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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1.
이 책의 리뷰는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빈 노트에 끼적여봐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쓰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노트북을 열었다. 지금부터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써 내려갈 것이다.
2.
내가 읽은 <투명사회>는 비판을 넘은 비난이다. 무엇에 대한 비난인가 하면 디지털 사회에 대한 비난이다. 어떤 디지털 사회인가 하면 신자유주의의 사상이 주입된 디지털 사회에 대한 비난이다. 자본과 결합된 무엇. 효율을 중시하는. 과시와 전시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행위, 혹은 실제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행위를 위하여 인류에게 제공되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읽다보면 여기서 '신자유주의 사상이 주입된'은 어느새 휘발되어 날아가버렸고, '디지털 사회'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한병철 교수는 홀로 남겨진 디지털 사회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비유하자면, 부모가 신자유주의 사상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신생아. 디지털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한병철 교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신생아인 디지털 사회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고 있는 셈이다. 너희 부모님이 신자유주의인데. 그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모조리 유전으로 이어받아서 너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3.
그가 현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비난하기 위해 꺼내든 도구들은 지난 시대의 아이디어다. 새로운 도구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대의 도구들을 가져와서 그것을 지금의 현상에 따라서 수정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거의 대부분이 비판적인 결론으로 끝맺음한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다며 마구잡이로 손질하면서도 자기 이론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듯한 그의 오만함이 굉장히 거북했다.
나는 <투명사회>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투명사회>의 상당부분은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투명사회>라는 책도 타자에게는 단지 하나의 정보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저자 자신은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병철 교수의 부정성의 철학은 굉장히 매끄럽게 읽힌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어떤 탄생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정성을 거쳐서 순방향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이것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배운 문학적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할 가능성이 부정성의 벽에 가로막혀서 그냥 시들어버릴 가능성도 잠재한 상태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을 견디기 힘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성과를 강조하는 피로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하기 전에 무조건 수용부터 하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투명사회>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보다 디지털 사회를 모든 가능성의 부정에 준하는 상태로 남겨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이 사회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기 보다는 이 사회에서 태어난 사실을 스스로 자조하게 만드는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어떤 주장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은 저명한 지식인이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4.
책을 읽으면서 모순을 발견했다. 한병철 교수는 디지털 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게 만든다. 개인이 나르시시즘에 빠져들면 군중은 합쳐지지 않고 분열된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합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제의사회와 전시사회의 특징을 다룬 부분을 보면 한병철 교수는 전시사회의 것들은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포르노적 사회이니 부정성이 존재하는 제의사회를 우월한 사회로 여긴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제의사회의 특징은 '분리, 구획, 폐쇄의 부정성'이다.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나르시시즘으로 빠져드는 디지털사회의 특징과 연결된다.
이것은 제의사회의 특징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디지털 사회에서도 제의사회의 특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현한다 하더라도 모순에 따르면 디지털 사회의 제의적 특성들도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어 사회 통합을 방해하기 때문에 비판받을 것이다. 결국 디지털 사회는 전시적 특성 때문에 비난받고, 제의적 특성 때문에 또 비난받는다.
5.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디지털 사회라는 것도 부모 말 잘듣는 빅데이터와 좋아요와 조회수와 별풍선이라는 이름의 디지털 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디지털 사회가 있는 반면에. 부모 말 안듣는 강남역문제에 분노하고, 메피아 척결을 외치고, 노동법 개악을 저지를 외치는 착한 디지털 사회도 있다. 심지어는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북살림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디지털 사회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정말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이런 부모 말 잘듣는 디지털 사회를 뒤에서 교묘하게 이용하는 부류의 사람들. 예를 들면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는 사람들이나 조영남처럼 투명사회라는 착각에 숨은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자기 가치를 부풀리는 사람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