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보다
정수남 지음 / 새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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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집의 평론은 존재의 불안을 아버지의 부재와 연결짓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버지라는 거목이 사라졌기 때문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채. 자기 자신에게 닥쳐온 사건에 정면으로 마주하며 불안을 느낀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아닌 것 같다. 정수남 작가의 단편들에서 아버지의 부재가 선명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거꾸로 돌려 생각해봐도 그들이 겪는 불안은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엔 존재의 불안이라는 문제는 좀 더 근원적인 부분. 즉, 대가족에서 핵가족화하면서 일어나는 개인들의 원자화 때문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소설에서 잡고 있는 사회의 틀은 여전히 공동체 사회의 형태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마인드가 아니라 "니 누꼬?" 라는 마인드로 급속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불안이 시작된다는 생각이다. 

 

2. 단편 <야곱의 노래>는 탈북한 소시민인 강 노인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주인공이 느꼈던 아버지의 부재가 존재의 불안감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그리움을 강 노인과 함께 공유함으로써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우를 만들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교조주의적 관점. 단편 <연착>에서도 드러나는 그 관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강 노인을 아버지 같다고 느끼는 주인공. 주인공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인공을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아들 같다고 생각한 강 노인. 그러한 감정의 교류를 연결하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가 절반. 그리고 내면을 공유할 수 있는 자의 부재가 절반이 아닌가 싶었다.

 

3. 이러한 감정 공유의 부재는 중편 <회색과 쥐색>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했다. 마치 카프카의 <소송>의 요제프K의 사례처럼 어처구니없는 함정(?)에 빠져 뺑소니 누명을 쓴 주인공.(주인공의 내면 묘사를 통하여 이야기가 흘러가므로 이쪽에 가깝다.) 그러나 누구도 주인공의 편에서 주인공이 처한 위기를 같이 해결해 나가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의 부인은 "그러게 왜 저번에 블랙박스 설치하라 할 때 하지 않았느냐" 핀잔을 주고, 주인공의 친구들과 주변인들은 "그가 정말 뺑소니를 쳤을까?" 아니면 "피해자가 고의로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수작을 부라는 게 아닐까?"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그들은 멀찌감치 서서 구경꾼의 재미를 누리려고만 한다. 주인공이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의지해야 할 존재가 거짓말 탐지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비판의식을 상징화하여 드러낸다. 

 

4.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에게 느끼고 있었던 일말의 불안감을 둘만의 낚시 여행을 통해 떨쳐낸 단편. <길에서, 길을 보다>의 마무리는 흥미로웠다. 그들은 대화를 통하여 내면의 공유를 일궈낸다. 그리하여 특히. 할아버지 쪽에서 손자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아무렇게나 여자를 만나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손자의 행동에 진실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길에서, 길을 보다>의 묘사를 빌어 정리하자면. 아버지의 부재와 개인화된 원자가 존재의 불안을 안고 걷는 길은 명주실을 아무렇게나 길게 늘어뜨린 길이 될 것이요. 원자화된 개인의 내면을 서로 이해하여 함께 걷는 길은 명주실 같은 위태로운 길이 아니라 2차선으로 폭도 제법 넓었고,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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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코틀러의 굿워크 전략 - 세상과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함께 성장하라!
필립 코틀러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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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당히 낙관적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뜻하는 용어의 약자인 CSR를 표방하는 기업들의 자발적인 사회적 참여는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동시에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도 이바지하고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미국 기업들의 사례를 빌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다.

 

기업들의 사회적 활동을 통하여 각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착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 착한이라는 인상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범람하는 기업 이미지 광고보다도 훨씬 더 나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오래전부터 언급되었던 국내의 대표적인 모범사례로는 울산 지역에 터를 잡은 울산대공원을 들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문화행사가 열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항상 이벤트를 개최해서 많은 지역시민들이 모이는 곳이다. 아래의 글은 울산대공원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글이다.  


