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 61-1
크누트 함순 지음, 김남석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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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굶주림의 예술, 혹은 결핍, 필연, 욕망의 예술인 것이다. 이 예술 속에서 확실함은 의심스러움으로 바뀌고 형태는 과정에 의해 밀려난다. 이제 임의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만큼 어떤 명료성을 획득하려는 의무는 더 강해진다. 그것은 이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출발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질문을 직접 살아 본 사람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 중에서.>


굶주림의 예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크누트 함순을 두고,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여자들>에서 치나스키는 “크누트 함순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였다” 고 말했다. 치나스키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던 어떤 여인의 마음을 함순 덕분에 아주 쉽게 사로잡을 수 있었다.


또한, 너무나 잘 싸웠던

원로들을 기억하라 :

헤밍웨이, 셀린느, 도스토옙스키, 함순.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중에서.>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을 <여자들>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읽게 된 동기는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위대한 작가로 생각하고 있는 작품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참고로 함순은 부코스키의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시에서 언급한 4명의 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부코스키의 소설은 함순의 <굶주림>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점이 같았고, 세상에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남자의 고독함을 다루는 이야기이며, 어떤 경로를 거치든 간에 결국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다. 게다가 주인공의 외곬수적인 성격 역시 매우 닮아있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작 속에 떠도는 욕정, 침침한 가스등 불빛, 심지어 잠잠히 부풀어 있는 밤의 분위기, 이러한 모든 것이 일시에 나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밤의 공기는 속삭이는 말소리, 포옹, 떨리면서 하는 고백 소리, 끝을 맺지 못하는 말소리, 가냘픈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130p-


하지만, 차이점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부코스키의 작품 속의 문체나 사건의 서사에 함순의 작품보다 날림이 많다. 이 날림은 문장에 가독성과 해학성을 부여한다. 날림은 치나스키와 <굶주림>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도 다름을 알려준다. 쉽게 말해서, 치나스키는 술, 여자, 도박을 얻을 수 있으면 행복할 따름이고, 굶주리는 이는 굶주림을 해결할 음식과 글을 쓸 공간만 마련되면 행복했다.


<굶주림>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철저히 가려진다. 이는 주인공의 자의식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되었건 간에 4부로 구성된 함순의 <굶주림>에서 주인공에게 닥쳐오는 생존의 과제를 위해서 수반하는 필연적인 굶주림의 시련을 보여주는 방식은 각 부마다 동일한 과정을 거치고 위기를 넘기면서 시련이 봉합된다.


<굶주림>에서의 동일한 과정이란 이런 식이다. 먼저, 어느새 돈이 다 떨어진 주인공은 배가 고파진다. 배고픔의 심화과정이 자신의 내적 대화로서 이루어지고, 자기 자신의 물음에서 끊임없는 사유가 이어진다. 배고픔의 강도가 점차 세지면서 소설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전달하는 클라이막스(그중에서 3부의 시련. 정육점에서 뼈다귀를 얻어다가 뼈다귀에 붙은 살점을 뜯고, 토하고, 뜯고, 토하는 과정은 이 소설의 백미였다.)로 치닫는다.


아무런 맛도 없었다. 뼈다귀에서는 썩은 피의 숨이 막힐 듯한 냄새가 나서 곧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또 뜯어먹어 보았다. 게우지만 않으면 무슨 효험이 있겠지. 일단은 배를 달래두는 것이 문제였다. 또 다시 게우고 말았다. 나는 화가 나서, 사납게 고기를 물어뜯어서 억지로 삼켜버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주먹을 쥐었다. 한 수 없는 심정에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 되어, 무엇에 혼을 빼앗긴 사람같이 뼈다귀를 물어뜯었다. 나는 뼈다귀가 눈물에 젖어 더러워질 만큼 울고는 토하다가 저주하다가는 다시 뜯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울었으니 또 게우고 말았다. 나는 큰 소리로 세상의 모든 권위를 저주했다. -166p-


각 부에 할당된 클라이막스 과정의 주인공의 내적 고뇌는 이 소설에서 가장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그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신문사에 기고할 작품을 써내려가지만, 노력의 대가는 온전히 보답 받지 못한다. 그는 행운의 경로를 통해 삶을 연장할 돈을 얻지만, 한계를 인정하고, 일탈을 끝으로 그곳의 생활을 정리한다.


