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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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저드 베이커리의 제빵사는 믿을 수 없겠지만, 진짜 마법사였다. TV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짜 마법사가 아닌 세상을 조정하는 마법사였다.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그는 누군가에 의해서 비틀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마법의 빵을 팔고 있다고 했다.

 

주인공 ‘나’에게는 <위저드 베이커리>가 현실 도피와 숨 고르기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나’와 배선생의 관계가 냉각되어도 아침과 저녁을 거르지 않게 해주던 곳이었고, 무희가 가리킨 손가락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나’가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딘가에서 평소와 다른 어떤 힘이 발생하면, 그것과 일상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또 다른 유형의 힘이나 반대 극에 있는 힘이 한편에서 작용하여 지나치게 확산된 에너지의 흐름을 잡아당긴다. 그럼으로써 생성과 소멸의 논리를 이루어나간다. -105p-

 

빵 만드는 마법사는 세상의 여러 갈등에서 빚어지는(엔트로피 증가에 따른 순방향의 붕괴) 인간관계의 문제를 역방향의 빵들로 조정하는 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실수를 유발하는 악마의 시나몬 쿠키, 짝사랑하는 남자를 스토커로 만들어버린 체인 월넛 프레첼, 시간을 되돌리는 머랭 쿠키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소개되는 모든 빵은 강제력을 지닌 힘으로 현실을 바꾸는 도구였다.

 

하지만 ‘나’가 제과점에 머무르는 동안 들이닥치는 성난 고객들의 불만과 결말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판매하는 마법의 빵이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 같았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듯 마법사 대신해서 싸운 꿈속 몽마의 공격은 앞으로 겪어야 할 전투를 미리 연습하게 한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현실도피를 극복하고 있었다.

 

현실이란 그넷줄이나 위로 튀어 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곳까지 밖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123p-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163p-

 

갑작스러운 경찰(현실)의 방문 덕분에 완전히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나’는 조심스럽게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곳에서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을 겪는다. 이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서 ‘나’는 극단적인 위기에 봉착한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잘 짜인 플롯 구성과 두 가지의 결말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마법사가 건네준 머랭 쿠키를 사용한 Y의 결말과 타의에 의해 저절로 현실이 흘러가는 N의 결말이 그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N의 결말이 저자가 유도하는 진정한 결말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왜냐하면, Y의 결말에서는 일단 근본적인 해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성욕은 해결하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원인이 홀로 남겨진 ‘나’에게 있다는 오해가 반복된다. 결국 ‘나’는 과거와 같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소녀가 흔드는 손을 보며 기시감만 느낀다.

 

그와 대조적으로, N의 결말은 ‘나’의 모든 경험이 보존된다. 현실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으나, 긴 시간이 그것을 이겨내고 있음을 말더듬 현상의 극복으로 보여준다. ‘나’는 어느새 바른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달콤한 카스텔라의 맛과 위저드 베이커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는 채로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그때부터 이유를 만들어간다고 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들의 흩어짐이 대원리 또는 숙명을 이뤄. 이건 그의 생각이야 너는 나름대로 네 사정에 맞게 생각해. -107p-

 

약간은 <파우스트> 적인 느낌이 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모든 소망을 이루어주는 마법사가 왠지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그 규칙이 적용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인터넷에서 마법의 빵을 주문함으로써 메피스토와 계약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이곳을 성장하는 밑거름으로 삼는 ‘나’의 존재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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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가의 테스 대교북스캔 클래식 16
토마스 하디 지음, 김명신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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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하고 아름다운 테스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하다. 소설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잊혀진 오랜 가문의 후손이라는 지위가 부여하는 쓸모없는 자존심과 그 자존심에 걸맞지 않은 가난함이었다.

 

전혀 손 쓸 수도 없는 뿌리 박혀있는 지역사회의 인습들도 문제를 야기했다. 어린 나이의 테스는 처녀성과 원치 않았던 아이를 잃고,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들 탓에 고향에 더는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그녀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가 아닌 그녀 자신에게만 하나의 존재이며, 경험, 정열 감각들로 이루어진 구조물이었다. 그녀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그녀는 그저 잠시 생각나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가 비참해하는 것은 대부분 그녀의 인습적인 생각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 본질적인 감각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141p-

 

사람은 지혜로워질수록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더 잘 인식하게 된다. 평범한 자는 사람들 사이의 아무런 차이도 찾아내지 못한다. -181p-

 

테스가 겪은 고통에서 토머스 하디의 문장들은 테스가 경험을 쌓고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성숙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가장 우선시 된다는 견해를 드러낸다. 그것은 토머스 하디의 견해였고, 에인절 클레어의 견해였다.

