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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미학 오디세이>를 읽을 당시. 저의 궁금증을 가장 자극했던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미의 이름>은 앞 페이지의 일부만을 뒤적거리도록 허락한 채 굳게 입을 닫고 말았답니다.
<장미의 이름> 함께 구입했던 <달의 궁전>의 책장을 먼저 넘겼습니다. 표지디자인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폴 오스터라는 이름이 멋스러워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집어든 <달의 궁전>에서 처음 저를 맞이하고 있었던 문장은 제게 책을 읽을 이유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가장 먼저 슬럼프, 무기력증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나의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빚내는 88만원 세대’ , ‘이태백’ , ‘청년실신’ 과 같이 우리 세대를 지칭하는 반갑지 않은 단어가 떠오르면서 혹시나 이 책에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행.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마르코 포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와 외삼촌이 가지고 있는 포그라는 성을 자신이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그를 돌봐주었던 삼촌까지 밴드생활을 위해 떠나 버리고 난 뒤에 그는 차디찬 세상에 홀로 남겨져야 했습니다. 아. 그의 곁에는 삼촌이 남겨준 1492권의 책들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에게 할당된 외로운 시간을 근근이 버텨보려고 했었지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라 그 책들을 고스란히 헌책방 주인의 음흉한 웃음소리 속으로 떠밀어 버리고 맙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미약한 힘에 대한 체념의 상태였을까요? 분노와 체념이 한데 뒤섞인 마르틴 포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거부활동을 벌입니다. 세상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버린 것이었기에 그는 결국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채 세상을 등진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비를 피할 수조차 없는 텅 빈 공원이었고, 공원 내부의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쓰레기통이었습니다. 어느덧 그의 등 뒤에는 멸시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죽음이라는 글자가 그를 낙인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 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가지의 것이다.
엄청나게도 불운했던 그에게 우연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행운은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지난 날.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포그를 각별하게 바라봤던 키티 우라는 여인은 허공에 걸려있던 그를 구출해줍니다. 아마도 그녀가 그를 찾아 나섰던 이유는 같은 처지에 있다는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 말이지요.
일.
포그를 심리적인 죽음에서 구해준 사람이 키티 우 라면 경제적인 죽음에서 구해준 사람은 토머스 에핑이라는 노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사랑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마르틴 포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노인은 괴팍한 성격을 가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화가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눈이 멀어버린 토머스 에핑이 그를 고용한 이유는 살아가기 위해서 손과 발뿐만 아니라 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비록 살면서 위대한 업적이나 많은 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가 지난 날 겪었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서였답니다.
화가라는 까다로운 직업을 가진 에핑의 눈이 되어주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주문하는 사항을 이야기해놓은. 그리고 포그가 직접 느끼고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본문의 176~180p를 들여다보면 포그 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쓸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는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낸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7 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
그것들이 빛의 강도와 세기에 따라 달리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모습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말하자면 그 옆을 지나치는 사람이나 갑작스러운 돌풍, 이상한 반사 등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장의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같은 벽돌이라도 절대로 같은 수 없었다. 그것은 대기와 추위와 더위의 영향을 받아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지면서 마모되고 비바람을 맞아, 만일 누군가가 몇 세기에 걸쳐 관찰을 할 수 있다면 마침내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 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가 할 일은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들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에핑의 기억.
드디어 에핑은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었던 특별한 과거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지독함과 공허함.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은지를 알려고 해도 거기는 너무 넓고 그 범위가 너무 엄청나서 마침내는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지. 거기에는 세상도 땅도 아무것도 없었어. 마지막에 가서는 그게 모두 허구일 뿐이었지.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머릿속뿐이고.
누구든 자기가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끼면 고함을 지르고 싶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가슴에 응어리가 지면 그것을 몰아내지 않고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숨에 숨이 막힐 것이고, 대기 그 자체가 그를 질식시킬 것이다.
위의 본문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고, 또한 멋진 문장들로 이루어진 에핑의 과거는 달의 궁전의 책 속의 또 다른 책인 것 같았습니다. 서부개척시대를 살았던 에핑. 그가 봤던 모래사막의 풍경이 제 머리 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에핑은 풍족한 생활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라는 물질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려 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느끼면서 ( 무책임한 결혼 생활의 시작. 그 때문에 벌어진 자유의 압박이라는 요소도 있습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한 "내가 세상을 버린 또 하나의 행위"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순간에 발견한 어느 도적의 은신처와 그곳을 찾아온 도적의 동료들이 가지고 들어온 막대한 양의 돈은 에핑으로 하여금 또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우연은 포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마친 후, 급속도로 삶의 불꽃이 희미해져 갔던 토머스 에핑은 자신의 신념대로 기어코 얻은 돈을 불특정 다수의 호주머니 속에 꽂아 넣어 주면서, 비로소 자유를 느낍니다. 비를 맞아도 맞지 않는 이 세상을 초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계획했던 바로 그 날짜에 눈을 감습니다.
뿌리.
애초부터 어머니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포그는 그의 어머니의 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아버지라는 사람의 인연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포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답니다. 먼저 알게 된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지요.) 그런데 이런 구성적인 장치로 인하여 충격적인 반전이 펼쳐집니다. 토머스 에핑의 유산을 물려받을 에핑의 아들이 바로 포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순간을 바라보면서 뭔가 이상한 기운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토머스 에핑이 자연스럽게 그의 친할아버지가 되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지요. 그와 동시에 이 책이 삼대가 겪은(같은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라는 동일한 관점을 제시) 시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즉, 보통 사람인 동시에 같은 사람이었던 이들이 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객관적으로 그 시대를 분석했다고 볼 수 있지요.
마르코 포그, 토머스 에핑, 솔로먼 바버. 이들의 3대기를 통해 20세기 초반에서 부터 후반까지의 미국 사회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달의 궁전>. 자신을 버리면서 시대에 저항했던 그들 세 사람의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상당히 비극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내용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혼자 힘으로는 세상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만약 이들 세 사람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뿌리 찾기를 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 결과를 머릿속에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