가난한 인텔리는 돈 많은 인텔리보다도 훨씬 더 세밀한 관찰자란 말이지요. 가난한 사람은 한 발 한발 떼는데도 주위를 살피고, 남들이 하는 말에 회의를 품고 들거든요. 한 발 한 발이 나의 머리와 마음속의 문제와 과제를 준단 말이오. 그는 귀가 밝고 감각이 예민하고, 경험이 풍부한 인간이고 그의 영혼은 낙인이 찍여 있지요. -186p-


<대지의 축복>이라는 작품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한 작가임에도 함순의 작품의 한글번역본이 <굶주림>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노년시절에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손을 잡고, 고국 노르웨이에게 도이칠란드와 함께 하기를 독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해설에서 전해주는 함순의 문학사적인 위치를 고려했을 때, 그의 <대지의 축복>을 접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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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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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찰스 부코스키의 <팩토텀>과 <여자들>을 모두 읽어 본 사람으로서, 장편 데뷔작 <우체국>이 가지고 있는 힘이 나머지 두 소설보다 훨씬 더 크다고 감히 말해본다. 부코스키의 <우체국>의 파급력을 구체화하고 싶어 내가 읽었던 여러 책을 하나 둘 떠올리다가 “이거다!”라고 손뼉을 쳤던 책은 아서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나이가 든 한 세일즈맨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회사로부터 버려지게 되면서 느꼈을 부조리와 <우체국>에서 체득하면서 치나스키가 느꼈을 부조리는 기업과 사회에 대한 경고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들 모두 한 번 정도는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G.G는 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54p-


단순하게 말해서 이 소설은 <우체국>(미국의 우체국은 오래전부터 민영화되었다고 한다.)의 테일러주의(시간 관리와 노동 효율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를 기준으로 60센티미터 서류함을 어떤 변수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23분 안에 마쳐야 한다는 주의. 물론, 물량이 적어서 8분 안에 끝마쳤다면 나머지 15분 동안 쉴 수는 없다.)


그리고 포드주의(일관된 반복 작업으로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작업방식)라는 잣대를 가지고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작업장에 박아두고 비정규직, 초과근무 등의 착취로 이윤을 추구하는 1960년대 미국 민간기업의 환경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책이다.


우리가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꽂는 편지 한 통, - 일 초가, 일 분이, 한 시간이, 하루가, 일주일이 - 근무 시간을 초과해서 꽂는 편지 한 통이 러시아 놈들을 무찌를 수 있어요! -95p-


집중! 409조의 임시 직원들에게 알립니다. 예정되어 있던 나흘 휴가는 취소되었습니다. 그 나흘 동안 일정에 따라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99p-


우체국 업무는 하룻밤 열두 시간 근무에다가, 현장 주임을 더하고, 우편 사무원들을 더하고, 살덩이들 틈에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를 더하고도, 거기에 <비영리>식당에서 만든 쉰 음식까지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도시 주요부 구역의 암기 업무까지 더해졌다. -127p-


그런데 이 소설이 그의 다른 책들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기존에 <팩토텀>과 <여자들>에서 봐왔던 ‘술·여자·도박’ 이 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던 ‘망나니’ 헨리 치나스키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참을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묵묵히 부조리와 싸워나가면서 주어진 일을 하기 때문이다.


거칠 것이 없던 청년시절의 <팩토텀>의 치나스키보다 좀 더 인생을 더 겪은 <우체국>의 치나스키는 어쨌든 간에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의 삶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소모당하는 있는 그의 영혼으로부터 여전히 쏟아지는 거친 입담과 충동적인 행동. 하지만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그 언행에 숨어있던 치나스키의 따스한 인간애를 <우체국>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었다.


우체국에서 보낸 3년간의 비정규직 집배원 생활과 12년간의 우체국 직원의 생활. 도합 15년의 근로기간을 견뎌낸 치나스키에 경의를 표한다. 이제야 나는 <여자들>에서의 광기 어린 성생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것은 오랜 세월의 착취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들>에서의 치나스키의 행위들은 사회에 켜진 적색 신호등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있는 고발의 연장이다.


