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 - 삶.사람.사물을 대하는 김정희의 지혜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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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2009년 즈음 설흔 작가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라는 실용소설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책이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2013년의 오늘. 그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될 것 같은 <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를 읽었다. 

 

위인의 이름과 삶을 복원하고, 위인의 삶에서 얻은 가르침을 뽑아내는 목적은 그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싶다는 욕망의 투영일 것이다. 그런데 <추사>에 이르러서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 내가 들려줄 대답은 "너는 내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너는 너만의 세한도를 그려라." 로 말끔히 정리되는 분위기다. 

 


 

 

2. 공자의 <논어>. 자한편에 실린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즉,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는 어려울 때 손을 내미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 라는 뜻과도 같다. 그리고 세한도에는 그러한 변치 않는 사랑, 우정, 존경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다. 

 

제주도에 위리안치 된 김정희에게 제자 이상적(1804~1865)이 조선에서는 매우 접하기 어려운 중국의 서적인 <만학집>,<대운산방문고>,<황조경세문편>를 자신의 유배지인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건너와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사의 의미를 표함으로써 남을 드높이고, 동시에 자신까지 높아지는 일거양득의 노림수도 있는 작품이었다. 

 

102. 당벽과 모난 성격을 지닌 박제가는 내게 있어 문이었다. 내게 아랫목인 중국을 온전히 알고 중국인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거쳐야만 했다. 조강과의 만남은 그런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사람들은 그와 나의 전설에 동했지만, 나는 문으로서의 그의 역할에 동했다. 천 리 길을 시작함에 있어 그보다 좋은 문은 없었다.  

 

3. <추사의 마지막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관계의 모든 '기브앤 테이크'든 뭐든 간에 기본적으로 그 안에 진심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이 있어야만 사람은 자신이 머물고자 하는 아랫목(꿈, 목표, 목적)을 위해 문(목적을 이끌어주는 데 도움이 될 사람)을 찾을 수 있고, 그 문을 열어젖힐(그 사람을 설득시킬)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더 나아가 각자가 찾고자 하는 아랫목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실천력에 대한 용기까지 부여해주는 책이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가 서얼인 아들에게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본다면 분명 우리는 추사에게 당신을 닮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한숨을 짓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세한도를 그릴 수 있는 경지를 찾아서 마침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08.

내가 태어난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 

 

4. 이 시에서 미개하고 촌스럽다는 의미란 <동양고전의 바다에 빠져라>에서 읽는 대로라면 성리학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질구레하게 예식에 대한 다툼으로 사람을 죽이는 세태를 말함이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성리학에 대하여 거칠게 논쟁하여 양명학이나 고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했는데 말이다. 

 

그가 쓴 시를 봐서도 알겠지만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성리학의 허례허식에 찌든 조선의 현실을 벗어나려했던 서얼 중심의 학자들이 청나라의 고증학을 받아들여서 조선의 실학으로 발전된 시점이라서 그런지 그의 삶 속에는 "혹독한 관리의 차가운 손을 기억하라"처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행위를 중히 여기는 가르침도 것도 있었지만.

 

그 외에 "사물의 올바른 위치를 기억하라." ,"아랫목이 그리우면 문부터 찾아서 열어라" , "맹렬과 진심으로 요구하라." ,"너의 <세한도>를 남겨라."처럼 자신을 높이기 위한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한 가르침이 많이 담겨 있는 실용적인 소설이었다.  

 

199. 너는 내가 되려 한다. 나를 닮으려 한다. 그래서 너는 내 글씨를 흉내 내고 내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나는 박제가와 옹방강과 완원에게 배웠지만 그들이 아닌 내가 되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닮은 삶을 살기를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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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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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최고의 공부>에서 뜻하는 공부란 단순히 명문대를 입학하기 위해, 높은 학점을 올리기 위해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비법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 '공부'를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하는 책이었다. 정의 앞에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이 붙어야겠지만 말이다.

 

물질적인 성공이 아닌. 자기만족과 행복을 위한 공부를 어떻게 동기를 부여해야 하며. 어떻게 가슴이 이끄는 방향의 학습이 가능할지에 관한 고민을 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을 피상적으로 배우거나 전략적으로 학습하는 학생들이 아닌. 심층적이며 통합적으로 학습하여 성공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선배들을 인터뷰함으로써 책에 담아내었다.    

