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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로맹 가리가 세상에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유럽의 교육>.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2년 즈음을 담고 있다. 로맹 가리는 추위와 굶주림과 절망의 상징인 겨울을 배경으로 삼고서 독일의 식민지인 폴란드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다루고 있었다. 네이버 백과를 찾아보면 폴란드에서 벌어진 레지스탕스 운동을 가장 비참하다고 설명한다. <유럽의 교육>의 독립투사들이 빨치산(partisan)으로 지칭되는 이유도 아래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33.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이 깊은 숲 속에 숨어 살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빨치산'이라고 불렀고, 시골 사람들은 '산사람'이라고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을 굶주림과 추위와 절망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생존이었다. 그들은 땅을 파고 덤불로 가려 만든 은신처에서, 사냥꾼에게 쫓긴 짐승들처럼 예닐곱씩 무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때로는 아예 불가능했다. 그 지방에 부모나 친구가 있는 사람들만이 먹을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아니면 차라리 죽어버리기 위해 숲 밖으로 나갔다.
가장 비참하였던 것은 폴란드의 경우이다. 폴란드에서는 런던의 망명정부 지도 하의 레지스탕스와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폴란드 공산당이 서로 대립하였으며, 1944년 8월 1일 전자가 바르샤바에서 독일 점령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스탈린이 이것을 방치하였기 때문에 수만 명의 시민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하였다. 이와 같은 저항운동도 오늘날에는 남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볼 수 있듯이 강력한 군사적 저항으로 변모하여 레지스탕스라기보다 빨치산이라 부르고 있다. -두산백과 레지스탕스 -
2.
139. 나는 증오를 알고 있어. 독일이 나에게 증오를 가르쳐주었어. 부모님을 잃으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겪으면서, 땅 밑에서 살면서, 그리고 만약 길에서 독일군이 나와 마주치더라도 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나 나를 불 앞에 앉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나를 보며 오직 피부 속에 총알을 쑤셔박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증오를 배웠어. 독일군에게는 오직 총알뿐이니까. 가슴을 겨냥하는 총알, 희망을 겨냥하는 총알, 아름다움을 겨냥하는 총알, 사랑을 겨냥하는 총알... 나는 그들을 증오해
이토록 독일을 증오하는 인물은 나치 독일에 부모를 잃은 열네 살의 야네크다. <유럽의 교육>은 열네 살의 소년 야네크의 공간을 중심으로 전지적 화자의 서술과 인물의 심리묘사가 소설의 대부분을 이룬다. 야네크의 시점과 일련의 일화들을 통하여 우리는 나치 독일의 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독일 군인. 이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산속에서 숨어 생활하는 빨치산의 대립을 읽을 수 있다.
<유럽의 교육>에서는 야네크의 시점이 닿지 않는 서사들도 포함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소설은 더욱 풍성해진다. 특히, <유럽의 교육>안의 또 다른 소설. 즉흥적이고 영웅적인 성향의 빨치산 무리인 도브란스키가 쓴 <유럽의 교육>이 그런 기능을 한다. 도브란스키가 이것을 쓰는 이유는 독일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당신 혼자가 아님을 일러줌으로써 반독일 정서를 강화하고, 항독 운동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의 상징이 빨치산 나데이다라는 영웅이었다.
317. 우리의 용기를 다시 북돋우고 적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우리는 빨치산 나데이다를 만들어냈어. 불사, 무적의 대장, 절대로 적에게 붙잡히지 않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체포되지 않는 대장, 어둠 속에 있을 때 용기를 내기 위해 노래를 부르듯이,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신화를 창조해낸 거야. 하지만 너무나 빨리 그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되어 우리 사이에 현실로 존재하게 되었어. 경찰도, 점령군도, 그 어떤 물리적 힘도 접근하여 흔들어댈 수 없는 대단한 인물, 그 불멸의 존재에게 모두가 정말로 복종하는 것 같았어.
3.
