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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츠요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1.
세 살배기 딸 아카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전업주부 5년차의 사요코. 그녀는 또래와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는 아카리 만큼이나 동네 주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향적인 그녀는 동네 공원 아줌마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파벌을 느끼며 결혼 전에 다녔던 회사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 <대안의 그녀>의 초반부는 이렇듯 외부 세계가 그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도 은연중에 그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기분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이래저래 사요코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무엇'이었다. 그것이 일이든. 돈이든.
16. 자기 또래의 여성이 입는 블라우스의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일까.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의외로 쇼크였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엄마들의 얽힌 관계를 피해서 공원을 전전하거나 아키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자서만 노는 것, 블라우스의 적당한 가격을 모른다는 사실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일을 하기 시작하면 블라우스의 가격도 알게 될 테고 공원 문제로 골치 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카리를 혼내는 일도 줄지 않을까.
2.
<대안의 그녀>는 크게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요코의 분투기이며, 다른 하나는 사요코의 현재에서 20년쯤 과거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타인과의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춘기 소녀. 아오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해서 어머니의 교향인 시골 마을로 전학을 하게 된다. 이미 여러 번 파벌의 희생양이 된 경험이 있기에 그녀는 이곳에서만큼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의 이상징후를 관찰하면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애쓴다.
44. 시간이 지나자 반 안에서 점점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활발해 보이는 여자 아이들, 종례시간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몸치장을 하는 놀기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 아오이는 어느새 지극히 평범한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그룹에 편입되어 있었다. 오두들 그다지 개성도 없고 그냥 앉는 자리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형성된 그룹 같다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와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그룹이었다.
3.
가쿠다 미쓰요는 사요코가 중심이 된 챕터와 아오이가 중심이 된 챕터 하나를 교차시키는 플롯을 사용한다. 이 플롯 위에 놓인 사요코와 아오이의 모습은 닮았다. 이 둘에서 현대인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가쿠다 미쓰요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내향성을 지닌 인물. 홀로 남겨짐에 서서히 체념하는 인물. 그러나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마이너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이었고,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다.
356. 몇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책상을 붙이고 도시락을 함께 먹던 고등학생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가공의 적을 만들어서 한순간에 강하게 단결한다. 하지만 그 단결이 놀라울 정도로 무르다.
가쿠다 미쓰요는 사요코와 아오이처럼 성장이 가능한 현대인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지 않은 구제불능의 현대인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모습은 평상시 아무렇지 않게 뒷담화를 즐기는 부류의 사람. 무리를 지어서 누군가를 따돌리는 데 능한 사람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대안의 그녀>에서는 기하라를 그런 인물의 대표자격으로 그렸다. 기하라를 바라보는 사요코의 생각을 좇으면 저절로 알게된다.
4.
<대안의 그녀>에서 나나코라는 인물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나코가 없으면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커다란 인물이다. 나나코는 시골마을로 전학 온 아오이의 곁으로 불쑥 다가온 소녀다. 겉으로 보기에 나나코는 쿨한 소녀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아오이보다 훨씬 더 멀찌감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알게된다.
197.
"난 학교에서 여러 소문을 듣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소중한 건 학교에는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모두들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야. 내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대신 지고 함께 괴로워할 정도로 난 관대하지 않거든."
200. 나나코가 안고 있는 빈 굴에 아오이는 엷은 공포를 느꼈지만, 동시에 끌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깊고 어두운 구멍은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공포도 불안도 불운도 주저함도 지루함도 혐오도 이 세상의 모든 불쾌한 기분을 흡수해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오이와 나나코는 학교 안에서는 서로 내색하지 않고 지내다가 학교 밖에서는 단짝친구가 된다. 이 어색한 관계는 아오이가 원했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녀들은 여름 방학동안 바닷가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더 친해진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개학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나코가 울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하게만 보였던 나나코의 여림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나코를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오이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들은 러브호텔을 전전했다. 잔고는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사고를 일으킨다.
219. 피곤함이 없는 곳, 러브호텔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 자금책을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곳, 뭐든 잘 되는 그런 곳, 나나코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지금도 아오이는 믿고 있다.
사고는 기자들이 원하는대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게 자극적으로 신문과 뉴스에 실린다. 가출한 소녀의 충격적인 사건을 알고나서 부모와 선생님같은 어른들은 그녀들을 갈라놓고, 아이들은 그녀들을 따돌렸다. 그런 생활을 매일 반복하면서 아오이는 나나코처럼 생각하는 게 오히려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아오이는 20년 넘게 나나코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아간다. 타인과는 아주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할까 전전긍긍하는것보다 애초에 선을 그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324. 그후. 나나코가 하던 말의 의미를 아오이는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이런 곳에 나의 소중한 것은 없다. 싫다면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강한 척하는 것도 허세도 아닌, 단순한 사실이었다.
328.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아오이 속에서 친해지는 것은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상실이었다.
5.
시간이 흐른 현재. 현재의 아오이는 일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요코로부터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요코와 아오이의 만남과 아오이를 깨달음으로부터 <대안의 그녀>의 플롯 중 첫번째 이야기는 두번째 이야기를 닮아간다. 단지 역할만 바뀌었을 뿐이다. 현재의 사요코가 과거의 아오이 역할을 하고, 현재의 아오이가 과거의 나나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부정성이 일어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그녀>의 본질이자 날카로움이다. 과거의 아오이는 나나코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나코를 순순히 따라갔지만, 현재의 사요코는 아오이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아오이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이것은 직업을 갖고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이후의 사요코의 변화가 일으킨 부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272. "나도 이대로 하마마츠든 오사카든 가버리고 싶지만, 도망가봤자 해결되지 않잖아. 게다가 나라하시 씨, 모레는 일도 해야 하잖아. 우리 등에 짊어진 일들과 다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잖아. 해변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아니잖아."
사요코의 생각은 과거의 아오이가 나나코에게 했어야할 말이었다. 나나코의 부족한 점이었다. 어린 아오이에게 나나코는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여린 소녀였다. 나나코를 약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따끔하게 충고할 수 있는 것은 아오이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의 사요코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273.이 사람은 정말이지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모두 다르다, 다르니까 그 만남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라고 자기가 대전제로 깔아놓듯이 말해놓고선, 가정주부가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연락을 했다고 쳐도 지금 상황이라면 얼마나 골치 아픈쪽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가 없을까?
이 생각 이후에 나나코는 마냥 여린 소녀가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나나코로 살아온 현재의 아오이는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듬어야했다. 과거의 아오이는 불가능했지만 아오이를 닮은 현재의 사요코는 가능했다. 이것으로 과거의 아오이도 약해빠진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라는 의견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369. 사요코는 드디어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왜 우리가 나이를 먹는지, 생활 속으로 도망가서 문을 닫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만남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선택한 장소를 향해 다시 자신의 발을 내딛기 위해서다.
6.
힘들다. 글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궁금한 사람은 직접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구하고 싶은 분은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절판이라 중고책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