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1. 학교 폭력과 왕따. 이것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분명히 발생하고 있을. 며칠 전 뉴스에서 또다시 헤드라인으로 보도된 한국사회의 큰 문제다. 그와 동시에 창착자들은 이 문제를 비판함으로써 의식을 공유하거나 사회적 관심을 띄우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선함을 포장할 좋은 재료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들의 창작물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실적 서사를 이어가는 선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다.

 

학교 폭력과 왕따를 앞에 두고 그들은 1. 자신을 단련하여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직접 왕따 문제를 극복하거나. 2. 이미 가해자에게 희생된 경우에는 피해자 가족에 의한 사적 복수로 결말이 완성되거나. 3. 힘없는 피해자를 대신하여 직접 관련되지 않는 제삼자가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대신한다. 는 세 가지 시나리오 안에서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십자가>의 새로운 관점과 기존에 발표된 작품에 담긴 결말을 비교하여 생각하다 보니 학교 폭력과 왕따를 해결하는 열쇠를 쥔 사람은 국가나 법이나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는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만 문제를 전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74.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지. 당연히 굉장히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래도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다.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어느 쪽이야? 넌 나이프로 찔렸어? 아니면 십자가를 등에 졌어?

 

 

2. <십자가>는 달랐다. 당사자와 가족의 문제라는 관점을 벗어나서 같은 교실에서 생활했던 학생들에게도 그 책임을 묻는다. <십자가>는 방관자에게 십자가의 말을 등에 씌운다. 사건 이후 자신의 내면에 들러붙은 심리적인 죄책감을 솔직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왕따 문제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좁은 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방관자들에게 알린다. 

 

십자가를 짊어진 이는 후지슌의 유서에 이름이 적혀 있던 절친 사나다 유와 그의 짝사랑 나카가와 사유리였다. 유짱의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십자가>에서 유짱과 사유는 십자가의 말을 공유하며, 후지슌을 떠나보낸 가정의 절망과 고통을 두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죄책감을 느꼈었다. 왜 내 이름이 유서에 남아있었는지 영문도 모른채..

 

270. 인간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 절망할까? 아니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데,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때 절망할까?? 

 

3. 후지슌은 왜 그들의 이름을 유서에 남겼을까? 왜 절친이라고 부른 친구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고선 그렇게 떠나갔을까? 그가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후지슌은 스웨덴에 있는 거대한 십자가만이 자신의 영혼이 머물 곳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십자가>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왜 유짱은 나이가 들어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학교에 갈 때가 되었을 때쯤에서야 후지슌이 절망했던 그 감정에 대해서 온전히 깨닫게 되었을까? 도대체 왜? 왜? 왜?   

 

344. 슌스케가 죽고 나서... 자네는 어떻게 살았나? 슌스케를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등에 짊어지고, 어떻게 어른이 되었지? 예전에 주었던 슌스케와의 추억 노트처럼 자세히 써줄 수 있겠나? 

 

 

4.문장이 너무 딱딱하게 써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좀 더 부드럽게 풀어낼 수 있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본다. 왕따라는 무거운 주제를 마주하고 글을 풀어내려니 딱딱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데, <십자가>는 딱딱한 문장으로 이뤄진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아쉽다. 그 느낌을 간접적으로나마 살려주고 싶은데 나의 능력으로는 무리인 것 같다. OTL

 

284. 사람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한 사람에 얽힌 추억이 강물에 떠내려가듯 조금씩 멀어지고 잊힌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추억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겼던 추억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파도에 씻기듯 한꺼번에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어질 때도 있다. 밀물일 때도 있고 썰물일 때도 있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추억은 조금씩 바다로 떠내려가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때 우리는 겨우 하나의 추억을 잊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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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시 - 개정판 에디션 D(desire) 2
제임스 발라드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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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에디션 D라는 문학시리즈를 처음 만났다. 이 시리즈는 인간의 욕망과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욕망과 에로티시즘이라... 그것은 선보다는 악에 가까운 이야기. 지킬박사보다는 지킬 박사 내면의 악마. 하이드를 묘사한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투철한 윤리 의식을 아주 잠시만 한 쪽에 놓아두고 즐길 필요가 있다. 

