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츠요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1.


세 살배기 딸 아카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전업주부 5년차의 사요코. 그녀는 또래와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는 아카리 만큼이나 동네 주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향적인 그녀는 동네 공원 아줌마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파벌을 느끼며 결혼 전에 다녔던 회사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 <대안의 그녀>의 초반부는 이렇듯 외부 세계가 그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도 은연중에 그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기분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이래저래 사요코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무엇'이었다. 그것이 일이든. 돈이든.


16. 자기 또래의 여성이 입는 블라우스의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일까.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의외로 쇼크였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엄마들의 얽힌 관계를 피해서 공원을 전전하거나 아키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자서만 노는 것, 블라우스의 적당한 가격을 모른다는 사실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일을 하기 시작하면 블라우스의 가격도 알게 될 테고 공원 문제로 골치 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카리를 혼내는 일도 줄지 않을까.


2.


<대안의 그녀>는 크게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요코의 분투기이며, 다른 하나는 사요코의 현재에서 20년쯤  과거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타인과의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춘기 소녀. 아오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해서 어머니의 교향인 시골 마을로 전학을 하게 된다. 이미 여러 번 파벌의 희생양이 된 경험이 있기에 그녀는 이곳에서만큼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의 이상징후를 관찰하면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애쓴다.


44. 시간이 지나자 반 안에서 점점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활발해 보이는 여자 아이들, 종례시간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몸치장을 하는 놀기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 아오이는 어느새 지극히 평범한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그룹에 편입되어 있었다. 오두들 그다지 개성도 없고 그냥 앉는 자리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형성된 그룹 같다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와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그룹이었다.


3.


가쿠다 미쓰요는 사요코가 중심이 된 챕터와 아오이가 중심이 된 챕터 하나를 교차시키는 플롯을 사용한다. 이 플롯 위에 놓인 사요코와 아오이의 모습은 닮았다. 이 둘에서 현대인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가쿠다 미쓰요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 내향성을 지닌 인물. 홀로 남겨짐에 서서히 체념하는 인물. 그러나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마이너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이었고,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다.


356. 몇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책상을 붙이고 도시락을 함께 먹던 고등학생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가공의 적을 만들어서 한순간에 강하게 단결한다. 하지만 그 단결이 놀라울 정도로 무르다.


가쿠다 미쓰요는 사요코와 아오이처럼 성장이 가능한 현대인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지 않은 구제불능의 현대인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모습은 평상시 아무렇지 않게 뒷담화를 즐기는 부류의 사람. 무리를 지어서 누군가를 따돌리는 데 능한 사람을 생각하면 될 것 같. <대안의 그녀>에서는 기하라를 그런 인물의 대표자격으로 그렸다. 기하라를 바라보는 사요코의 생각을 좇으면 저절로 알게된다.


4.


<대안의 그녀>에서 나나코라는 인물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나코가 없으면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커다란 인물이다. 나나코는 시골마을로 전학 아오이의 곁으로 불쑥 다가온 소녀다. 겉으로 보기에 나나코는 쿨한 소녀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아오이보다 훨씬 더 멀찌감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알게된다.


197.

"난 학교에서 여러 소문을 듣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소중한 건 학교에는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모두들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야. 내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대신 지고 함께 괴로워할 정도로 난 관대하지 않거든."


200.  나나코가 안고 있는 빈 굴에 아오이는 엷은 공포를 느꼈지만, 동시에 끌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깊고 어두운 구멍은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공포도 불안도 불운도 주저함도 지루함도 혐오도 이 세상의 모든 불쾌한 기분을 흡수해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오이와 나나코는 학교 안에서는 서로 내색하지 않고 지내다가 학교 밖에서는 단짝친구가 된다. 이 어색한 관계는 아오이가 원했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녀들은 여름 방학동안 바닷가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더 친해진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개학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나코가 울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하게만 보였던 나나코의 여림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나코를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오이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들은 러브호텔을 전전했다. 잔고는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사고를 일으킨다.


219. 피곤함이 없는 곳, 러브호텔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 자금책을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곳, 뭐든 잘 되는 그런 곳, 나나코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지금도 아오이는 믿고 있다.