저기서 철썩이며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 좀 봐. 그 밑에는 물고기들, 불쌍한 물고기들이 서로 싸우고 잡아먹지. 우리는 그 물고기들과 같아. 단지 뭍에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발을 잘못 디디면 끝장이야. 챔피언이 되는 게 좋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아 두는 게 좋다고. -176p-


깊은 바다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특수한 유형의 잠수병이었다. 나는 조이스가 길렀던 빌어먹을 잉꼬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새장 안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리자 날아올랐던 것이다. 마치 천국으로 쏘아 올린 총알처럼.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 -236p-


부코스키 3부작 읽는 순서 : 팩토텀, 우체국,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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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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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악당이란 말인가, 카시오에게 자기 이익과 직결되는 내 길을 권하는데? 이건 지옥의 신학이야! 악마들이 가장 검은 죄악을 부추길 땐 그들도 처음에는 지금 내가 하듯이 천국의 모습으로 유혹하는 법이야. -2막 3장. 350~355-


이야고 씨. 당신이 악당이 아니면 <오셀로>에서 대체 누가 악당이란 말입니까? 당신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처음부터 갑자기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 당신의 숨겨진 드라큘라보다도 뾰족한 뻐드렁니에 정말 놀랐습니다.


또한, 당신이 카시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마치 천사가 된 것 마냥 온화한 낯빛으로 방법을 조곤조곤 설명해주기 전에 이미 당신은 카시오를 미친개로 만들어놓고 일부러 시비를 걸어 사람을 물게 해놓고, 지금 와서 아주 큰 선심을 쓰는 척 고귀한 데스데모나에게 접근해서 사면을 요청하라는 당신의 뻔뻔스러움이 지옥의 신학이라고 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습니다. 지옥의 신학이라는게 나중에는 불쌍한 카시오를 죽이려고 들더군요.


이야고 씨. 당신은 마치 지금 <오셀로>라는 RPG 게임에 접속해서 게임 속 캐릭터를 이사람 저사람 쪼물딱거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그 미친 존재감 때문에 정작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우리의 주인공 무어인(人) 오셀로는 찬밥 신세가 되었지요. 그가 맡은 배역. 나이가 많은 흑인으로서 젊은 백인인 데스데모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어야 할 여러 감정을 표현해야 할 의욕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기쁨과 수천 아니 수만 킬로미터 아래의 낭떠러지에 있는 질투와 배신감의 고통에 대한 독자와의 상호적인 공감의 추구야말로 이 비극 속에서 그가 존재해야 할 가장 큰 이유인데, 잊을만하면 등장해서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과 질투심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못된 계략을 꾸미고 또 그게 자로 잰 것처럼 딱딱 들어맞는 바람에 오셀로의 역할이 추수가 끝난 논에 발가벗고 서 있는 허수아비 꼴이 되었다오.


오셀로 씨. 당신은 분명 처음에 <오셀로>의 세계 속의 모든 사람(데스데모나 가족들은 제외해야겠습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는 오셀로와 딸을 결혼시킬 바에 차라리 눈에 흙을 집어넣으셨죠.)에게 널리 신망을 받는 아주 멋진 분이셨잖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자신감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제가 혼자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당신은 아마도 젊고 아름다운 데스데모나가 대체 왜 늙어빠진 당신을 사랑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당신은 그녀에게 그녀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의 여러 경험을 전해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과 같은 고추 달린 남자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21세기에 흘러드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성은 존중할 수 있는 남성, 자신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남성을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충분히 용기를 가져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피부색과 나이 그딴게 뭐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후우……. 그런데 이 말을 전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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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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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그 책과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 책을 책장에서 뽑아와서 훑어보곤 하는데, 윤상욱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를 손에 들고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가 쓴 책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J.M.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와 히샴 마타르의 <남자들의 나라에서> 두 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단 한번이라도 주인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아프리카 땅에 살 뿐, 아랍과 유럽의 노예로서, 독재자들의 선전에 순종하고 명령에 봉사하는 신민으로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왔다. -381p-


그런데 찾아낸 두 권의 책은 저자가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으로서의 주인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 특히, 영미문학의 권위자인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J.M.쿳시의 책에서는 아프리카의 특성보다는 정치·철학·문화·인물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려는 엘리트 유럽 지식인의 지적유희(나쁜 의미라기보다는 쿳시에게서 순수 아프리카인의 시각을 엿볼 수 없다는 약간의 답답함)만 보였다.