 

울산은 1960년 이후 국가 경제발전의 중추로서 급속한 성장을 하는 동안 '도시 환경의 질'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화학공업을 위주로 한 공업도시로서의 울산의 이미지는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공해도시' 그리고 '삶의 질이 열악한 도시'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정제 역할을 할 공원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986년부터 대공원 조성을 추진해 오던 울산광역시와 기업이윤의 지역사회 환원을 기획하던 SK주식회사가 1995년 상호 간 협의를 통해 울산대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울산광역시는 556억 원을 투자하여 울산광역시 남구 공업탑 로터리 주변 신정동과 옥동 일대 364만여㎡의 부지를 매입ㆍ제공하였고, SK주식회사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동안 총 1,020 억 원을 투자하여 울산대공원 시설을 조성한 후 이를 울산광역시에 무상 기부하였습니다.

 가까운 지역사회에 이러한 좋은 사례가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최근에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궁금하여 국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기업활동에 관련한 뉴스 기사를 찾아보았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에 비하여 나쁜 소식이 너무 충격이라 동영상 링크를 옮겨왔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535108

 

이 동영상을 재생한 후 1분 20초가 지난 시점에서 흘러나오는 "왜 해야 되죠?" 의 말투는 정말 그럴 필요가 없어서. 질문 자체가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반문하는 투였다. 이들 기업은 소비자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위한 CSR 활동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제품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이 알아서 몰려들기 때문이다.  

 

CSR 활동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기업들이 있는가 하면 CSR 활동을 추구하는 기업.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스타벅스의 공헌 사업의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보도하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스타벅스가 정작 회사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와 커피를 구매하는 소비자에게는 인색하다는 내용이었다. 

 

 

스타벅스 바리스타들의 시급은 2012년 기준 4,700원으로 최저시급 4,560원보다 단 140원 많은 수준이다. 대졸 매장직 초봉 역시 2,000만 원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스타벅스는 CSR 수행 과정에서 직원 내부에서 자발적 급여 공제 캠페인을 벌이고 자원봉사에 직원들을 동원하고 있다. 2012년 2/4분기 스타벅스 직원들의 자원봉사 활동시간은 총 7,710시간, 기부액은 2,000만 원을 상회한다. 

 

소비자들 역시 계속해서 오르는 커피 가격을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다. 올 5월 스타벅스코리아는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등 32종의 가격을 300원씩 인상했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에 드러난 스타벅스의 2011년 매출액은 2,981억, 영업이익은 224억이었다.

회사가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이 제도에 비용을 대는 사람들은 회사가 아니라 정작 노동자와 소비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표적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래로 정비된 모든 제도는 훌륭한 장점을 가진 제도들이었다. 역시나 CSR가 추구하는 가치에 내포된 의미도 마찬가지로 훌륭하고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 순수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인 것이다. 결론이 이렇게 나서 아쉽지만 <굿워크 전략>을 읽으면서 이러한 상황을 살펴볼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즐거운 독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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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칼 구스타프 융 지음, 김세영 옮김 / 부글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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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개인은 이미 물질화되었다. 과거 포드주의의 태동. 그리고 스펙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한국사회의 풍경으로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물질화 된 개인은 자신의 삶과 개성보다는 조직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만족시키려는 인재가 되고자 온 힘을 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을 여유롭게 살아가는 방식 가운데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통한다. 

 

그러한 방식은 바로 과학적 합리주의가 평균치로 설정해 둔 지점이다. 이 평균을 위하여 전 세계의 평균을 벗어난 존재들은 부족한 부분은 정밀하게 조직된 컴퓨터나 혹은 그리고 <토크쇼 안녕하세요>처럼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될 대중들의 투표에 의하여 메워진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평균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마냥 조작된다. 

 

2. 국가나 종교. 그리고 기업. 그리고 열거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조직은 모두 큰 덩어리들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익을 위하여 상부상조하는 조직들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책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조직을 부정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아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칼 구스타프 융이 우려하는 바는 개인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오로지 조직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한정되어지는 것이고, 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도덕적 오류에 대처(혹은 인지 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 격하되는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와 같은 존재의 격하는 조직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형성되는 원인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3.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내세우는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모든 것의 기초가되는 개인이 스스로 발전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직이 그들에게 부여하려는 족쇄를 벗겨내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최소한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서 스스로 선이 되려하지 말고, 선이라고 생각하지도 말 것이다. 니체의 사상처럼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선과 악을 모두 불러내어 한 판 진하게 갖고 놀아보기를 권한다. 그러한 놀이를 통하여 개인은 이 세계에 대한 '자기지식'을 획득한다. 