사고는 기자들이 원하는대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게 자극적으로 신문과 뉴스에 실린다. 가출한 소녀의 충격적인 사건을 알고나서 부모와 선생님같은 어른들은 그녀들을 갈라놓고, 아이들은 그녀들을 따돌렸다. 그런 생활을 매일 반복하면서 아오이는 나나코처럼 생각하는 게 오히려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아오이는 20년 넘게 나나코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아간다. 타인과는 아주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할까 전전긍긍하는것보다 애초에 선을 그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324. 그후. 나나코가 하던 말의 의미를 아오이는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이런 곳에 나의 소중한 것은 없다. 싫다면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강한 척하는 것도 허세도 아닌, 단순한 사실이었다.


328.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아오이 속에서 친해지는 것은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상실이었다.


5.


시간이 흐른 현재. 현재의 아오이는 일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요코로부터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요코와 아오이의 만남과 아오이를 깨달음으로부터 <대안의 그녀>의 플롯 중 첫번째 이야기는 두번째 이야기를 닮아간다. 단지 역할만 바뀌었을 뿐이다. 현재의 사요코가 과거의 아오이 역할을 하고, 현재의 아오이가 과거의 나나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상황에서 부정성이 일어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그녀>의 본질이자 날카로움이다. 과거의 아오이는 나나코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나코를 순순히 따라갔지만, 현재의 사요코는 아오이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아오이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이것은 직업을 갖고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이후의 사요코의 변화가 일으킨 부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272. "나도 이대로 하마마츠든 오사카든 가버리고 싶지만, 도망가봤자 해결되지 않잖아. 게다가 나라하시 씨, 모레는 일도 해야 하잖아. 우리 등에 짊어진 일들과 다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잖아. 해변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아니잖아."


사요코의 생각은 과거의 아오이가 나나코에게 했어야할 말이었다. 나나코의 부족한 점이었다. 어린 아오이에게 나나코는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여린 소녀였다. 나나코를 약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따끔하게 충고할 수 있는 것은 아오이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의 사요코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273.이 사람은 정말이지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모두 다르다, 다르니까 그 만남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라고 자기가 대전제로 깔아놓듯이 말해놓고선, 가정주부가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연락을 했다고 쳐도 지금 상황이라면 얼마나 골치 아픈쪽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가 없을까?


이 생각 이후에 나나코는 마냥 여린 소녀가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나나코로 살아온 현재의 아오이는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듬어야했다. 과거의 아오이는 불가능했지만 아오이를 닮은 현재의 사요코는 가능했다. 이것으로 과거의 아오이도 약해빠진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라는 의견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369. 사요코는 드디어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왜 우리가 나이를 먹는지, 생활 속으로 도망가서 문을 닫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만남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선택한 장소를 향해 다시 자신의 발을 내딛기 위해서다.


6.


힘들다. 글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궁금한 사람은 직접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구하고 싶은 분은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절판이라 중고책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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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책읽기 - 독서, 일상다반사
가쿠타 미쓰요 지음, 조소영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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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으면서 꼭 이야기해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던 것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박경리 선생의 <일본산고>에 대한 감상을 옮겨온다.

 

이 중에서 4번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사무라이 정신. 할복. 그리고 세계대전 당시의 카미카제 부대. 이들은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칼을 배에 쑤셔넣는)으로 죽으라 하는 그들의 주군은 누구인가? 먹이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국과 만세일계와 현인신에 닿아있다. 

 

한국인은 한이 쌓이면 울분을 토하지만,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일본의 문학는 삶의 문학이 아닌 죽음의 문학이라고 이름 짓는다. 선생이 쓴 산고 안의 소제목처럼 그것을 풀어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출구를 찾아서 일본의 근대문학은 크게 요동친다. 선생이 보기에 죽음의 문학은 인간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문학이 아닌. 욕망의 의식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관찰하는 문학이다. 관찰의 형태로 사랑과 치정이 구분될 수 없는 모양새로 얽힌다. 자살이 미화된다. 이로부터 탐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장르가 탄생한다. 


나는 <일본산고>를 읽은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문학은 삶의 문학에 가깝고, 일본문학은 죽음의 문학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통의 책읽기>에 소개된 일본문학 감상들을 읽으며, 일본 문학과 '죽음'이라는 말은 너무나 동떨어져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작가 카쿠타 미쓰요는 <보통의 책읽기>를 통해서 시대의 거센 바람. 개인의 실존. 즉. 어쩔 수 없는 내던져짐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언급하자면. 모로타 레이코의 <게이코>에 대한 감상에서 그녀는 다이쇼, 쇼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인 게이코를 이렇게 바라본다.