 

그중에서는 아버지와의 오랜 절충으로 학과(독일어)를 정한 후, 아버지의 차가 대학교의 코너를 돌기 무섭게 자신이 원했던 고전학으로 과를 바꿔버렸고, 졸업식 때 부모님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의 이야기도 담겨있었다.

 

2. 공부의 본질적인 부분에 접근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최고의 공부>는 어느 부분을 먼저 읽더라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각 단락이 분절되어 있었다. 그것이 인상 깊었다. 각각의 굴곡이 담긴 삶의 경험담 가운데 누구의 말을 새겨들을지.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질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차례대로 읽는 것보다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는 방식이 훨씬 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담 없이 가볍게. 

 

3. <최고의 공부>는 다양한 연령의 독자 중에서도 특히, 대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나,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는 초년생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이다. (실제로 원제목도 타겟독자를 대학생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이 추구하는 공부의 의미는 하나의 주장과 근거로 함축할 수 있는 제한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선배의 경험담 안에서 어떤 배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허허실실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4.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본 부분이 제법 많았지만 그중에서 능동적인 책 읽기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능동적인 책읽기에 실린 가르침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는다면 훨씬 더 이해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에 눈길이 긴 시간 머물렀다. 

 

과거에는 모 매체에 기사의 형태로 기고하기 위해 책의 내용을 한 번 소화한 뒤에 소화한 내용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두는. 쉽게 말해서 정보전달 방식의 글쓰기를 선호했었는데, 그러다가 책은 내( 대단하지는 않지만, 각각의 경험을 가진 존재)가 읽는 것이고, 그러므로 내 생각이 닿는 곳을 환하게 밝혀서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의식이 불러내는 글을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서 그때 당시 생각했던 줄기를 엮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읽고 확실하게 배운점이 있다. 생각을 단순화하는 것보다 여러 갈래로 해석하도록 노력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다양한 관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꽤 어려운 주문이긴 하지만 일단 마음에 담아두어야겠다. 그리고 <최고의 공부>에서 추천하는 '책을 읽는 방법'도 어렵게 다가왔지만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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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력서 - 오만불손한 지배자들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1.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 적혀있는 인간의 이력서. 이력서라고 부르기에는 문명 비판적인 성격이 너무도 강한 인류 진화의 고발서에는 하나가 아니고 열이오. 열이 아니고 백이오. 백이 아니고 천이다. 천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크로마뇽인의 등장)가 6만 년이라면 6만의 시간 동안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태곳적부터 인간은 자기보다 약한 종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부와 안락함을 쌓아왔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식민지를 거느렸다. 그러한 잉여의 산물로서 지금껏 발전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에게 주어진 자연을 독점하면서 살아왔다. 그것 또한 잉여의 산물로 전락시켜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왔다.  

 

이쯤이 되면 6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인간은 어떤 종인지 빤하게 보인다. 쉽게 말해서 탐욕의 아이콘이라는 거다. 이러한 탐욕 앞에서 동양고전이 설파한 '본래 선한 인간'이나 '무위자연' 같은 가르침들은 유명무실해졌다. 

 

372. 토머스 홉스는 1651년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서로가 매복해 있는 늑대 같은 존재로, 자연 상태에서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경쟁한다고 썼다. 


이마누엘 칸트는 방임 상태에서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민족들 간에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시민들의 준법 사회에서는 단지 정부의 억압을 통해 은폐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윤리론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의 길을 막아서면 제거해버리려고 호시탐탐 날뛰는 야생동물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콘라트 로렌츠는 공격 욕구를 모든 생물의 원초적 본능으로 보았다. 그러나 종족 보존의 기능이 있는 이 욕구가 인간에게 와서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기능 장애를 보이고 있다. 무기의 발명이 동족 살인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레몽 아농은 성욕, 소유욕, 명예욕을 가진 인간은 어려서부터 서로 충돌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우리 모두는 매 순간 '피해자이자 자해자'다. 권력이나 명예 등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분쟁의 대상이 된다. 분쟁의 대상이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협상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에서도 폭력은 하나의 유혹으로 남아 있다.