 

이런 소재를 다룬 문학 작품을 손에 들고, 갑자기 성인군자가 된 것 마냥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외설적이라던가 폭력적이던가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할 거면 차라리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저자나 독자 양쪽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리뷰에서는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고 책을 읽은 소감에 대하여 쓸 예정이다.

 

2.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책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발라드의 책이 출간되기 전에 <크래시>을 받아서 읽어 본 편집자가 작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의 작가에게는 정신과 치료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매우 공감이 가는 평가다. 

 

도덕적 잣대를 버리고 책을 읽기로 했지만. <크래시>에서 묘사되는 성애는 너무나도 무분별하여 눈살이 찌푸려진 적도 많았다.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와 찌푸려지는 묘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그만큼 <크래시>에 녹아있는 작가의 관점이 뚜렷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작가에 대하여 살펴보니 제임스 발라드 작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은 작가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작가들은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완벽하게 다른 상징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로 황소 머리를 만들어낸 피카소의 작품이나, 별다를 바 없는 변기 하나를 갖다놓고 샘이라고 부른 뒤샹의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들이 사용한 변기나 자전거처럼 제임스 발라드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위해 차용한 이미지는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 사고. 몸에 새겨진 흉터. 이렇게 세 가지다. 보통 자동차에 대한 우리의 고정된 관점은 우리 생활에서 이제는 아주 익숙한 이동수단으로 바라보는 정도이고, 소설로 폭을 넓혀 생각해보면 로드무비를 가능케 해주는 수단의 성격으로 사용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자동차의 고유관점이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한 이동수단이라는 도구의 영역을 넘어 더 좋은 차. 멋진 차. 남들과는 다른 차를 타는 것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자동차 사랑은 애인을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모습으로 진화된다. 실제로 어떤 이는 자기 차를 애인 다루듯이 애지중지하기도 한다. 

 

발라드가 착안한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새로이 형성된 관점이다. 그래서 제임스 발라드는 자동차를 애인이라는 생물적인 요소로 재해석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2가지는 무엇일까? 자동차 사고는 남·녀가 충돌하는 바로 그 순간. 서로의 몸이 상대의 몸에 의해 충돌하여 찌그러지는 그 상태를 의미하며, 자동차 사고로 생긴 흉터는 충돌 중의 열락으로 서로의 몸에 새겨지는 생채기 같은 것이거나 또는 충돌한 이후에 새겨지는 문신의 의미를 뜻한다. 인간에 대한 새디즘이 자동차라는 물질로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3.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크래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변태성향을 갖게 되는 데에 있다. 사고 순간의 쾌락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로서는 사고의 순간이란 그저 벗어나고 싶은 순간일 뿐이었건만) 그들은 자동차라는 공간 속에서 격렬한 충돌을 벌인다. 그러한 충돌의 순간은 부부가 맺은 서약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남편이 운전석에서 룸미러로 뒷 자석을 보고 있건만, 아내는 보란 듯이 다른 남자. <크래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 '본'과 질펀하게 충돌질을 벌인다.

 

그렇다. 크래시에서는 본이라는 인물은 가장 탐구할 만한 인물로 등장한다. 1인칭 나의 관점에서 특이하면서도 닮고 싶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탐색하는 것. 그것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의 '나'가 조르바를 바라봤을 때, <노란새>에서 '나'가 머프를 바라봤던 그 시점과 일치한다. 

 

본이라는 인물은 욕망의 끝을 달리는 인물이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황홀한 존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얻기 위해서. 그녀가 탄 차량에 충돌할 순간을 노린다. 그는 그녀에게 <크래쉬>의 쾌락을 전해주기 위해, 몇 년 동안 차량 파손의 현장과 인간의 사고 현장에 들러서 순간을 카메라에 채집하며 그 순간을 준비한다. 현장의 다른 사람들은 사건 조사를 위해 카메라에 순간을 담지만, 그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충돌의 쾌락을 상상하기 위해서 카메라에 담는다.