145. 게이코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쫓아가다 보면 사람의 목숨이나 인생에 대해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희롱하는 시대의 거센 바람이 보인다. 사람은 시대에 따라 살 수밖에 없지만 저자는 게이코를 시대에 희롱당한 여성으로 그리지 않는다. 시대에 저항할 수는 없지만 그 시대를 영양분으로 삼아 살아간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신에게 닥친 재난도 불행도 게이코는 살아가는 근력으로 바꾼다.


이외에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서전 <문맹>(국내 미출간인데 하루빨리 출간되기를 소망한다,) 에 대한 감상문에서 저자는 아고타를 살게 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평한다.


135. 저자에게 있어 '쓴다'라는 행위는 삶과 같은 의미였다. 돌아갈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어릴 적 나에게 충격을 안겨준 소설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음을 알게 되니 놀라움과 동시에 더욱 깊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속까지 관통하는 그 강인함은 언어와 함께 빼앗긴 가족과 추억을 되돌려 받기 위한 의지이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했다는 것을. 저자에게 있어 쓴다는 것은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역시 깊은 속마음까지 관통하는 책이다.


결론은 시대나 어떤 문학은 삶이고 어떤 문학은 죽음이라는 문제를 국가에 대한 분류로 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국가의 소설은 삶의 소설이고, 어떤 국가의 소설은 죽음의 소설일 리가 없다. 더 나아가서 작가의 경우에도 <추락하는 새는 날개가 없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인간실격>, <타나토스>와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죽음을 쓰는 작가라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이 삶을 다룰 때도. 죽음을 다룰 때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삶과 죽음을 구분해서 소설을 분류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2.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된 일본소설 하나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2015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라는 소설이다. 아마도 <보통의 책읽기>의 저자인 가쿠타 미쓰요가 굉장히 반가워했을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감상에서 좋은 소설이라고 말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보통에 얽힌 그녀의 글을 간추리며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생긴다.


12. '보통'이라는 건 커플 양쪽 모두의 공통된 인식이어야 한다. (중략)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보통'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건 최대공약수의 '보통'이며,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중략) 책과의 관계도 그와 꼭 닮았다.


209. 평범함, 범용함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다. 개성은 보통이 아닌 것과 동의어가 되어 타인과 다른 것, 일반에 매몰되지 않는 비뚤어짐을 무턱대고 찬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참을 수 없다.


223. 개성은 존중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아무리해도 바꿀 수 없는 '핵심'이란 결코 독창성이나 창조력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더 투박하고 때묻지 않은 그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핵심과의 싸움이 아닐까. 그 싸움을 지탱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사람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230.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해야만 하는 것, 특수해야만 하는 것이 개성이 아님을 이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절실히 깨닫게 된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특수하고,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절박하게 외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은 이렇게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다.


252. 그녀는 머물 곳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중략) 세상은 보통이 아닌 것을 배제하려 한다. 보통보다 많이 뚱뚱한 귀국자녀 후키코 씨가 따돌림을 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들은 배제되지 않기 위해 보통인 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머물 곳을 자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이라는 환상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면 자신이 머물 곳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라는 박경리 선생의 주장을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8.내게는 이 세계밖에 없다,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체념과 자기학대에 대한 심리묘사도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박경리 선생이 파악한 그들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다음을 모색한다는 것이 <사라바>가 대단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니시 가나코는 이러한 체념적 행위(다카코에서 아유무로 전이)가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309. 나는 자신의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나는 내 주위의 것만 믿었다. 그 진리에 바짝 달라붙어 알랑거리고 자신의 감정을 계속 무시했다. <사라바>는 이것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학에 얽힌 틀을 완전하게 깨뜨려버렸다.


3.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는 것도 같지만 머리가 아파서 이쯤에서 그만하고 생각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해보려한다.

여기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알게 돼서 기쁘게 생각한다.


처음에 읽을 때는 1부에서 다룬 작가의 전작으로 만들어진 작가론적인 글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3부를 읽고 책을 덮은 후에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3부에서 특히 감상 속의 깊은 사유가 느껴졌다.


메모해 둔 구절을 옮기며 마무리하고 싶다.


20. 나는 이야기를 따라잡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다. 15년을 걸려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오백 배, 천 배 책을 읽은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건 소용없다. 그렇게 뒤만 좇을 바에야 지식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나를 부르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는 편이 낫다.