 

그녀의 영리한 아름다움은 에인절 클레어에 의해 꽃을 피우나 싶었는데, 그의 내면에 남아 있던 보수적인 벽에 막혀 안타깝게도 시들어버린다. 종교적으로 가장 진보한 인간이었던 에인절 클레어의 능력으로도 테스의 지난 과거를 덮어주지 못하는 종교의 경직성은 또 하나의 문제가 되어 그녀의 인생을 황량한 무밭으로 인도한다. 에인절에게는 브라질로 가라고 명한다.

 

구성적인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신혼 첫날밤. 두 사람의 고백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는 사실이었다. 회복의 기미를 보이던 상처들이 그 사건 이후로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다. 그녀의 곁에 이즈와 메리언이란 친구가 없었다면 테스의 이야기는 예고 없이 마감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내적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토머스 하디는 테스의 삶을 <전태일 평전>에서 서술되는 방직공장의 소녀들이 상상이 되게끔 그리고 있었다. 공장의 소녀들처럼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오랜 기다림, 노동의 고단함, 껄끄러운 인간관계의 고통뿐이었다. 그리고 알렉 더버빌이 야기하는 모든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토머스 하디는 한 어린 여자의 삶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그리면서도 비윤리적인 범죄를 저지른 알렉 더버빌에게는 참회한 삶을 허락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토머스 하디는 테스와 만나는 동시에 알렉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한다.

 

테스가 처한 모든 상황을 알고 나서도 알렉은 그녀를 다시 품을 생각을 한다. 그녀 앞에서 에인절의 철학이 되려 그녀를 탐할 이유가 되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테스의 마음속에는 과거처럼 증오라는 감정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잃은 테스의 가족들은 마을에서 쫓겨난다. 알렉은 그녀에게 또다시 돈의 유혹을 건네고 테스는 그 유혹에 영혼까지 함께 굴복한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에인절의 귀환이 약속되어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녀는 남겨진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희생한다.

 

브라질에서의 고생과 경험들로 뒤늦게 테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에인절이 서둘러 영국으로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에인절과 마주친 테스의 심장은 다시 두근두근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을 살해한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병아리의 모습처럼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토머스 하디는 이미 늦었다고 말한다. 테스를 기다리는 것은 살인죄의 판결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사회는 테스에게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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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이해 - 문학예술총서
E.M.포스터 / 문예출판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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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소설가가 원형의 도서실에 앉아 함께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시간이 인간에게 품고 있는 원한을 피할 수 있다. -17p-

 

E. M. 포스터의 <소설의 이해>에서는 연대기 순으로 소설을 분류할 것이 아니라, 소설이 담고자 하는 주제들을 통해 분류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인간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시간이라는 요소를 잘라버리고도, 인간을 표현하는 소설가들을 같은 공간에 모아놓아도 분류가 가능하다는 말은 역사 속에서 인간이 고뇌했던 의식에 큰 변화가 없음을 단정짓는다. 이것이 그의 서론이었다.

 

만일 인간성이 변한다면 그 변화는 각 개인이 새로운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내다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이것을 해보려고 한다. 모든 기구와 기득권이 이러한 연구에 반대한다. 아무 이득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금지가 약화될 때만이 이것은 진전할 수 있다. -187p-

 

하지만 기득권의 외적금지가 약화될 수만 있다면 인간성의 변화는 다양한 각도로 인간을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질 것이고, 소설을 주제별로 분류해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단순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말에서 말한다.

 

그가 서론에서 인간 의식을 한정시켰던 이유는 저자의 판단으로는 짧은 역사로 인해 인간의 판단력이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서 였다. 하지만 역사가 이어지고 탐색의 방향이 늘어갈수록 그가 한정 지은 것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임을 예상하면서 인정한다. 이것이 그의 결말이었다.