 

그뿐만 아니라, 전문 스턴트맨을 고용하여 직접 시나리오도 작성한다. 과연 이런 치밀한 리허설에 의하여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어떻게 되었을까? 본의 욕망에 그녀의 육체가 무너졌을까? 무너지지 않았을까? 그 방향을 탐색하며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기이한 본의 이야기를 읽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도덕적 잣대를 버리고자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너무나 파격적인 설정이라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기에는 상당히 망설여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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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6 - 적벽(赤壁)편 매일경제신문사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6
요시카와 에이지 지음, 이동호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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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 적벽편은 온전히 제갈량을 읽고 싶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와룡선생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 그리고 유비를 위해 실력을 발휘한 이후부터. 그가 유비를 처음 만났을 때 털어놓은 천하삼분지계의 계책대로 전세가 급전된다. 따라서 그는 어쩌면 삼국지의 실질적인 삼국이 형성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삼국지 게임을 통틀어 가장 능력치가 높은 책사라는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국지 적벽편은 제갈량이 주연이지만. 연락이 끊긴 유비의 식솔들을 찾아 나선 조운이 유비의 아들. 아두를 가슴에 끌어안고, 마치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조조의 군사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담은 장판파 전투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전투의 이면에 부군에게 혹여나 방해가 될까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던 미부인의 희생도 있었다. 그것은 매우 가슴 아프게 다가온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무사히 지옥을 탈출한 조운으로부터 미부인에 대한 보고와 아들을 건네받으면서도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품에 안은 자식을 멀리 내팽개치는 유비의 담대한 면모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버리지 않고 모두 끌어안는 군자의 모습. 같은 종친의 유표의 세력이 탐났지만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거절하는 군자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 발견하기 어려운 장비의 지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적벽편의 장판파 전투에서 만끽할 수 있다. 조조의 수천의 추격병을 상대로 단 몇십 명의 군사를 교모히 위장시켜놓고, 많은 군사를 매복한 것처럼 꾸며둔 그의 책략과 장판파 다리 위에서 장팔사모를 들고 당당하게 서 있던 장비의 위세는 조조를 거의 완벽하게 속여넘길뻔 했다. 

 

2. 허나,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적벽편 이후부터 그려지는 커다란 밑그림. 즉, 촉나라의 약진은 모두 제갈량의 의도에 의해서 그려졌다. 그는 유비에 의해 중용되자마자 신묘한 계략을 발휘하려 유비군을 조조의 추격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젊고 새파란 놈이 무슨 일을 하겠어?'라고 의심했던 관우와 장비 이하 장수들에게 신망을 얻는다. 

 

제갈량은 촉군(유비군)이 처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오나라의 야욕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는 홀로 오나라에 건너가 조조의 협박을 받아들여 투항하려는 오나라의 이름 난 문사의 주장을 설전을 통해 각개 격파한다. 그리고 고민에 잠겨있던 주유로 하여금 오나라를 전쟁에 참여(조조가 즐겨 불렀다는 시. 주유의 아내를 탐한다는 내용의 시를 친히 소리내어 부르기까지 하면서 그를 자극한다.)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

 