26. 이 세상에는 추악한 것이나 번잡한 것. 절망과 불안과 질투와 체념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러한 것들, 혹은 그러한 낌새가 머리가 아닌 몸이 알지 못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읽을 수 없다.


35. 삶에 얽히는 번거로움, 모순, 잔혹함, 여의치 않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과 싸우거나 나약해지는 모습을 나는 이 다자이 오사무의 언어에서 본다.


37. 우리들은 늘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여 분류하면 안심할 수 있다.


75. 보통 사람은 자신의 핵을 이루는 부분을 숨기고 살아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오랜 시간 무방비 상태로 사람들에게 계속 드러내면 매우 위험하다. (중략) 그래서 사람은 지식과 이데올로기와 경험 혹은 이력, 지위가 있다면 지위, 돈이 있다면 돈, 그런 것들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다. 그러한 무장을 완전히 거부한 작가가 찰스 부코스키이다.


92. 하나하나의 소설이 사람의 생의 무게를 훌륭히 그려내고 있어 아프거나 수명을 다해서 사망한 것이 아닌 죽음의 수수께끼는 삶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


94.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항'이다. 세상, 상식, 안주, 권력, 또 자신에게까지 줄곧 저항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것 모두가 저항으로부터 생긴 알력이다. 알력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자유와 선택을 위임해 주었다.


104.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맛보는 것.


106. '우리들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단절되어 있다.'


121. '가족은 무엇일까'라는 한정적인 물음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일까'


138. "좋아, 사랑해"라는 감정만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이유는 아남을 깨닫게 한다. 강한 애증이 관계의 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247. 나에게 좋은 단편소설이란 실제 페이지 수의 몇 배로 세계가 부풀어 오르는 소설이다. 한창 읽고 있는 동안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소설도 있고, 다 읽자마자 왈칵하고 세계가 넓게 퍼지는 소설도 있다.


263. 내가 아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색다른 힘을 갖고 있다면 내가 보고 있는 현실로 침식해온다.


268. 우리들은 강하거나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것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공포나 불편함, 쾌락, 슬픔에도 의존한다.


4.


이  작품은  2005년 <대안의 그녀>라는 작품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가쿠타 미쓰요라는 작가가  2003년부터 2009년 까지 쓴 독서일기를 엮은 책이다. 오래 전에 이 책을 사놓은 기억이 있어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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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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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맹 가리가 세상에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유럽의 교육>.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2년 즈음을 담고 있다. 로맹 가리는 추위와 굶주림과 절망의 상징인 겨울을 배경으로 삼고서 독일의 식민지인 폴란드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다루고 있었다. 네이버 백과를 찾아보면 폴란드에서 벌어진 레지스탕스 운동을 가장 비참하다고 설명한다. <유럽의 교육>의 독립투사들이 빨치산(partisan)으로 지칭되는 이유도 아래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33.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이 깊은 숲 속에 숨어 살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빨치산'이라고 불렀고, 시골 사람들은 '산사람'이라고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을 굶주림과 추위와 절망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생존이었다. 그들은 땅을 파고 덤불로 가려 만든 은신처에서, 사냥꾼에게 쫓긴 짐승들처럼 예닐곱씩 무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때로는 아예 불가능했다. 그 지방에 부모나 친구가 있는 사람들만이 먹을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아니면 차라리 죽어버리기 위해 숲 밖으로 나갔다.


가장 비참하였던 것은 폴란드의 경우이다. 폴란드에서는 런던의 망명정부 지도 하의 레지스탕스와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폴란드 공산당이 서로 대립하였으며, 1944년 8월 1일 전자가 바르샤바에서 독일 점령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스탈린이 이것을 방치하였기 때문에 수만 명의 시민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하였다. 이와 같은 저항운동도 오늘날에는 남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볼 수 있듯이 강력한 군사적 저항으로 변모하여 레지스탕스라기보다 빨치산이라 부르고 있다.   -두산백과 레지스탕스 -


2.


