 생산 · 제조 · 판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업과 특허분쟁에 엮이게 되면, 앞서 언급한 애플과 삼성의 시장 점유율 싸움과는 다른 양상으로 흐르게 된다. 쉽게 말해서, 특허분쟁에 휘말린 기업은 무형의 적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시장점유율과는 전혀 관계없는 싸움. 이기면 본전 지면 로열티를 물어야하는 그런 싸움 말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의 기술집약적 산업의 제품들은 그 제품 속에 수 백개의 특허가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들과의 싸움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리고 이런 NPE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서 저자는 '지식재산권중심의 기술획득전략'이라는 대안을 마련했고, 이 전략은 대한민국 내의 대학, 중소기업을 포함하여 서서히 실행 중에 있다고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전략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미래의 성장동력을 예측하여, 그에 따른 여러가지 특허가 포함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NPE들의 특허권 분쟁을 줄여보자는 내용이다. 궁극적으로는 국내의 특허의 포트폴리오만 가지고도 NPE들의 특허를 피해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지식재산경영의 미래』은 위의 내용들 외에도 국가 브랜드 재고의 신장과 관련된 내용 또한 싣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예들과 관련 도표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내용이 중복되거나 겹쳐흐르는것을 느낄 수 있었고, 갑작스런 말줄임의 사용과 영어 약어 사용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었던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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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3판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3
E. H. 카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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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서 저는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관점. 정체성. 또 다른 말로는 프레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들은 인간이라는 개개의 존재들이 현재라는 시공간을 살아오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부딪힌 모든 경험들을 자신만의 고유한 뇌세포 속에 쓸어 담았다가 비웠다가 다시 새로운 것을 쓸어 담기를 반복. 그런 행위를 계속적으로 진행해 놓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역사가라는 인물들은 E.H.카가 이야기 하는 대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실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조리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내놓는 요리사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관점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은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하나의 이슈에 대하여 어떤 주장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관점이라는 것은 어떤 시대상황과는 별개로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인가요? 기사문학에 심취하여 미치광이가 된 <돈키호테>처럼 세상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관점을 갖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답은 “가능은 하다”일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반적인 개인이 아닌 한 시대를 해석해야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역사가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E.H.카는 묻습니다.

역사가는 어디까지 단일한 개인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자기의 사회 및 시대의 산물인가? 역사상의 사실은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에 관한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 사실인가?

스스로 답합니다.

역사가도 같은 '움직이는 행렬'의 어느 한 부분에 끼여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또 하나의 희미한 그림자 인물에 불과하다. 이 행렬과 함께 역사가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전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시각이 나타난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움직이는 행렬’이라는 것을 '사회조직의 모든 부분'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가라는 사람은 한 사회와 시대에서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올 수는 없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된다. 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역사가란 과학자와 같이 광범위한 현상을 보편적인 일반화를 통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움직이는 행렬’에도 좌표가 있듯이, 보편적인 일반화를 할 수 있는 역사가의 관점이라는 것에도 ‘생각의 좌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간에서도 시각차가 있고, 팽팽한 대립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들의 해석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이고, 일본의 역사적 행보에 우리나라 국민이 분개하는 것 역시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 좌표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바라봤을 때,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카가 제시하고 있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주장은 책 속에서 많은 논증을 거치고, 사회와 개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며, 진보개념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저작이 이처럼 가치가 있는 것은 20세기 초반을 움직이고 있었던 ‘사실주의 역사관’에 대항하여,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강력한 논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는 업적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이런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넓어지는 지평선’이라는 단원을 통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현대는 모든 시대 가운데서 가장 역사의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자기가 지나온 어둠을 뒤돌아보고 열심히 응시한다. 그것은 거기서 비쳐오는 희미한 빛이 그가 나아가려고 하는 암흑을 비추어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단순히 해석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과정을 통한 인간에 대한 해석들. 특히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이후에 대두된 ‘자기의식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스스로를 계발하려는 의지가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자유방임적인 것에서 계획적인 것으로, 무의식적인 것에서 자기의식적인 것으로,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믿음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경제적 운명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환이 이루어 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현재는 ‘타산지석’이라는 속담 하나로 응축되어,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속에 녹아들게 되었지만, ‘왜’라는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는 지적인 여행과정은 저에게 있어서 꽤나 크나큰 즐거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딱 한 가지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근 행동경제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다.”라는 관점에서의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의는 E.H.카가 설명하고 있는 ‘넓어지는 지평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할 수도 있다는 가정입니다. 

