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1.


비극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죄와 벌>의 좌절.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보통 인간의 살인.

살인자에게 주입한 어긋난 시선은 <붉은 소파>를 빌어서 또 하나의 좌절을 탄생시킨다.


384. 누구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는 순간이 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다고 해서 살인을 한다면, 이 세상은 멸망해버릴 겁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놈들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본래 그렇게 태어난 걸 남 탓을 했어요! 살인부터 계획했어요! 남을 팰 기회부터 엿봤어요! 그래서 저는 부추긴 겁니다!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도록,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도록!


누군가를 향한 비뚤어진 인간의 고백.

이 시선으로부터 인간의 가능성. 오마주는 길을 잃었다.


2.


232. 인간은 파노라마 사진이야. 파노라마 사진은 360도의 시각을 한번에 보여줘. 그 사진을 보면 자신이라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중략) 이 사진 속에는 최호식 씨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무슨 즐거운 일이 있었는가, 슬픈 일이 있었는가, 어떻게 극복했는가, 혹은 절망했는가, 그것들의 대부분을 사진 속에서 찾을 수 있어.


재혁의 말처럼


348. 이건 단순한 사진이 아니다. 삶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 일은 우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석주의 생각처럼


석주가 충실하게 따랐던 가르침.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

그 사진에 담긴 의도는 동류라고 생각한 정국의 생각처럼 비뚤어지지 않았다.


3.


만삭의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던 누이에게 향한 시선.


408. 석주는 그 웃는 표정 그대로 기절한 누나를 향해, 그런 누나의 품에 안긴 채 끊임없이 울어대는 은혜를 향해, 셔터를 눌렀더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으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여 그 순간의 희로애락을 담으려 들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열두 시간의 진통 끝 미소를 짓는 어머니와 쩌렁쩌렁 울어대는 갓난 아이에 향한 시선.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순간의 숭고함에 홀렸을 뿐이었다.


석주가 찍은 다른 사진에서도.

누군가의 목에 그려진 희미한 자국에 포커스를 맞추면서도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읽어냈던 것이다.


은혜의 마지막 사진에서도 그랬다.


250. 죽은 딸을 인정하기 싫어 그 딸을 살아 있는 듯 찍는 미치광이.


이것은 모든 아버지가 딸을 잃어버린 것을 부정하는 슬픔의 알레고리였다.


4.


404. 붉은 소파와의 여정, 시작은 도피였다. 추모였으며, 슬픔의 발로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훑어보니 이것은 그저, 사진일 따름이었다. 순간순간 붉은 소파에 앉은 그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이기 위해, 그의 인간다움이 돋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정적 순간의 집대성에 불과했다.


석주는 온 정신을 바쳐 나영의 사진을 찍어줬다.

평생 해왔듯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408. 누나의 탈진한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진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며, 석주는 기대하는 것이었다. 나영에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한없는 포용력이 악으로 똘똘 뭉친 누군가의 죄악마저 감싸 안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 누군가가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아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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