비록, 오나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그 전쟁을 하게끔 유도한 제갈량의 탁월한 능력과 자신의 의도를 모두 꿰뚫어보는 그의 천리안에 위기감을 느낀 주유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덫을 설치한다. 하지만 그 덫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모습을 (특히, 사흘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어내야 하는 고의성이 다분한 임무를 부여받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에 조조의 군영 부근으로 빈 배를 보내어 적들이 쏜 화살을 받아오는 기지) 보면서 과연 제갈량의 영리함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나조차 묻고 싶을 정도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적벽대전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예견했던, 심지어 한겨울에 동남풍이 불어오는 날까지도 어림짐작했던 제갈량은 바다에 약한 조조군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쇠사슬로 배를 엮은 그 연환계를 보기 좋게 깨뜨려버렸다. 이 전투는 100만 대군을 자랑하던 조조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하고, 그의 계략대로 천하삼분지계의 막이 올랐다. 이로써 천하통일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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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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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남기려고 키보드에 손을 얹은지 한참이 지났건만. 생각했던 것 만큼 글이 술술 쏟아지지 않는다. 무슨 말이든 한자 한자 써보자. 말이야 쉽긴한데, 시작한 것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야 글 줄을 이어나갈 터인데 계속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다.

 

책을 앞에 두고 이토록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결론이 너무 명징해서다. 주장을 반박하거나 주장에서 살짝 떨어져나와 다른 생각과 연결을 지을 틈이나 필요가 거의 없다. 엄청난 독서와 공부. 그리고 사유와 경험으로 만들어진 무기력 극복의 방식. (학습된 무기력을 유능감으로 치환시키는 '동기- 인지- 정서- 행동'이라는 통합적 마음 전환이라는 방식)의 세부적인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2. 책을 제대로 소화시키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기 고유의 언어로 다시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 그리고 유능감을 높이기를 원한다면, 무기력 극복의 비법을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고 기억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후속조치인데, 왜 귀차니즘은 중요할 때 나타나서 나를 놔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불온한 상념들이 떠오른다는 것은 내면에 숨어 있던 무기력 덩어리를 너무 깊게 파헤쳐서 나한테 이렇게 무의식 부스러기가 많음에 놀랐기 때문이다. 놀람에 파묻혀서 대체 이 무기력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뒤쪽으로 밀려버렸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다시 쓰기를 주저한다는 것은 이 책을 단순한 개념을 다루는 자기계발서이 아니고, 다소 복잡하고 전문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3. 에라 모르겠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써보고 다시 또 고민해보자. 

 

잘 알다시피 무기력은 행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무기력에는 여러 종류의 무기력이 있는데 무의식에 의해 학습된 무기력이 가장 심각한 무기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학습된 무기력은 자신이 왜 무기력해지는지 알아채기 어려운. 자연스럽게 동화된 무기력이기 때문이다. 이 무기력 때문에 우리는 꿈을 꾸기만 할 뿐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무기력에 대한 극복을 위한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그런 생각과 연구결과를 통해 개발된 것이 '동기-인지-정서' 라는 내면의 점검이다. 작가는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전 부분에서 내면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력한다. 결국, 멘탈의 문제인 것이다. 멘붕에 빠지지 말지어다. 


4.책의 핵심 내용인 '동기-인지-정서-행동' 통합적 마음 전환을 좀 더 자세히 써보자.

 

동기란 동기 부여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왜 이것을 해야하는지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희미해지면 인간은 목표를 잃고 무기력해진다고 하니. 내가 하는 것이 왜 하는 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인지란 인지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긍정하는 것이다. 설사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부정적으로 보는 만큼 회의적으로 빠지게 되고, 그리하여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실책에 대하여 자책하지 말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서란 용서와 받아들임을 말한다. 이것 또한 하나의 긍정인 것 같은데, 정서적으로 기쁨을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을 훓어보면 이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성이 중요한 것 같다. 아무래도 이 개념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을 때, 인지 전환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서가 보일 때, 무기력에 빠져든다고 하니 주의해야 하겠다. 