그 ‘잘못된 방향’ 이라는 것의 예를 들자면, E.H.카가 주장하는 대로 인간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개념 하에 철저히 계획적인 경제 정책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대공황과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 찾아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불확실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대량으로 투입하는 정책이 옳은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어서입니다. 포괄적인 의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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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젊은 것들 - 발칙한 반란을 꿈꾸는
단편선.전아름.박연 지음 / 자리(내일을 여는 책)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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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영풍문고에 들렀습니다. 헌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도착한 영풍문고 앞은 너무나도 썰렁했습니다. 사실 제가 오픈시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썰렁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날따라 "비 맞을래 말래?"거리는 하늘이 얄미워보였습니다. 삼산동 일대를 한 바퀴 휘~ 돌다가 결국에는 맥도널드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메뉴는 모닝메뉴 단 하나뿐 . "설탕 어쩌구저쩌구 "하는 직원 분의 말을 쿨하게 "됐어요."라고 튕겨버린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서 기다리길 한 시간 30분.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서점에서 또 한 시간 동안 뒤적이며 구입한 책이 바로 <요새 젊은 것들>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책이란 '파는 물건'이니까, 우리 꼭 '팔릴 만한 물건'을 만들자"던 그들의 결심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제 경험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20대면서 오프라인 서점에 한번 방문해 보신다면 분명히 한번쯤은 집었다 놓을 만한 강한 유혹을 느끼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요새 젊은 것들>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조금은 특이한 20대들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KBS 신년 기획 2010 한국인 분석 보고서> : 20대, "우리는 4번 타자" 편에서 처음 알게 된 한윤형 씨를 비롯하여,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그룹의 기획사 사장인 곰사장. 100분 토론의 '고대녀'로 유명한 김지윤씨는 저에게도 친숙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

이 분들이 1,2,3 번째로 등장하는 것을 보니……. 목차 순이 대략 인지도 순서 인 것 같기도 하군요. 나중에 박용준 씨 같은 경우나 반이다 그룹을 인터뷰한 계기가 제보나 영화를 관람하거나와 같은 우연적 요소가 있었던 것을 봤을 때 더욱 그러해 보입니다.

한윤형 :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의 시스템에 조금이나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라도 대안을 찾게 될 테니까. 지식인들은 그런 과정을 위해서 현재의 상황을 계속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곰사장 :

아마추어라고 해서 꼭 자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게 아니더라도 잘할 수 있지 않나. 붕가붕가레코드에 올인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사람들이 들을 만한 걸 내놓자.

김지윤 :

이 사회에서 작은 것을 따내려고 하더라도 다수의 힘을 보여줘야 가능하다. 그래서 ‘함께해야 한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와 촛불 시위는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움직였다. 반대로 말하면, 정치나 사회적 이슈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곧 정치적 무관심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민중의 관점’ 이 아니라 ‘소비자의 관점’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야만성이 있어요. 저는 이 야만성을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대안적 사회를 만드는 데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생산, 분배되고 그 체계가 권력자가 아닌 필요한 사람들이 토론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제가 추구하는 사회에요.

박가분 :

실질적인 공간을 점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 자리에 실제로 와서 말하고, 들어주고, 논쟁을 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사람들은 권위라는 것을 항상 외부에 놓고 생각을 하죠. 저는 순수한 투사들로 이루어진 지적인 공동체가 지금의 20대라든지, 젊은 사람들에 의해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남이 인정해주는 권위가 아니라 나로부터 나오는 권위. 제도권 내부이건 외부이건 중요한 것은 대중에게 먹혀들 만한 것을 창조해내는 역량. 확실한 자기만의 사유가 있다면 제도권 내부이건 외부이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촛불시위를 둘러싼 정치적인 맥락들도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촛불시위에 나오는 사람들조차도 그저 풍경으로 내면화하는 것이죠. 점차 일본화 되고 있어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라든지, 자기 주변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들을 내면적인 풍경으로 환원시키는 하루키식의 태도라든지.

김사과 :

한국에서는 수업시간이 하고 싶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이런 것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

한국에서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그 직업에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투자한다는 뜻.

세대가 어떤 보편성을 가지려면 ‘중산층 문화’라는 것이 있어야 될 텐데, 워낙 양극화가 심해지다 보니 한 세대 안에서 보편성을 가지기가 힘들어져요.

장석종 :

정체성과 현실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을 찾아야 해요.

즐거운 일이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아요. 돈을 버는 것보다 내가 좋아서 일을 하는 게 중요해요. 잡지 만들면서 초반에 돈을 거의 못 벌었잖아요. 그렇지만 그 시절이 정말 재밌었던 것 같아요.

박용준 :

요즘은 글 쓰는 것이 어려워요. 내 글에 어떤 거짓이 있을까 봐 두려운 거죠. 내가 이 글처럼 살고 있지 않으면서 글을 쓰는 건 아닌지 걱정하죠. 그렇게 되면 그 글은 결국 거짓된 글, 허영이 담긴 글이 되는 거죠.

인간은 쉽게 권력에 물들고 우월의식에 젖어요. 그래서 인간이 나약한 거죠. 저 또한 마찬가지에요. 그럴 때마다 우리끼리 혼을 내기도 하고 무조건적으로 경계하고 있어요.