 

이 책은 서론과 결말을 제외하면 2. 스토리, 3. 인물1, 4. 인물2, 5. 플롯, 6. 환상, 7. 예언, 8. 패턴과 리듬으로 이어진다. 먼저 읽었던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이 중 8. 패턴과 리듬. 즉, 서술 방법에 대한 문장의 중요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포스터의 <소설의 이해>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으로 공평하게 나열해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술방식은 각 단락의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말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예시를 제시하면서 진행되고 있는데, 강의를 책으로 다시 엮은 것이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예시들이 한 작품의 사항들을 빠르게 읊조리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언급된 소설의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지라 읊조리는 단어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했던 점들을 중점적으로 정리해보면서 하나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아 안도감을 느낀다. 아래에서 정리한 부분 중에 굵게 표시된 부분을 모아 정리한 것이 아마도 그 실마리가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호기심을, 인물은 인정과 가치 의식을, 플롯은 지력과 기억력을 각각 요구한다. 환상은 우리가 부가물을 지급하도록 요구한다. 소설의 예언적 형상은 겸허와 유머 감각의 유보를 요구한다.  패턴은 우리의 미각에 호소하고 우리가 책을 전체로 보게 만든다.

 

이야기는 문학적 조직 중에 가장 저급하고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라고 하는 아주 복잡한 조직에 공통적인 최고의 요소이기도 하다. -32p-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볼 때, 그것이 평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는 몇 개의 산봉우리로 싸여 있고, 미래를 내다볼 때 그것은 종종 벽처럼 보이기도 하고, 구름처럼 보이기도 하고, 태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연대표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33p-

 

소설가는 다른 예술가 동지들과는 달라서 자기 자신을 대충 묘사하는 수많은 단어를 만들어 여기에 이름과 성을 붙이고, 그럴 듯한 몸짓을 시키고, 인용 부호를 사용하여 말을 시키고, 전후가 맞는 행동을 하게 한다. 이 단어들이 작중 인물이다. -50p-

 

소설이란 증거에 X를 더하거나 X를 빼낸 것에 근거를 둔다. 이 미지의 양은 소설가의 기질이다. -51p-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완전한 통찰도 없고 완전한 고백도 없다. 우리는 외적인 징표로 서로를 대강 알고 있을 뿐이며, 친교를 갖기 위한 기초로서 이 징표는 충분하다. 그러나 소설가가 원하면, 독자는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외면적 생활뿐만 아니라 내면의 생활도 노출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53p-

 

독자를 놀라게 하지 못하면 그는 평면적인 인물이다. 믿지 못하게 하면 그는 입체적인 체하는 평면적 존재이다. 입체적 인물은 작품 속에 무궁한 인생을 갖고 있다. -87p-

 

플롯 역시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 관계를 강조하는 서술이다.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 이것은 이야기이다. “왕이 죽자 슬픔에 못 이겨 왕비도 죽었다.” 이것은 플롯이다. 시간의 연속은 보존되고 있지만 인과감이 거기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96p-

 

소설의 어떤 형상을 정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욕망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호기심을, 인물은 인정과 가치 의식을, 플롯은 지력과 기억력을 각각 요구한다. 환상은 우리가 부가물을 지급하도록 요구한다. 마치 박람회에 들어갈 때 입장료를 치렀는데도 특별한 여흥을 보기 위해 따로 6펜스를 치러야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독자들은 이 특별 여흥을 보기 위하여 박람회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기꺼이 돈을 치르지만, 어떤 독자들은 화를 내며 거절한다. 거절한다는 것은 환상을 싫어한다는 것이지 문학을 싫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119 ~ 120p-

 

소설의 예언적 형상은 두 가지 성질을 요구한다. 겸허와 유머 감각의 유보를 요구한다. 겸허란 내가 오직 제한된 감탄만을 보낼 수 있는 특질이다. 겸허가 도와주지 않으면 예언자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우스운 꼴만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웃음을 거두고 자세히 보면 대머리는 비평을 가할 가치가 없고 진정한 웃음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인식 할 수 있다. -139p-

 

가치 있는 것이란 인물과 사물의 색깔과 몸짓과 윤곽 등으로 소설가가 보통 갖고 있는 어투들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그것들이 독특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159p-

 

스토리는 우리의 호기심에 호소하고, 플롯은 우리의 지력에 호소하지만, 패턴은 우리의 미각에 호소하고 우리가 책을 전체로 보게 만든다. -164p-

 

리듬이란 적당한 간격을 맞출 수 있을 때 그때그때의 충동에 의존하여 이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묘한 효과는 작중 인물을 해치지 않고도 이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형을 갖추는 수고를 덜어준다. -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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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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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우드의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요약해서 말하자면‘어떤 문장을 쓸 것인가에 관해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문장들에는 그 문장이 좋은 이유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떠나지 않고 바짝 붙어있다.