 

5. '동기-인지-정서-행동' 중에서 앞의 세 가지가 마음을 다스리는 부분이라면 행동은 결과를 창출하는 실행과 관련이 있다. 동기부여가 된 상태. 인지 전환으로 실수도 과정의 일부분으로 바라보는 긍정. 그리고 정서의 받아들임으로 기쁜 마음을 가진다면 행동을 통하여 무기력이 아니라 성취감과 자존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성취를 반복을 통해 숙달시키는 것은 인간의 기억 속에 쌓인 지식의 구조인 스키마를 만드는 것이고, 이런 스키마의 습득을 통해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창의적이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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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 누구나 생애 한 번은 그 길에 선다
윌리엄 폴 영 지음, 이진 옮김 / 세계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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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혹시 자신의 내면에 관한 풍경화를 손수 그려본 적이 있는가? 갑자기 이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갈림길>은 내면의 풍경화를 그려 나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의 풍경화는 한 번 그리면 고칠 수 없는 풍경화가 아니다. 내면의 상태를 그린 풍경화이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잡초와 벽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풍경화에서 장미가 만발한 광활하고 밝은 풍경화로 새로이 그려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쳐 그리기의 과정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긴 했지만, 그것을 이루는 데는 신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웠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신에 대하여 부정과 미움의 마음을 안고 살았던 그를 마지막까지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절대자의 힘이었다. 그래서 현재 무신론자에 근접해 있는 나로서는 갑작스런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2. <갈림길>은 문학과 드라마라는 장르의 소재로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괜찮은 작품(흡사 <예스맨>처럼 실제로 신의 역할이 배분되는 영화)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리얼리티의 영역으로 끌어 올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실제로 소설의 영성에 대하여 99% 이상의 리얼리티로 소화하실 분들이 계신 것을 고려했을 때, 과연 하느님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대략 별이 표시하는 정도쯤 될 듯하다. 더욱이 지금 시점의 나는 사후세계는 불투명(존재하지 않음)한 것을. 죽음이 생의 끝이라는 생각에 긍정의 시그널을 이미 보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윌리엄 폴 영은 그 충실성(신이 존재 하지 않은 현실에 매몰된 삶)의 결론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크루지 영감의 개념으로 만들어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꼭 그런 모습을 가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훨씬 더 가치 있는 활동(신이 존재 하지 않지만 삶을 사는 삶)을 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첫단추에 대한 의문도 약간은 존재한다.

 

3.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작스럽게 생긴 궁금증 하나가 있다. 어쩌면 인생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이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의 권유에 의해 신을 믿었다가, 자의식이 발달하는 나이. 대표적으로 청춘의 시기에는 니체의 초인론에 흠뻑 빠져서 무신론자가 되어.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키고, 채찍질하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지금껏 쌓은 초인이 되고자 노력했던 자신의 성취가 생각한 것보다 작아 보이고. 그리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며, 그래서 다시 한 번 신과 함께 사후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려는 행위로서. 이 책처럼 내면의 풍경화를 가다듬고 풍경화를 완성하는 동시에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4. <갈림길>은 <자유의지는 없다>와 <지금, 철학할 시간>에 이어서 자유 의지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수 있게끔 해줬다. '사실'과 '진실'이라는 두 언어로서 말이다.

 

소설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결과에 의하면 '사실'은 인간이 느끼는 개인적인 관념이다. 헌데 그것은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아주 커다란 개념이다. <갈림길>에 의하면 '진실'이란 신이 만들어놓은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 그에 비하면 '사실'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룬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을 '진실'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존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란 있지만, 그것은 '사실'에 국한된 것이고, '진실'이라는 것은 신에 의하여 결정지어져 있다고 해석하면 된다. 이것은 <갈림길>에서 주장하는 유신론의 입장을 빌어 해석한 개념이다. 만약,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에서 무신론에 의한 해석을 해본다면 유신론의 반대가 될 것이다.

 

즉, '사실'은 이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각각의 존재에게 이미 '진실'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실'의 크기가 '진실'의 크기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무신론자에게는 자유의지란 아주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367. 믿음에는 모험이 따르죠. 관계에도 항상 위험이 따르고요. 하지만 결론이 뭔지 아세요? 관계가 없다면 이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어떤 관계는 다른 관계보다 좀 더 엉망이고, 어떤 관계는 오래가지 않고, 또 어떤 관계는 힘들어요. 반면 어떤 관계는 수월하기도 하죠.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관계가 다 소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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