375. 인간은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늘 이웃 부족과 종족을 향해 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개인의 공격 욕구와 집단의 공격 욕구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분쟁과 전쟁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학자들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난폭한 본성에 대하여 경고해왔었다. (서양의 시각과 역사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 때문에 동양의 시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도 틀림없이 약육강식의 그것과 같을 것이며, 매 순간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오래지않아 인류는 스스로 파멸하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인류의 미래는 진실일까?

 

2. 이쯤에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음을 기억하자. 원래는 <인간 이력서>처럼 탐욕에 흔들려서 짐작할 수 없어지는 마음속의 욕망을 경고하기 위한 뜻을 가진 속담이지만, 여기에서는 근본적인 뜻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한다. 억지스럽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살릴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의 속을 모르고 싶다. 한화가 13연패할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이력서>의 저자 볼프 슈나이더 또한 인류의 미래가 이토록 재미없게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 에너지의 위기에 맞서 석유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고,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다가 피폭되고, 인간은 그렇게 지구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채 허무한 마지막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375페이지의 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375.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에겐 이러한 생물학에 맞서는 문화적 진화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생물학적 진보에 비해 월등이 뛰어난 점은 그 과정이 수천년이 아니라 수백 년, 아니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저자가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은 문화적 진화이며, 문화적 진화라는 은유적 표현에는 지금껏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책을 읽으며 예측할 수 있었다. 건강 진단 결과. 상태가 매우 위독하다는 경고를 받은 환자가 음주하고 금연하고, 운동해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의 이력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주는 건강진단서와 같은 성격을 지닌 책이다. 너 지금 최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충격 효과로 기대한 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진단서를 건네주면서 어떻게 하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진 않는다. 그것은 어려운 것일뿐더러 모호한 메아리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그저 믿을 뿐이다. 매년 몇%씩. 무한 대의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임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빨리 죽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인류의 멸종은 언젠가 닥쳐올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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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의 바다에 빠져라 (특강DVD 포함) 인문의 바다 시리즈 2
최진기 지음 / 스마트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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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섭적 인생의 권유>를 읽을 적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단어 하나가 있는데, 바로 '기획 독서'라는 말이었다. 숲을 바라볼 때, 베어 넘길 나무를 정해두고 한 그루 한 그루씩 넘어뜨려야지 이쪽 나무 한번 찍고, 저쪽 나무 한번 찍으면 효율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통섭적 독서'라는 것은 이것저것 체계를 잡지 않고, 마구 집적거리는 난잡스러움이 아니라 숲 속에 공생하고 있는 다양한 종의 나무를 시간을 들여 하나씩 천천히 집중해서 들여다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통섭의 숲이 그려진 지도는 흔히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나무를 잘 베어 넘기는데,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이것이 나한테 필요한 나무다 생각하고 찍어댔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면 나무가 아니라 작은 줄기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도대체 나무는 얼마나 거대한가?하며 좌절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도 있고 말이다.  

 

2. 그런 면에서 <동양고전의 바다에 빠져라>는 우리에게 큰 숲의 지도를 보여준다. 

 

고대 중국으로 시작하여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유가 외에 유가를 둘러싸고 격하게 논쟁을 벌였던 여러 사상들(묵자, 한비자, 양자, 고자)이 있었고, 공자와 맹자와 순자가 이끌었던 유가가 쇠락하고, 노자와 장자의 도가(이를 계승했던 남북조시대의 죽림칠현)와 석가모니의 불가(초조 달마대사부터 육조 혜능까지)가 발전했다가 송나라 시대. 유교가 도교나 불교와 비교했을 때 커다란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우주의 존재원리를 기어코 설명해 낸 주자의 성리학으로 다시 부활한다. 

 

주자의 성리학은 고려 말기부터 우리의 선조에게 이어졌다. 한편, 책에서는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로 건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이러한 유교적 이념의 확산이 결국 조선의 개국공신들로 하여금 성리학을 조선 건국의 통치이념으로 삼게끔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중국 대륙은 성리학의 아성이 왕수인의 양명학이 유행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모든 선함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있다는 인간 중심의 사상이 펼쳐지는데, 조선에서는 오히려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더욱 골몰했다는 것이었다.   

