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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3판 ㅣ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3
E. H. 카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5월
평점 :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서 저는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관점. 정체성. 또 다른 말로는 프레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들은 인간이라는 개개의 존재들이 현재라는 시공간을 살아오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부딪힌 모든 경험들을 자신만의 고유한 뇌세포 속에 쓸어 담았다가 비웠다가 다시 새로운 것을 쓸어 담기를 반복. 그런 행위를 계속적으로 진행해 놓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역사가라는 인물들은 E.H.카가 이야기 하는 대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실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조리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내놓는 요리사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관점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은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하나의 이슈에 대하여 어떤 주장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관점이라는 것은 어떤 시대상황과는 별개로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인가요? 기사문학에 심취하여 미치광이가 된 <돈키호테>처럼 세상과 완벽하게 동떨어진 관점을 갖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답은 “가능은 하다”일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반적인 개인이 아닌 한 시대를 해석해야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역사가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E.H.카는 묻습니다.
역사가는 어디까지 단일한 개인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자기의 사회 및 시대의 산물인가? 역사상의 사실은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에 관한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 사실인가?
스스로 답합니다.
역사가도 같은 '움직이는 행렬'의 어느 한 부분에 끼여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또 하나의 희미한 그림자 인물에 불과하다. 이 행렬과 함께 역사가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전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시각이 나타난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움직이는 행렬’이라는 것을 '사회조직의 모든 부분'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가라는 사람은 한 사회와 시대에서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올 수는 없다. 아니 나와서는 안 된다. 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역사가란 과학자와 같이 광범위한 현상을 보편적인 일반화를 통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움직이는 행렬’에도 좌표가 있듯이, 보편적인 일반화를 할 수 있는 역사가의 관점이라는 것에도 ‘생각의 좌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간에서도 시각차가 있고, 팽팽한 대립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들의 해석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이고, 일본의 역사적 행보에 우리나라 국민이 분개하는 것 역시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 좌표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바라봤을 때,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카가 제시하고 있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주장은 책 속에서 많은 논증을 거치고, 사회와 개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며, 진보개념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저작이 이처럼 가치가 있는 것은 20세기 초반을 움직이고 있었던 ‘사실주의 역사관’에 대항하여,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강력한 논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는 업적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이런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넓어지는 지평선’이라는 단원을 통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현대는 모든 시대 가운데서 가장 역사의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자기가 지나온 어둠을 뒤돌아보고 열심히 응시한다. 그것은 거기서 비쳐오는 희미한 빛이 그가 나아가려고 하는 암흑을 비추어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단순히 해석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과정을 통한 인간에 대한 해석들. 특히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이후에 대두된 ‘자기의식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스스로를 계발하려는 의지가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자유방임적인 것에서 계획적인 것으로, 무의식적인 것에서 자기의식적인 것으로,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믿음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경제적 운명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환이 이루어 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현재는 ‘타산지석’이라는 속담 하나로 응축되어,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속에 녹아들게 되었지만, ‘왜’라는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는 지적인 여행과정은 저에게 있어서 꽤나 크나큰 즐거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딱 한 가지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근 행동경제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다.”라는 관점에서의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의는 E.H.카가 설명하고 있는 ‘넓어지는 지평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할 수도 있다는 가정입니다.
그 ‘잘못된 방향’ 이라는 것의 예를 들자면, E.H.카가 주장하는 대로 인간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개념 하에 철저히 계획적인 경제 정책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대공황과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 찾아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불확실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대량으로 투입하는 정책이 옳은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어서입니다. 포괄적인 의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