또한 <남자들의 나라에서>는 분명히 아프리카 북쪽에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 정권에 몰래 대항하며 살아가는 가족사를 아프리카에 사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였음에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아랍인의 문화적 색채 때문에 이 책을 순수하게 아프리카인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껄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윤상욱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에서는 아프리카의 이슬람문화가 예전부터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쪽의 국가들에 분포하였으며, 이 지역은 로마의 침략에 따른 지배 이후부터 지속해서 유럽과 서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라고 설명한다.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지방에는 아프리카와 아랍의 혼혈인들이 주로 살고 있으며, 따라서 북부 아프리카는 흑인이라는 상징이 뜻하는 아프리카 주인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많은 흑인들이 유럽과 아랍의 노예로 착취당했던 슬픈 과거사와 함께 <역사적 배경을 따른 북부와 남부 아프리카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담겨있고, 저자는 이런 이유때문에 사하라 사막의 북쪽과 남쪽의 경계를 구분해서 보는 것이 옳다고 설명한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는 이외에도 <저개발에 의한 빈곤>, <지도자들의 부패와 독재>, <토착문화를 숭배하고 있는 아프리카 고유의 민족성>, <낙관론과 비관론이 공존하는 아프리카의 미래>라는 다양한 주제를 정해두고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많은 나라의 이야기를 포괄적인 주제 속에 묶어서 이어나가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논의들을 읽어나가면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현재 아프리카의 낙후한 원인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함의 저주를 명분으로 삼아 침략한 열강의 제국주의에 따른 인적자원의 착취가 문제인가?,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배가 끝난 후에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 나쁜 이웃들의 자원 착취가 문제인가?, 과거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진 씨족사회에서의 일당정치에 익숙해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않는 상황이 문제인가?, 다스림의 논리가 아닌 지배의 논리로 접근하려는 지도자의 부패가 문제인가?, 아프리카 속 다양한 민족의 분포와는 상관없이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반듯한 국경선으로 인한 중국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연속적인 내전에 따른 불안한 정치적 상황의 문제인가?, 국제사회의 과도한 원조로 인한 아프리카인들의 자립정신 부족이 문제인가?


아프리카를 오늘의 수렁으로 몰아간 이처럼 많은 문제들 가운데 저자는 착취의 문제보다는 여러 나라가 아프리카에 대하여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음에도 아프리카의 낙후된 환경의 문제를 여태까지 뿌리치지 못하는 부패한 관료들과 독재를 추구하는 지도자들과 나태한 민족성과 후진적 국민성이 더 큰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2000년 킷칭이라는 영국학자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더는 아프리카에 대한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연구를 그만두기도 하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에 서서히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훌륭한 지도자들이 국민의 공정한 투표 덕분에 서서히 선거에서 승리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뉴스를 통해 전해질 민주정치를 추구하는 지도자들의 승전보에 앞으로 더 주목하게 될 것 같다.


또한, 풍부한 지하자원과 광활한 영토를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낙관론이 다시금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 책을 보면서 나쁜 이웃과 좋은 이웃의 두 얼굴을 가진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 중국은 그들의 의도대로 아프리카 대륙과 함께 공생의 길을 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시공사 인문 서평단을 통해 읽고 주관적인 견해로서 써내려 간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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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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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하고 있는 책인데, 이번에 읽게 된 민음사 이항재 번역의 <첫사랑>에는 첫사랑 외에도 다른 두 작품(귀족의 보금자리 , 무무)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세 작품을 놓고 봤을 때, 전부 ‘사랑’이라는 주제를 함축(정확히 말하자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세 작품의 간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작품이 끝나고 다음 작품이 시작함에 따라 수반하는 이질감은 거의 없다.