대화와 소통 없이는 진정한 성장은 힘들다고 생각해요. 자기 완성, 자기 배려, 자기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거니까요. 관계가 잘 되려면 절대적으로 편견 없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갖춰져 있다면 변화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규모가 커지면서 욕망도 커지고, 또 그만큼 큰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도, 대상도 커지게 되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나누며 사는 게 대안인 것 같아요.

좋아서 하는 밴드 :

문화와 국적을 떠나서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감동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거리공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거죠.

고시공부를 하고 취직을 준비하는 친구들처럼 우리도 무언가 ‘준비’ 하고 있다는 것은 똑같아요. 뭐든 10년을 계속 한다고 해봐요. 그게 공부든 악기든, 그러면 그 사람은 그걸로 뭔가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저희도 마찬가지로, 그만큼 노력을 한 거예요. 다른 친구들이 스펙을 쌓는 것처럼 저희도 저희에게 필요한 스펙을 쌓고 있는 거죠. 그게 영어점수가 아닐 뿐.

반이다 :

“행복은 정말 열심히 찾아야 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흘러가는 대로 살아서는 정말 전혀 행복하게 살 수 없겠구나. 계속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해요. 하다못해 빡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시간을 확보하고 자기 좋아하는 것을 하려 한다면 계속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죠.

그 자신의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사회적으로 얘기가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일단 자기 친구들, 함께 술 마시는 친구들이나 일상적으로 만나는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그런 경험을 공유하고 정리 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다 읽고난 후, 별표를 진하게 쳐놓은 일부분을 살짝 옮겨 보았습니다. 그들이 삶을 대하고 있는 자세와 진솔한 이야기들. 그리고 ‘중딩’ 만난 셈 치고 인터뷰 하라는 그들의 유머 있는 말솜씨 덕분에 책장 넘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한번 내쉽니다. '저들은 10대부터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는데, 나는 왜 지금에서야…….' 라는 아쉬움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고개든 아쉬움이 내뱉은 "나도 그들처럼 어릴 시절부터 주위에 유명한 철학자의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에 나는 애써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통의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적인 교육을 받고 보통의 대학을 나온 나의 경험이 앞으로의 공부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말이죠.

저는 지금(이명박 정권 이후)에 이르러서야 저는 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A : 왜 남들이 하는 것을 우리가 따라해야 하는 것일까?” “ Q : 그래야 뒤쳐진다는 두려움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으니까.” , “ A : 핸드폰의 편리함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일까?” “ Q : 일이라는 것에서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 ” ,  “ A : 그렇다면 게임이라는 재미의 끝은 무엇인가?” “ Q :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
혹시 진정 발칙한 반란을 기대하고 계시나요? <요새 젊은 것들>이 이른 시기에 품고 있었던 발칙한 생각들을 많은 사람이 하기 시작했으며, 몇몇은 이미 미약하게나마 실천이라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로는 김예슬 양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란은 말 그대로 잘못되었음을 바로잡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배울 수 있듯이 반란은 성공도 할 수 있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새 젊은 것들>은 어느 정도 인지도를 확보한 성공한 인물들, 그리고 소위 '인 서울'에 위치한 명문대생 들을 위주로 싣고 있어서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보통 책의 뒷부분을 보면 대부분의 책들은 여러 가지 출판사항을 싣는 페이지를 삽입하는데(간기면), 이 책은 그 부분이 아예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책의 요소는 '왠지 이 책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되어 있는 걸까요? 280페이지의 인터뷰를 마친 후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보라색 면지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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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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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를 읽을 당시. 저의 궁금증을 가장 자극했던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미의 이름>은 앞 페이지의 일부만을 뒤적거리도록 허락한 채 굳게 입을 닫고 말았답니다. 

<장미의 이름> 함께 구입했던 <달의 궁전>의 책장을 먼저 넘겼습니다. 표지디자인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폴 오스터라는 이름이 멋스러워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집어든 <달의 궁전>에서 처음 저를 맞이하고 있었던 문장은 제게 책을 읽을 이유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가장 먼저 슬럼프, 무기력증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나의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빚내는 88만원 세대’ , ‘이태백’ , ‘청년실신’ 과 같이 우리 세대를 지칭하는 반갑지 않은 단어가 떠오르면서 혹시나 이 책에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행.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마르코 포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외삼촌이 가지고 있는 포그라는 성을 자신이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그를 돌봐주었던 삼촌까지 밴드생활을 위해 떠나 버리고 난 뒤에 그는 차디찬 세상에 홀로 남겨져야 했습니다. 아. 그의 곁에는 삼촌이 남겨준 1492권의 책들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에게 할당된 외로운 시간을 근근이 버텨보려고 했었지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라 그 책들을 고스란히 헌책방 주인의 음흉한 웃음소리 속으로 떠밀어 버리고 맙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미약한 힘에 대한 체념의 상태였을까요? 분노와 체념이 한데 뒤섞인 마르틴 포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거부활동을 벌입니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버린 것이었기에 그는 결국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채 세상을 등진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비를 피할 수조차 없는 텅 빈 공원이었고, 공원 내부의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쓰레기통이었습니다. 어느덧 그의 등 뒤에는 멸시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죽음이라는 글자가 그를 낙인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 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가지의 것이다.