 

이 책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시의 방식을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이어진다. 수 많은 명문장들과 문장의 해석을 엿보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가령 쿳시가 말했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제짝 아닌 신발 두 개'와 관련한 예문처럼 말이다.

 

배가 난파되어 해변에 내던져진 로빈슨 크루소는 동료 선원들을 찾아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 뒤로 그들이나 그들의 흔적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모자 세 개, 챙 없는 모자 하나, 제짝 아닌 신발 두개 말고는’

 

‘제짝 아닌 신발 두 개’는 제짝이 아님으로 해서 신발이기를 멈추고, 거품 이는 바다가 익사하는 자들의 발에서 뜯어내 물가로 퉁겨올린 죽음의 증거가 되었다. 과장된 단어도 절망의 말도 없이, 모자와 챙 없는 모자와 신발들만 있을 뿐이다. -85p-

 

이 책에서는 E.M. 포스터의 고전인 <소설의 이해>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해석과 그 이유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포스터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시점과 인물에 대해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제임스 우드는 1인칭, 3인칭 시점의 불명확성을 제기한 후, 자유간접화법이 인물 내면의 심리를 드러냄과 동시에 서술자의 주관을 개입시켜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포스터의 평면적 입체적 분류에 따른 인물설정의 상·하위 개념 에 대하여 우드는 평면적 입체적이라는 언어 대신 투명함의 차이로 분류한 후, 인물의 분석에 따라서 성패가 갈린다고 주장한다.

 

소설이 실패하는 것은 작중인물이 충분히 생생하거나 깊지 않을 때가 아니라, 문제의 소설이 자신의 관습에 어떻게 적응할지 독자에게 가르치는 데 실패했을 때, 작중인물들과 실재성의 수준에 대한 독자의 구체적 허기를 다루는 데 실패했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분석의 섬세함이다. -130p-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소설의 구동력은 1.서술하기, 2.플로베르와 현대적 서사, 3.플로베르와 플라뇌르의 부상, 4.세부사항, 5.작중인물, 6.의식과 간략한 역사, 7.공감과 복잡성, 8.언어, 9.대화, 10.진실, 관습, 리얼리즘이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었고, 이 순서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수상록의 형태처럼 이어지는 그의 이론들 속에서 찾아낸 여러 문장들을 아래에 나열해본다. 이 문장들을 뒷받침하는 책 속의 많은 예들은 직접 읽어보면서 음미해보길 바란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서 리뷰를 검색했을 때, 많은 글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혼자 읽고 나름의 결과를 도출해본다.

 

소설가는 적어도 세 가지 언어로 작업한다. 작가 자신의 언어, 문체, 인식의 도구. 그리고 작중 인물의 것으로 설정된 언어, 문체, 인식의 도구. 끝으로 세상의 언어(일상적 발화, 신문, 사무실, 광고, 블로그와 문자 메시지 등의 언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 -46p-

 

리얼리스트는 많은 양을 기록하기를, 파리에 대해 발자크식 작업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스타일리스트는 발자크식의 뒤범벅과 활기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이 뒤엉긴 세부사항을 길들여 흠잡을 데 없는 문장들과 이미지들로 바꾸고 싶어 한다. -64p-

 

예술적 인위성의 본질은 세부사항의 선별에 있다. 우리 기억이 선별작업을 해주지만 문학적 서술의 선별방식과는 그리 비슷하지 않다. 우리의 기억은 심미적 재능이 없다. -70p-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76p-

 

새로움이 소설의 유일한 가치이고, 호기심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읽게 하는 유일한 공기이기에, 작가들은 부득이 서스펜스를 사용하게 된다. -157p-

 

