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읽으면서 꼭
이야기해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던 것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박경리
선생의 <일본산고>에 대한 감상을
옮겨온다.
이
중에서 4번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사무라이
정신. 할복. 그리고 세계대전 당시의 카미카제 부대. 이들은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칼을 배에
쑤셔넣는)으로 죽으라 하는 그들의 주군은 누구인가? 먹이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국과 만세일계와 현인신에
닿아있다.
한국인은
한이 쌓이면 울분을 토하지만,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일본의 문학는 삶의 문학이 아닌 죽음의 문학이라고 이름 짓는다. 선생이 쓴 산고 안의 소제목처럼 그것을 풀어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출구를
찾아서 일본의 근대문학은 크게
요동친다. 선생이 보기에 죽음의 문학은 인간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문학이 아닌. 욕망의 의식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관찰하는 문학이다. 관찰의
형태로 사랑과 치정이 구분될 수 없는 모양새로 얽힌다. 자살이 미화된다. 이로부터 탐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장르가
탄생한다.
나는
<일본산고>를
읽은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문학은
삶의 문학에 가깝고,
일본문학은 죽음의 문학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통의 책읽기>에 소개된 일본문학 감상들을 읽으며, 일본 문학과
'죽음'이라는 말은 너무나 동떨어져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작가 카쿠타
미쓰요는 <보통의 책읽기>를 통해서
시대의 거센 바람. 개인의 실존. 즉. 어쩔 수
없는 내던져짐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언급하자면. 모로타
레이코의 <게이코>에 대한 감상에서 그녀는 다이쇼, 쇼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인 게이코를
이렇게 바라본다.
145.
게이코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쫓아가다 보면 사람의 목숨이나 인생에 대해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희롱하는 시대의 거센 바람이 보인다.
사람은 시대에 따라 살 수밖에 없지만 저자는 게이코를 시대에 희롱당한 여성으로 그리지 않는다. 시대에 저항할 수는 없지만 그 시대를 영양분으로
삼아 살아간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신에게 닥친 재난도 불행도 게이코는 살아가는 근력으로 바꾼다.
이외에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서전 <문맹>(국내 미출간인데 하루빨리 출간되기를
소망한다,) 에 대한
감상문에서 저자는 아고타를 살게 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평한다.
135.
저자에게 있어 '쓴다'라는 행위는 삶과 같은 의미였다. 돌아갈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어릴
적 나에게 충격을 안겨준 소설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음을 알게 되니 놀라움과 동시에 더욱 깊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속까지
관통하는 그 강인함은 언어와 함께 빼앗긴 가족과 추억을 되돌려 받기 위한 의지이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했다는 것을. 저자에게 있어 쓴다는
것은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역시 깊은 속마음까지 관통하는 책이다.
결론은
시대나 어떤 문학은 삶이고
어떤 문학은 죽음이라는
문제를 국가에 대한 분류로 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국가의 소설은 삶의 소설이고, 어떤 국가의 소설은 죽음의 소설일
리가 없다. 더
나아가서 작가의
경우에도 <추락하는 새는 날개가 없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인간실격>, <타나토스>와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죽음을
쓰는 작가라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이 삶을 다룰 때도. 죽음을 다룰 때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삶과 죽음을 구분해서 소설을
분류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2.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된 일본소설 하나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2015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라는 소설이다. 아마도 <보통의 책읽기>의 저자인 가쿠타
미쓰요가 굉장히 반가워했을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감상에서 좋은 소설이라고 말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보통에
얽힌 그녀의
글을 간추리며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생긴다.
12.
'보통'이라는 건 커플 양쪽 모두의 공통된 인식이어야 한다. (중략)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보통'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건
최대공약수의 '보통'이며,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중략) 책과의 관계도 그와 꼭 닮았다.
209.
평범함, 범용함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다. 개성은 보통이 아닌 것과 동의어가 되어 타인과 다른 것, 일반에 매몰되지 않는 비뚤어짐을
무턱대고 찬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참을 수 없다.
223.