139. 나는 증오를 알고 있어. 독일이 나에게 증오를 가르쳐주었어. 부모님을 잃으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겪으면서, 땅 밑에서 살면서, 그리고 만약 길에서 독일군이 나와 마주치더라도 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나 나를 불 앞에 앉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나를 보며 오직 피부 속에 총알을 쑤셔박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증오를 배웠어. 독일군에게는 오직 총알뿐이니까. 가슴을 겨냥하는 총알, 희망을 겨냥하는 총알, 아름다움을 겨냥하는 총알, 사랑을 겨냥하는 총알... 나는 그들을 증오해


이토록 독일을 증오하는 인물은 나치 독일에 부모를 잃은 열네 살의 야네크다. <유럽의 교육>은 열네 살의 소년 야네크의 공간을 중심으로 전지적 화자의 서술과 인물의 심리묘사가 소설의 대부분을 이룬다. 야네크의 시점과 일련의 일화들을 통하여 우리는 나치 독일의 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독일 군인. 이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산속에서 숨어 생활하는 빨치산의 대립을 읽을 수 있다.


<유럽의 교육>에서는 야네크의 시점이 닿지 않는 서사들도 포함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소설은 더욱 풍성해진다. 특히, <유럽의 교육>안의 또 다른 소설. 즉흥적이고 영웅적인 성향의 빨치산 무리인 도브란스키가 쓴 <유럽의 교육>이 그런 기능을 한다. 도브란스키가 이것을 쓰는 이유는 독일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당신 혼자가 아님을 일러줌으로써 반독일 정서를 강화하고, 항독 운동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의 상징이 빨치산 나데이다라는 영웅이었다.


317. 우리의 용기를 다시 북돋우고 적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우리는 빨치산 나데이다를 만들어냈어. 불사, 무적의 대장, 절대로 적에게 붙잡히지 않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체포되지 않는 대장, 어둠 속에 있을 때 용기를 내기 위해 노래를 부르듯이,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신화를 창조해낸 거야. 하지만 너무나 빨리 그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되어 우리 사이에 현실로 존재하게 되었어. 경찰도, 점령군도, 그 어떤 물리적 힘도 접근하여 흔들어댈 수 없는 대단한 인물, 그 불멸의 존재에게 모두가 정말로 복종하는 것 같았어.


3.


이들의 격렬한 대립으로 피해를 입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빠지지 않는다. <유럽의 교육>에서는 야네크가 아닌 또 하나의 시각으로 이를 표현한다. 야네크의 연인이 된 조시아의 심리 묘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유럽의 교육>의 서사 중에서 가장 탁월했던 순간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225. ... 그녀는 기다렸다.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녀는 즈보로브스키 맏형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통을 겪는 데 '마지막'은 없었다. 그리고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렸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고, 공기가 얼음처럼 혹독하게 차가웠고, 까마귀가 까깍댔고, 하늘은 창백했다. 그녀는 자문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들 제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녀는 나무들을 보았고, 그들의 단단한 껍질을 부러워했다. 그녀는 엄마를 생각했고, 야네크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더이상 전쟁이 없게 하기 위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어.' 하지만 이미 그녀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사람들은 어떤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 병사의 힘은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 그리고 문명의 발자취들은 폐허일 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문단을 통해 <유럽의 교육>의 모순을 조시아가 가장 먼저 깨달았음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의 교육>이 말하는 유럽의 교육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유럽의 교육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제국주의로 향하게 했으며, 나치 독일은 그 교육의 가장 큰 효율을 위해 움직이는 이데올로기 집단이었다.


그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탄생시킨 빨치산 나데이다 역시 또 다른 산물이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 위한 극단적인 저항 이데올로기. 이것 또한 유럽의 교육이 낳은 비극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조시아의 말처럼 어떤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4.


야네크는 독일의 장교가 아닌 어떤 독일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분노를 품은 채 일반 군인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을 때. 그 순간의 부조리한 경험을 통하여, 유럽의 교육이 이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획된 것의 모순을 알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한 독일이 독일이라는 이름에 속한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결국, 조시아가 깨달은 것을 깨닫게 된다. 야네크는 여전히 분노에 머물러있던 도브란스키. 이것이 상징하는 전 세계의 항독 지식인 무리를 넘어선다.