 

3. <공부하는 인간>에서 봤었던 내용. "왜 동양인이 자신의 내면에 끊임없이 질문을 하여 진리를 찾아가는 서양인과는 달리 바깥의 말씀(경전, 책)에서 진리를 찾아 나서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을 바라보고, 바라본 것이 자신의 눈에 보이면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고 해석하면 되는 것인데,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의 눈과 생각이 보는 것을 믿지 않고, 가장 먼저 경전의 해석을 믿었던 것이다. 즉, 초월한 어떤 관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평생 그것을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경험과 행동이 동시에 결정하는 데 반해서, 동양인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된 글을 보고 난 후. 행동에 나설지 나서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서양에서도 동양과 마찬가지로 성경이나 탈무드나 코란 같은 경전을 해석하면서 진리를 찾았는데, 왜 서양인은 자기 내면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동양인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아직은 그것의 답은 정확히 잘 모르겠다. 

 

지금 그 반론에 마주하여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단상은 경전을 앞에 두고, 암송 암기하는 동양인의 모습과 이스라엘의 도서관의 풍경처럼 그것을 보는 즉시 토론에 들어가는 서양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랬던 것일까? 그러니까 경전을 신성시는 하되. 그것을 읽으면서 궁금함에 튀어나오는 자신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진리임을 자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추측할 따름이다. 

 

4. 다시 <동양고전의 바다>가 그려준 숲의 지도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조선의 이름난 학자들은 성리학의 연구에 깊이 골몰하는데, 이러한 추이를 보고 있으면. 춘추전국시대의 공맹순의 사상들은 인간의 인식론적인 궁금증과 세계관의 물음에 답하는 것에 만족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절차가 번거로워지고 사소해지고 쫀쫀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이러한 깊은 이야기를 다루는 논쟁. 이황과 이이의 이기론과 사단칠정에 얽힌 여러 가지 논쟁들은 좀 더 많은 관련 도서를 읽음으로서 공부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낸 책들이 많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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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어젠다 최재천 스타일 2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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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은 '줄기'란 뜻의 한자 '통統'과 '잡다'는 뜻의 한자 '섭攝'이 합쳐진 말로 '전체를 도맡아 다스리기'라는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어느 것 하나 간단하지 않다. 한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에 접근하려면 결국엔 통섭형 인재가 되어야 한다." 129~130

 

1. 공생의 메시지가 뚜렷하게 들어있는 <통섭적 인생의 권유>라는 책은 2006년 말부터 2012년까지 최재천 교수가 언론에 기고한 글과 인터뷰한 글을 주제에 맞게 엮은 책이었다. 

 

기고문의 형식에서 알 수 있듯이 간략하게 주제만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지난번에 읽은 <최재천 스타일>에 비해서 훨씬 쉬운 독서가 가능했으며, 어찌 보면 나중에 나온 이 책이 최재천 교수의 저작물을 읽기 전. 가장 훌륭한 에피타이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내용적인 면에서도 생물학자 특유의 진화론적 관점으로 사회적 변화를 바라보는 방식이 돋보였다. 특히, 남성을 바라보는 시점. 간략히 말하자면, 노동 집약적 사회에서 지식 집약적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로 인류 역사 가운데 대략 만 년 정도 이어졌던 남성 중심 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따라서 여성이 사회의 리더로 발돋움할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되었다(호주제 폐지)는 소견.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의 고정화된 역할(평생 담당해야 했던 경제적 역할)에서 오히려 해방됨으로써, 조금 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3.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10년째 제자리걸음 하는 이유를 분석하는 글도 재미있었다. 책의 묘사를 빌어서 이야기하자면 그 원인은 지식기반 사업이 아닌 하청업에 만족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공부하는 인간>에서 읽은 창의적 리더형 인재가 아닌 관계 중심의 팔로어형 인재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모순과도 맥이 닿아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숙제'만 잘하는 데서 만족하지 말고 '출제'도 잘하는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교육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그의 주장하는 교육 사업이란 한 우물만 깊이 파는 전공 위주의 형태가 아니라 다시금 통섭형 인재에 함의가 맞추어지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4. 교수가 주장하는 통섭형 인재의 핵심 개념인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는 진화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결코 우월하다고 볼 수 없는 인간이라는 종의 착각(창세기 1장 28절. 9장1)을 잘못 해석한 결과)에서 빚어지는 오만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신의 계시와는 다르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간에 관하여 연구했던 수많은 학자의 사유가 담긴 책을 통해 통합적으로 공부하고 되돌아봄으로써 공생에 해가 되는 실책을 줄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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