 

그러한 선과 악의 놀이의 종착지. 세상의 어떤 무엇과 같지도 않고 유사하지도 않은 '자기지식'. 칼 구스타프 융이 추구하는 개인의 이상향은 자유주의로 향한다. 개인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마치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토해냈던 그러한 자유처럼 말이다. 

 

4. 이 책에서 대중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대중은 무식하며 무법적이거나 문화, 지성, 합리성이 결여된 상태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1인 1표제가 행하여지는 대중사회이다. 모순점은 있지만 그것을 부정할 순 없다.

 

대중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전설이다>의 최후의 인간에까지 의식이 확장되었다. 이 책(칼 융의 책)의 개념에 따르면 <나는 전설이다>주인공이자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던 소외된 개인이다. 그리고 좀비는 조직의 이념에 충실히 학습된 개인. 즉, 쉽게 말해서 대중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한 개인이 타의적으로 대중화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의 내면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이유는 홀로 남은 고고한 개인이 대중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을 처음부터 좀비로 봤다는 점이다. 고고한 개인 자신이 유일한 선이고 유일한 정의로 봤다는 점이다.

 

나는 선이고, 당신은 악이다. 나는 인간이고, 당신들은 좀비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좀비를 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만약, 최후의 인간이 니체의 선과 악의 치고 받는 놀이를 접했다면 좀비는 좀비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 또한 고고한 인간으로 형상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중적이거나 말거나. 아마도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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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다
최성배 지음 / 새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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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정크>나 <체인지킹의 후예>외 작년과 올해 읽었던 대부분의 한국 소설이 청춘의 소설이라면. 최성배의 <내가 너다>는 중년의 소설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미롭게 다가온 소설이다. 곧 다가올 중년으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참. 중년의 소설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읽다 보니 중년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맨 첫 장면의 문장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기에 시작 부분의 얼마쯤을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내가 너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자 통제해야 할 대상인 담벼락같이 높은 현실을 재발견한다. 이것은 <삶으로부터의 혁명>에서 소개된 그 현실과 동일한 종류의 그것이다. <내가 너다>의 두 주인공. 무명의 화가인 (노)현식과 파계승 (백)용범은 <삶으로부터의 혁명>의 언어를 빌려 와서 이야기하자면, 매몰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삶의 반대편에 있는 현실. 그것은 내가 주체(삶)가 아니라 타자(현실)가 된 일상을 말한다. 청춘소설 <정크>나 <체인지킹의 후예>에서는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주체가 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 낸 <내가 너다>에서는 소설 전체를 통해 더욱 거대한 현실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방법은 물론 현실에 매몰된 두 주인공의 내면 속의 과거와 현재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서술된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문장력에 비하여 그의 문장이 그리는 한 폭의 풍경화에는 어둠이 감돌았다. 그곳에는 열정의 색깔 대신 순응의 색깔이 덧칠되어있었다. 역동적이지 않았다. 현실이 팍팍하면 그 어떤 이상의 푯대마저 세울 수가 없다. 이상이란 사막의 신기루처럼 환상이니까. 라며 절망한다.

 

죽음보다는 절망의 고통이 덜하므로 현실(예술계의 잘못된 관행을 묵인하고 작업의 대가로 받는 작은 돈)과 타협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현식. 그리고 승려의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그를 유혹하는 욕망(계속해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여성. 그리고 돈)과 타협하여 하루를 살아가는 용범의 삶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어쨌든 마지막에 가서 <내가 너다>는 뿌린 대로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용범은 뿌린 대로 거두었다. 용범을 떠나 보내면서 홀로 남은 현식과 우리들은 어떻게 뿌릴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해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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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이면
박충훈 지음 / 새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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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사회의 거울이다.