327. 그는 얼어붙어 있는 주변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시대가 저물 때까지 변화하지 못하고, 부화하지 못하고, 부활하지 못하고, 발아하지 못하고, 재생하지 못하도록 선고받은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급 범죄를 저지르도록, 죽이고 죽도록 선고받은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지평선이란 영원히 되풀이되는 과거였다. 그곳에서 미래란 새로운 무기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승리란 새로운 전투를 의미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사랑이란 눈에 들어온 티끌이었다. 그곳에서는, 얼음이 배를 가두어 힘없는 팔처럼 노를 축 늘어뜨리게 만들듯 증오가 마음을 옥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의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조시아의 자그마한 손도 만연한 냉기가 낳은 작은 얼음조각에 불과했다. 조시아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기대더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세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그녀의 마음을 스쳐서가 아니었다. 그가 너무 슬퍼 보이고 너무 넋을 놓은 듯이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도울 방법을 알 수 없어서였다.


328. 추악한 짓을 벌이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요. 타데크 흐무라가 옳았어요. 유럽에는 가장 오래된 성당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대학들, 가장 커다란 도서관들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가장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죠. 세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유럽을 찾아와요. 공부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신고 앉아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방아쇠가 당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요.


330. 야네크는 생각했다. 믿음을 품고 영감을 받은 인간 꾀꼬리들이 이 영원하고 경이로운 노래들을 부르며 얼마나 많이 죽어갔을까? 매혹적인 목소리에 담긴 약속이 실현되기도 전에, 추위와 고통과 경멸과 증오와 고독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인간 꾀꼬리들이 죽어가게 될까? 또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탄생이, 얼마나 많은 죽음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기도와 꿈이,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눈물과 노래가, 얼마나 많은 어둠의 노래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


5.


야네크의 시간은 고작 일년이 흘렀다.  

그러나 일년의 시간동안 야네크는 성장했다. 마침내 성인이 되었다.

유럽의 교육은 야네크(로맹 가리)의 손으로 새롭게 쓰일 것이다.

로맹 가리의 첫 소설이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야네크의 성장은 어쩌면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30. 야네크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도브란스키보다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그 대학생을 향한 거의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 본능이 갑자기 뜨겁게 솟구쳤다. 그는 빈정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우월하고 세상사에 통달한 듯이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깨를 으쓱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한 거냐고 신랄하게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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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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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리뷰는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빈 노트에 끼적여봐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쓰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노트북을 열었다. 지금부터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써 내려갈 것이다.



2.


내가 읽은 <투명사회>는 비판을 넘은 비난이다. 무엇에 대한 비난인가 하면 디지털 사회에 대한 비난이다. 어떤 디지털 사회인가 하면 신자유주의의 사상이 주입된 디지털 사회에 대한 비난이다. 자본과 결합된 무엇. 효율을 중시하는. 과시와 전시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행위, 혹은 실제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행위를 위하여 인류에게 제공되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읽다보면 여기서 '신자유주의 사상이 주입된'은 어느새 휘발되어 날아가버렸고, '디지털 사회'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한병철 교수는 홀로 남겨진 디지털 사회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비유하자면, 부모가 신자유주의 사상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신생아. 디지털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한병철 교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신생아인 디지털 사회 대하여 비난을 퍼붓고 있는 셈이다. 너희 부모님이 신자유주의인데. 그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모조리 유전으로 이어받아서 너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3. 


그가 현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비난하기 위해 꺼내든 도구들은 지난 시대의 아이디어다. 새로운 도구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대의 도구들을 가져와서 그것을 지금의 현상에 따라서 수정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거의 대부분이 비판적인 결론으로 끝맺음한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다며 마구잡이로 손질하면서도 자기 이론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듯한 그의 오만함이 굉장히 거북했다.


나는 <투명사회>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투명사회>의 상당부분은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투명사회>라는 책도 타자에게는 단지 하나의 정보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저자 자신은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병철 교수의 부정성의 철학은 굉장히 매끄럽게 읽힌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어떤 탄생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정성을 거쳐서 순방향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이것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배운 문학적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할 가능성이 부정성의 벽에 가로막혀서 그냥 시들어버릴 가능성도 잠재한 상태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을 견디기 힘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성과를 강조하는 피로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하기 전에 무조건 수용부터 하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투명사회>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보다 디지털 사회를 모든 가능성의 부정에 준하는 상태로  남겨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이 사회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기 보다는 이 사회에서 태어난 사실을 스스로 자조하게 만드는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어떤 주장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은 저명한 지식인이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4.