개성은 존중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아무리해도 바꿀 수 없는 '핵심'이란 결코 독창성이나 창조력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더 투박하고 때묻지
않은 그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핵심과의 싸움이 아닐까. 그 싸움을 지탱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사람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230.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해야만 하는 것, 특수해야만 하는 것이 개성이 아님을 이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절실히 깨닫게 된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특수하고,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절박하게 외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은 이렇게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다.
252.
그녀는
머물 곳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중략) 세상은
보통이 아닌 것을 배제하려 한다. 보통보다 많이 뚱뚱한 귀국자녀 후키코 씨가 따돌림을 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들은 배제되지 않기 위해 보통인
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머물 곳을 자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이라는 환상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면 자신이 머물 곳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라는
박경리 선생의 주장을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8.내게는
이 세계밖에 없다,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는 체념과
자기학대에
대한 심리묘사도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박경리
선생이 파악한 그들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다음을 모색한다는 것이 <사라바>가
대단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니시
가나코는 이러한
체념적 행위(다카코에서
아유무로 전이)가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309. 나는 자신의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나는 내 주위의 것만 믿었다. 그 진리에 바짝
달라붙어 알랑거리고 자신의 감정을 계속 무시했다. <사라바>는 이것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학에 얽힌 틀을 완전하게 깨뜨려버렸다.
3.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는 것도 같지만 머리가 아파서 이쯤에서 그만하고 생각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해보려한다.
여기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알게 돼서 기쁘게 생각한다.
처음에
읽을 때는 1부에서 다룬 작가의 전작으로 만들어진 작가론적인 글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3부를 읽고 책을 덮은 후에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3부에서 특히 감상 속의 깊은 사유가 느껴졌다.
메모해
둔 구절을 옮기며 마무리하고 싶다.
20.
나는 이야기를 따라잡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다. 15년을 걸려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오백 배, 천 배 책을
읽은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건 소용없다. 그렇게 뒤만 좇을 바에야 지식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나를 부르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는 편이 낫다.
26.
이 세상에는 추악한 것이나 번잡한 것. 절망과 불안과 질투와 체념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러한 것들, 혹은 그러한 낌새가 머리가 아닌 몸이
알지 못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읽을 수 없다.
35.
삶에 얽히는 번거로움, 모순, 잔혹함, 여의치 않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과 싸우거나 나약해지는 모습을 나는 이 다자이
오사무의
언어에서 본다.
37.
우리들은 늘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여 분류하면 안심할 수 있다.
75.
보통 사람은 자신의 핵을 이루는 부분을 숨기고 살아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오랜 시간 무방비
상태로 사람들에게 계속 드러내면 매우 위험하다. (중략) 그래서 사람은 지식과 이데올로기와 경험 혹은 이력, 지위가 있다면 지위, 돈이 있다면
돈, 그런 것들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다. 그러한 무장을 완전히 거부한 작가가 찰스 부코스키이다.
92.
하나하나의 소설이 사람의 생의 무게를 훌륭히 그려내고 있어 아프거나 수명을 다해서 사망한 것이 아닌 죽음의 수수께끼는 삶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
94.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항'이다. 세상, 상식, 안주, 권력, 또 자신에게까지 줄곧 저항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것 모두가 저항으로부터
생긴 알력이다. 알력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자유와 선택을 위임해 주었다.
104.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맛보는 것.
106.
'우리들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단절되어 있다.'
121.
'가족은 무엇일까'라는 한정적인 물음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일까'
138.
"좋아, 사랑해"라는 감정만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이유는 아남을 깨닫게 한다. 강한 애증이 관계의 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247.
나에게 좋은 단편소설이란 실제 페이지 수의 몇 배로 세계가 부풀어 오르는 소설이다. 한창 읽고 있는 동안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소설도 있고,
다 읽자마자 왈칵하고 세계가 넓게 퍼지는 소설도 있다.
263.
내가 아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색다른 힘을 갖고 있다면 내가 보고 있는 현실로 침식해온다.
268.
우리들은 강하거나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것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공포나 불편함, 쾌락, 슬픔에도 의존한다.
4.
이 작품은 2005년 <대안의 그녀>라는 작품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가쿠타 미쓰요라는 작가가 2003년부터 2009년 까지 쓴 독서일기를
엮은 책이다. 오래 전에 이 책을 사놓은 기억이 있어서 반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