이들의 격렬한 대립으로 피해를 입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빠지지 않는다. <유럽의 교육>에서는 야네크가 아닌 또 하나의 시각으로 이를 표현한다. 야네크의 연인이 된 조시아의 심리 묘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유럽의 교육>의 서사 중에서 가장 탁월했던 순간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225. ... 그녀는 기다렸다.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녀는 즈보로브스키 맏형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통을 겪는 데 '마지막'은 없었다. 그리고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렸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고, 공기가 얼음처럼 혹독하게 차가웠고, 까마귀가 까깍댔고, 하늘은 창백했다. 그녀는 자문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지구는 둥글며 자전한다든가, 맞춤법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것 들 제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다 깨우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기다렸다. 그녀는 나무들을 보았고, 그들의 단단한 껍질을 부러워했다. 그녀는 엄마를 생각했고, 야네크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더이상 전쟁이 없게 하기 위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어.' 하지만 이미 그녀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사람들은 어떤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 병사의 힘은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 그리고 문명의 발자취들은 폐허일 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문단을 통해 <유럽의 교육>의 모순을 조시아가 가장 먼저 깨달았음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의 교육>이 말하는 유럽의 교육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유럽의 교육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제국주의로 향하게 했으며, 나치 독일은 그 교육의 가장 큰 효율을 위해 움직이는 이데올로기 집단이었다.
그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탄생시킨 빨치산 나데이다 역시 또 다른 산물이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 위한 극단적인 저항 이데올로기. 이것 또한 유럽의 교육이 낳은 비극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조시아의 말처럼 어떤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4.
야네크는 독일의 장교가 아닌 어떤 독일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분노를 품은 채 일반 군인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을 때. 그 순간의 부조리한 경험을 통하여, 유럽의 교육이 이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획된 것의 모순을 알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한 독일이 독일이라는 이름에 속한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결국, 조시아가 깨달은 것을 깨닫게 된다. 야네크는 여전히 분노에 머물러있던 도브란스키. 이것이 상징하는 전 세계의 항독 지식인 무리를 넘어선다.
327. 그는 얼어붙어 있는 주변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시대가 저물 때까지 변화하지 못하고, 부화하지 못하고, 부활하지 못하고, 발아하지 못하고, 재생하지 못하도록 선고받은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급 범죄를 저지르도록, 죽이고 죽도록 선고받은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지평선이란 영원히 되풀이되는 과거였다. 그곳에서 미래란 새로운 무기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승리란 새로운 전투를 의미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사랑이란 눈에 들어온 티끌이었다. 그곳에서는, 얼음이 배를 가두어 힘없는 팔처럼 노를 축 늘어뜨리게 만들듯 증오가 마음을 옥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의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조시아의 자그마한 손도 만연한 냉기가 낳은 작은 얼음조각에 불과했다. 조시아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기대더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세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그녀의 마음을 스쳐서가 아니었다. 그가 너무 슬퍼 보이고 너무 넋을 놓은 듯이 보이는데, 정작 자신은 도울 방법을 알 수 없어서였다.
328. 추악한 짓을 벌이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요. 타데크 흐무라가 옳았어요. 유럽에는 가장 오래된 성당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대학들, 가장 커다란 도서관들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가장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죠. 세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유럽을 찾아와요. 공부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이에요. 얼음판 위에 스케이트를 신고 앉아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방아쇠가 당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요.
330. 야네크는 생각했다. 믿음을 품고 영감을 받은 인간 꾀꼬리들이 이 영원하고 경이로운 노래들을 부르며 얼마나 많이 죽어갔을까? 매혹적인 목소리에 담긴 약속이 실현되기도 전에, 추위와 고통과 경멸과 증오와 고독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인간 꾀꼬리들이 죽어가게 될까? 또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탄생이, 얼마나 많은 죽음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기도와 꿈이,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눈물과 노래가, 얼마나 많은 어둠의 노래가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할까?
5.
야네크의 시간은 고작 일년이 흘렀다.
그러나 일년의 시간동안 야네크는 성장했다. 마침내 성인이 되었다.
유럽의 교육은 야네크(로맹 가리)의 손으로 새롭게 쓰일 것이다.
로맹 가리의 첫 소설이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야네크의 성장은 어쩌면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30. 야네크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도브란스키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그 대학생을 향한 거의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 본능이 갑자기 뜨겁게 솟구쳤다. 그는 빈정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우월하고 세상사에 통달한 듯이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깨를 으쓱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마나 많은 꾀꼬리가 필요한 거냐고 신랄하게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