 

박충훈 소설집 <거울의 이면>에서 거울이 상징하는 바는 사회 집단의 기초를 이루는 가정과 국민(작가의 말에서는 백성)이었다. 가정의 삶과 백성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나라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운명을 이겨내는 것은 본인의 자각과 각성이므로 그것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작가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어머니의 소> & <아버지의 소>

 

예로부터. 아니 지금도 농촌에서는 소가 가장 큰 재산이다. 소를 팔아 아들 장가보내고 딸 시집 보낸다는 우스갯소리가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다. 소고기 사묵겠지라는 유행어도 소고기가 비싸기 때문에 역설적이게 들리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 두 단편은 소와 구제역을 다룬 단편이다. 근래에 구제역 파동으로 많은 농가가 피해를 보았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들이다. 그리고 구제역 사건과 살처분에 직면한 두 가정의 상반된 대응방식을 통해 정에 약한 인간과 돈에 약한 인간을 동시에 보여준다. 

 

<아버지의 땅>

 

6.25 한국전쟁을 일컬어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 <아버지의 땅>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인민군 복장을 한 형과 국군 복장을 한 동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다룬다. 

 

예상과는 달리 인민 장교로 있던 형이 투항을 목적으로 남하했다가 동생을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고, 그렇게 한편이 되어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한 구덩이에서 서로 껴안은 채 같이 묻히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백석산에서 유해를 발견하게 되고, 여태껏 알 수 없었던 진실이 마침내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을 국가는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작가가 지니고 있는 국가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다. 

 

국가는 유공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은 그 반대라는 것을 말한다.  

 

<그네들의 거울> 

 

이 소설은 청소년의 일진 문화를 비판하는 단편이다. 미미클럽이라는 일진의 무리가 고유미라는 평범한 학생을 어떻게 물리적으로 타락시키는가를 그린다. 

 

이러한 소설.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루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은 작가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소설집 전체에 드러나는 남성적이며 선이 굵은 형태가 지워지지 않아 아주 거북했다. 몰입이 전혀 되지 않았다. 

 

미영이 거들었다 

"고유미, 그게 바로 자업자득이다. 우릴 원망 말거라. 경미야, 목이 마를 테니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줘라."  

 

미란이 유미를 지켜보다 다가서며 아주 엄숙하게 말한다.

"네가 두 친구에게 혹시라도 앙심을 먹을까봐 내 몸도 보여 준다. 이건 우리들의 경건한 의식이다. 잘 봐두어라."

 

여학생들이 주고받는 문장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할머니의 손자> & <영웅의 아들>

 

이 두 소설은 유전적 영향이라는 공통점에 입각한 작품이다. <할머니의 손자>는 유전의 영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얼굴이 굳어지는 영감의 모습을 봤을 때. 근친상간이라는 천인공노할 범죄가 대를 이어 이루어졌고, 손자가 저지른 그 행위를 통해서 비밀이 까발려지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영웅의 아들>은 탁란(뻐꾸기가 남의 새 둥지에 자기 새끼 알을 버리는). 그러니까 새가 탁란하는 것처럼 여자가 임신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몰래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하는 행동은 그 아비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더라. 그런 막장스러움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불굴의 혼>

 

이 작품은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시대에 살았던 소금 장수 김두원에 관한 일화를 소설화시킨 작품인데, 김두원이 일본제국에 대항한 것을 불굴의 혼이라고 칭송해야 할지. 아니면 졸부의 모습을 봤다고 생각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작품이다. 

 

1000말이 넘는 소금을 일본인 상인에게 사기를 당해서. 평생 동안 일본 제국에 보상을 요구했던 그의 행적을 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인으로부터 보상받아야 하는 것이 증명된 자가 조선 땅의 어느 누구보다 일본에 당당하게 대항할 수 있었고, 보상을 하는 일본을 아주 대놓고 욕했다는 사실이다.   

 

<겨레의 혼> 

 

임진왜란기에 나라를 구한 의병의 활약을 다룬 소설이다. 이 작품 또한 국가와 국가를 운영하는 벼슬아치보다 백성이 훨씬 더 훌륭하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그런 훌륭한 의미를 내포한 소설이지만 <겨레의 혼>은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미흡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70페이지 남짓한 공간에 의병의 행적을 다 쓰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쓰기는 했는데 그것이 소설이 아니라 그냥 역사적인 기록을 짧게 나열하는 데 그친 글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곽재우라던가. 김면이라던가. 곽준이라는 중심적인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어떠한 특징도 발견할 수 없다는 넌센스에 직면했다. 이게 다 분량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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