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공감의 문학이었다. 가장 소중한 울타리의 모든 것이 제거된 삶. 타의에 의해 자유를 잃어버린 삶이 인간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시련 속에서 덕혜옹주가 오래된 소나무의 뿌리를 보며 결심하고,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 보기 위해 써내려갔던 順命이라는 글자가 얼마나 무의미하게 다가오던지……. 소설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옛날. 지구 저쪽 먼 곳에서 살았던 누군가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국가와 민족과 종교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 한민족이 살던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는 국가와 언어를 잃어버린 채, 이웃나라의 식민지로서 지배당하는 삶을 강요받고 있었다.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는 조선의 황족에서 대마도 백작의 아내가 되어버린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실제의 나날들을 128*188mm의 종이 위의 제약을 초월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덕혜옹주>속 그녀의 인생의 대부분은 밝은 물감 대신 뿌리를 잃어버림에서 찾아오는 상실감의 물감과 낯선 것을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질감의 물감이 대신 칠해져 있었다.

 

덕혜옹주의 딸 정혜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반쪽을 이룬 조선이라는 정체성을 거부하려하는 그녀의 이유에 대해 공감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본 사회의 노골적인 차별들에서 분노와 함께 안타까운 슬픔을 느꼈다. 따라서 나는 정혜의 모습에서 재일교포들의 모습이 연상되었고, 그들이 그 당시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한편, 일본인이었지만 그 역시 강압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던 대마도의 백작 소 다케유키의 모습에서는 의외성을 발견했다. 일본인이라고 그 지위를 강제로 누리려 하지 않고, 마음으로 덕혜를 아껴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 대한 댓가는 불안한 반쪽의 삶에 따라 같이 불안해져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량함으로 주어졌다.

 

책 속에는 실존인물인 덕혜옹주의 가족들과 더불어 실존인물이지만 가상의 삶을 부여받은 구국청년단의 박무영인 동시에 김장한의 삶. 일본 지배 하의 조선인들의 다양한 방향을 축소시켜 드러낸 인물들인 갑수와 기수 형제의 삶. 그리고 허복순의 삶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낯선 일본 땅의 시간들 속에서 그들은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소중한 것을 훔치거나 되찾기 위해서 삶을 바쳤던 조선인들의 모습.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서러운 생을 살았지만 이처럼 서러운 적은 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외로울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여인이 이토록 서러울 수 있을까. 내 곁에는 바람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337p-

 

덕혜옹주가 피를 토하는 듯 슬프게 내뱉는 독백이.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들려와.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나를 정의해주는 곁에 있는 소중한 모든 것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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