엄청나게도 불운했던 그에게 우연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행운은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지난 날.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포그를 각별하게 바라봤던 키티 우라는 여인은 허공에 걸려있던 그를 구출해줍니다. 아마도 그녀가 그를 찾아 나섰던 이유는 같은 처지에 있다는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 말이지요. 

일.

포그를 심리적인 죽음에서 구해준 사람이 키티 우 라면 경제적인 죽음에서 구해준 사람은 토머스 에핑이라는 노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사랑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마르틴 포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노인은 괴팍한 성격을 가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화가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눈이 멀어버린 토머스 에핑이 그를 고용한 이유는 살아가기 위해서 손과 발뿐만 아니라 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비록 살면서 위대한 업적이나 많은 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가 지난 날 겪었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서였답니다.

화가라는 까다로운 직업을 가진 에핑의 눈이 되어주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주문하는 사항을 이야기해놓은. 그리고 포그가 직접 느끼고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본문의 176~180p를 들여다보면 포그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쓸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는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낸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7 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

그것들이 빛의 강도와 세기에 따라 달리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모습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말하자면 그 옆을 지나치는 사람이나 갑작스러운 돌풍, 이상한 반사 등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장의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같은 벽돌이라도 절대로 같은 수 없었다. 그것은 대기와 추위와 더위의 영향을 받아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지면서 마모되고 비바람을 맞아, 만일 누군가가 몇 세기에 걸쳐 관찰을 할 수 있다면 마침내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 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가 할 일은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들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에핑의 기억.

드디어 에핑은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었던 특별한 과거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지독함과 공허함.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은지를 알려고 해도 거기는 너무 넓고 그 범위가 너무 엄청나서 마침내는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지. 거기에는 세상도 땅도 아무것도 없었어. 마지막에 가서는 그게 모두 허구일 뿐이었지.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머릿속뿐이고.

누구든 자기가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끼면 고함을 지르고 싶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가슴에 응어리가 지면 그것을 몰아내지 않고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숨에 숨이 막힐 것이고, 대기 그 자체가 그를 질식시킬 것이다.

위의 본문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고, 또한 멋진 문장들로 이루어진 에핑의 과거는 달의 궁전의 책 속의 또 다른 책인 것 같았습니다. 서부개척시대를 살았던 에핑. 그가 봤던 모래사막의 풍경이 제 머리 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에핑은 풍족한 생활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라는 물질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려 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느끼면서 ( 무책임한 결혼 생활의 시작. 그 때문에 벌어진 자유의 압박이라는 요소도 있습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한 "내가 세상을 버린 또 하나의 행위"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순간에 발견한 어느 도적의 은신처와 그곳을 찾아온 도적의 동료들이 가지고 들어온 막대한 양의 돈은 에핑으로 하여금 또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우연은 포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마친 후, 급속도로 삶의 불꽃이 희미해져 갔던 토머스 에핑은 자신의 신념대로 기어코 얻은 돈을 불특정 다수의 호주머니 속에 꽂아 넣어 주면서, 비로소 자유를 느낍니다. 비를 맞아도 맞지 않는 이 세상을 초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계획했던 바로 그 날짜에 눈을 감습니다.

뿌리. 

애초부터 어머니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포그는 그의 어머니의 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아버지라는 사람의 인연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포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답니다. 먼저 알게 된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지요.) 그런데 이런 구성적인 장치로 인하여 충격적인 반전이 펼쳐집니다. 토머스 에핑의 유산을 물려받을 에핑의 아들이 바로 포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순간을 바라보면서 뭔가 이상한 기운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토머스 에핑이 자연스럽게 그의 친할아버지가 되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지요. 그와 동시에 이 책이 삼대가 겪은(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라는 동일한 관점을 제시) 시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즉, 보통 사람인 동시에 같은 사람이었던 이들이 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객관적으로 그 시대를 분석했다고 볼 수 있지요.

마르코 포그, 토머스 에핑, 솔로먼 바버. 이들의 3대기를 통해 20세기 초반에서 부터 후반까지의 미국 사회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달의 궁전>. 자신을 버리면서 시대에 저항했던 그들 세 사람의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상당히 비극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내용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혼자 힘으로는 세상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만약 이들 세 사람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뿌리 찾기를 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 결과를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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