책을 읽으면서 모순을 발견했다. 한병철 교수는 디지털 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게 만든다. 개인이 나르시시즘에 빠져들면 군중은 합쳐지지 않고 분열된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합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제의사회와 전시사회의 특징을 다룬 부분을 보면 한병철 교수는 전시사회의 것들은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포르노적 사회이니 부정성이 존재하는 제의사회를 우월한 사회로 여긴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제의사회의 특징은 '분리, 구획, 폐쇄의 부정성'이다.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나르시시즘으로 빠져드는 디지털사회의 특징과 연결된다.


이것은 제의사회의 특징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디지털 사회에서도 제의사회의 특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현한다 하더라도 모순에 따르면 디지털 사회의 제의적 특성들도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어 사회 통합을 방해하기 때문에 비판받을 것이다. 결국 디지털 사회는 전시적 특성 때문에 비난받고, 제의적 특성 때문에 또 비난받는다.


5.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디지털 사회라는 것도 부모 말 잘듣는 빅데이터와 좋아요와 조회수와 별풍선이라는 이름의 디지털 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디지털 사회가 있는 반면에. 부모 말 안듣는 강남역문제에 분노하고, 메피아 척결을 외치고, 노동법 개악을 저지를 외치는 착한 디지털 사회도 있다. 심지어는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북살림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디지털 사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정말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이런 부모 말 잘듣는 디지털 사회를 뒤에서 교묘하게 이용하는 부류의 사람들. 예를 들면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는 사람들이나 조영남처럼 투명사회라는 착각에 숨은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자기 가치를 부풀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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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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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극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죄와 벌>의 좌절.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보통 인간의 살인.

살인자에게 주입한 어긋난 시선은 <붉은 소파>를 빌어서 또 하나의 좌절을 탄생시킨다.


384. 누구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는 순간이 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다고 해서 살인을 한다면, 이 세상은 멸망해버릴 겁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놈들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본래 그렇게 태어난 걸 남 탓을 했어요! 살인부터 계획했어요! 남을 팰 기회부터 엿봤어요! 그래서 저는 부추긴 겁니다!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도록,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도록!


누군가를 향한 비뚤어진 인간의 고백.

이 시선으로부터 인간의 가능성. 오마주는 길을 잃었다.


2.


232. 인간은 파노라마 사진이야. 파노라마 사진은 360도의 시각을 한번에 보여줘. 그 사진을 보면 자신이라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중략) 이 사진 속에는 최호식 씨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무슨 즐거운 일이 있었는가, 슬픈 일이 있었는가, 어떻게 극복했는가, 혹은 절망했는가, 그것들의 대부분을 사진 속에서 찾을 수 있어.


재혁의 말처럼


348. 이건 단순한 사진이 아니다. 삶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 일은 우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석주의 생각처럼


석주가 충실하게 따랐던 가르침.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

그 사진에 담긴 의도는 동류라고 생각한 정국의 생각처럼 비뚤어지지 않았다.


3.


만삭의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던 누이에게 향한 시선.


408. 석주는 그 웃는 표정 그대로 기절한 누나를 향해, 그런 누나의 품에 안긴 채 끊임없이 울어대는 은혜를 향해, 셔터를 눌렀더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으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여 그 순간의 희로애락을 담으려 들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열두 시간의 진통 끝 미소를 짓는 어머니와 쩌렁쩌렁 울어대는 갓난 아이에 향한 시선.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순간의 숭고함에 홀렸을 뿐이었다.


석주가 찍은 다른 사진에서도.

누군가의 목에 그려진 희미한 자국에 포커스를 맞추면서도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읽어냈던 것이다.


은혜의 마지막 사진에서도 그랬다.


250. 죽은 딸을 인정하기 싫어 그 딸을 살아 있는 듯 찍는 미치광이.


이것은 모든 아버지가 딸을 잃어버린 것을 부정하는 슬픔의 알레고리였다.


4.


404. 붉은 소파와의 여정, 시작은 도피였다. 추모였으며, 슬픔의 발로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훑어보니 이것은 그저, 사진일 따름이었다. 순간순간 붉은 소파에 앉은 그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이기 위해, 그의 인간다움이 돋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정적 순간의 집대성에 불과했다.


석주는 온 정신을 바쳐 나영의 사진을 찍어줬다.

평생 해왔듯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408. 누나의 탈진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진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며, 석주는 기대하는 것이었다. 나영에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한없는 포용력이 악으로 똘똘 뭉친 누군가의 죄악마저 감싸 안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 누군가가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아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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