<첫사랑> (pervaya lyubor)


그녀를 알기 이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에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 살아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26p-


나는 ‘줄리어스 시저는 군인으로서 용맹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을 계속해서 열 번을 읽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내던지고 말았다. -33p-


바람 부는 맑게 갠 날의 구름처럼 온갖 감정이 가볍고 재빠르게 그녀의 눈과 입술을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52p-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그녀의 것이 되어버렸다. -103p-


그녀 앞에 서면 나는 뜨거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불태우며 녹여버리는 그 불이 도대체 어떤 불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나로서는 불타며 녹아버리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104p-


회상으로부터 시작하는 <첫사랑>의 감정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선명하면서도 강렬하다. 그런데 남자를 다루는 재주가 주왕의 애첩 달기처럼 능수능란한 지나이다가 <첫사랑>의 감격에 미칠듯한 문장을 내뱉고 있는 어린 블라지미르를 시동(侍童)으로 삼는 장난같으면서도 모순적인 쓰라림은 블라지미르의 속내가 미친 문장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욱 쓰라리다.


<첫사랑>이 단순한 결말의 이야기였다면 아마도 그의 고백이 의미 없는 단어들의 나열로서 금세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이다를 향한 그의 전투력을 <오셀로>의 이야고에서 조그만 학생으로 떨어뜨린 사건과 그 사건이 일으키는 뇌우가 쏟아지는 것 같은 충격파는 과거의 고백을 위한 준비기간에 이주일의 시간이 필요했음이 충분해 보였다.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돌아가셨는지 잘 모르겠다.


<귀족의 보금자리> (Home of the Gentry)


러시아의 어느 귀족가문의 가정사를 서술하는 동시에 주인공 라브레츠키와 리자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귀족의 보금자리>를 읽으면서 리자의 성장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과정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좁은 문>과의 공통점이 기독교적인 가정교육 때문에 빚어진 자아의 상실이랄까. ‘주위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때문에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인격을 가지게 된 리자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도원으로 도피하는 결말 또한 <좁은 문>과 같다.


라브레츠키의 어린 시절도 리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의 아버지가 루소의 <에밀>을 바탕으로 구성한 스파르타식 학습 덕분에 전수하려고 했던 서구사회의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현상 위주의 수박 겉핥기 교육방식 때문에 여자를 보는 판단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외모가 아름다운 바르바라 파블로브나에 첫눈에 반해 결혼하게 된다. 그녀가 상류사회를 지향하는 댄디족이라는 사실은 그의 삶이 고달프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의 가문 쪽에서는 라브레츠키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바르바라 파블로브나와의 결혼이 잘못임을 깨달은 라브레츠키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귀족들의 보금자리>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도덕적 모순(마리야, 판쉰)과 주인공이 대립하는 장면을 당사자들 간의 이데올로기를 함축하는 '볼테르주의자' , '자주성' , '보수주의자' , '위로부터의 개혁' 같은 단어들을 충분히 사용하여 인물 간의 직접적인 논쟁 형식의 대화내용을 담아 생생하게 전달한다.


솔직담백해지세요. 사랑 없이 자기를 맡기려고 하지 않는 당신 마음의 외침을 나약한 마음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당신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 사람에게 예속되려고 하는데 그런 무서운 책임을 져서는 안됩니다. 당신 마음에 복종해요. 오직 마음만이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겁니다. 경험, 이성, 이것들은 모두 보잘것없고 허무한 겁니다! 지상 최고의 유일한 행복을 자신에게서 빼앗지 말아요. -279p-


라브레츠키는 경험으로 얻은 성찰로서 잘못된 선택을 앞둔 리자를 구해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끝내 바르바라 파블로브나와의 결혼을 파기할 수 없게 되므로, 어릴 적부터 쌓인 배경지식의 제거라는 큰 장벽 때문에 그도 역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은 녹록치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필로그에서는 어린 친척들의 명랑한 모습이 그들에게 밝은 미래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무무> (Mumu)


세 작품 중에서 느낌상 가장 거리가 먼 작품을 고르라면 <무무>를 선택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무무>에 담긴 귀머거리 농노 게라심과 귀여운 강아지 무무의 이야기가 가장 독자의 가슴을 충분히 울릴만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배 위에서의 게라심과 무무가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장면과 터벅터벅 고향으로 내딛는 게라심의 힘없는 발걸음과 시골고향에서 익숙한 농사일과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게라심의 처연함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정의 일면이다.


귀머거리 노예와 강아지보다도 못한 여주인과 나머지 정상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무무>에서의 풍자적 내용전개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과 더불어 귀족사회에 대한 비판에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는데, <무무>의 작품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 <사냥꾼의 수기>와 더불어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의 농노 제도를 폐지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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