화가이건 시인이건 소설가이건 간에 예술가로부터 우리가 입은 가장 큰 혜택은 우리의 공감을 확장하게 된 것이다. 예술은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경험을 확대하고 같은 인간들과의 접촉을 개인적 운명의 테두리너머로 확장하는 방법이다. -176p-

 

환원 불가능하며 남아도는 것, 무용도성의 여백, 쉽게 재생산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체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작가 또는 비평가, 독자의 책무다. -236p-

 

예술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늘 지어낸 것이자 모방이다. 그러나 예술은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244p-

 

소설의 성공을 판단하는 데는 ‘삶’을 환기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패턴이나 언어와 같은 좀 더 형식적인 속성으로써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능력도 기준이 된다. -245p-

 

진정한 작가, 곧 삶을 자유롭게 섬기는 자는 삶이 마치 소설이 지금껏 포착해낸 그 어떤 것으로도 포괄되지 않는 범주인 것처럼, 마치 삶 그 자체가 항상 관습적인 것으로 화하기 직전의 순간에 있는 것처럼 항상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다. -251p-

 

제임스 우드가 말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나름대로 상상해본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 삶의 주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작가는 여러 인물들을 나열하여 그 등장인물들의 속으로 들어가 인물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부사항들을 엄격히 선별하여 서술하고,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하여 등장인물이 되어 마치 작가가 숨어있는 듯이 말해야 한다.

 

그 말함의 모든 것에 있어서 언어의 운율 또한 최대한 부드러워야 하고, 어떤 것을 묘사함에 있어서 새로움이 깃들어 있어야 하며, 그것보다 더 훌륭한 표현이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서술들 전부가 작가와 인물과 독자 모두에 걸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소설가는 참으로 어려운 직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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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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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공감의 문학이었다. 가장 소중한 울타리의 모든 것이 제거된 삶. 타의에 의해 자유를 잃어버린 삶이 인간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시련 속에서 덕혜옹주가 오래된 소나무의 뿌리를 보며 결심하고,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 보기 위해 써내려갔던 順命이라는 글자가 얼마나 무의미하게 다가오던지……. 소설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옛날. 지구 저쪽 먼 곳에서 살았던 누군가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국가와 민족과 종교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 한민족이 살던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는 국가와 언어를 잃어버린 채, 이웃나라의 식민지로서 지배당하는 삶을 강요받고 있었다.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는 조선의 황족에서 대마도 백작의 아내가 되어버린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실제의 나날들을 128*188mm의 종이 위의 제약을 초월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덕혜옹주>속 그녀의 인생의 대부분은 밝은 물감 대신 뿌리를 잃어버림에서 찾아오는 상실감의 물감과 낯선 것을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질감의 물감이 대신 칠해져 있었다.

 

덕혜옹주의 딸 정혜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반쪽을 이룬 조선이라는 정체성을 거부하려하는 그녀의 이유에 대해 공감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본 사회의 노골적인 차별들에서 분노와 함께 안타까운 슬픔을 느꼈다. 따라서 나는 정혜의 모습에서 재일교포들의 모습이 연상되었고, 그들이 그 당시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한편, 일본인이었지만 그 역시 강압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던 대마도의 백작 소 다케유키의 모습에서는 의외성을 발견했다. 일본인이라고 그 지위를 강제로 누리려 하지 않고, 마음으로 덕혜를 아껴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 대한 댓가는 불안한 반쪽의 삶에 따라 같이 불안해져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량함으로 주어졌다.

 

책 속에는 실존인물인 덕혜옹주의 가족들과 더불어 실존인물이지만 가상의 삶을 부여받은 구국청년단의 박무영인 동시에 김장한의 삶. 일본 지배 하의 조선인들의 다양한 방향을 축소시켜 드러낸 인물들인 갑수와 기수 형제의 삶. 그리고 허복순의 삶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낯선 일본 땅의 시간들 속에서 그들은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소중한 것을 훔치거나 되찾기 위해서 삶을 바쳤던 조선인들의 모습.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서러운 생을 살았지만 이처럼 서러운 적은 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외로울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여인이 이토록 서러울 수 있을까. 내 곁에는 바람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337p-

 

덕혜옹주가 피를 토하는 듯 슬프게 내뱉는 독백이.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들려와.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나를 정의해주는 곁에 있는 소중한 모든 것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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