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꽃 - 고은 작은 시편
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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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랫소리 도저하여 나 같은 속인이 듣기에 거하다. 만물의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는 시인의 감성은 이미 경지에 들어 있다.


 

“혹시 나에게는 시무( 詩巫)가 있어 여느 때는 멍청해 있다가 번개 쳐 무당 기운을 받으면 느닷없이 작두날 딛고 모진 춤을 추어야 하는지 모른다.”


 

     시인도 알고 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이 수행이라면 수행일 수 있겠으나 오히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깨달음이 없는 삶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감동한가. 시인은 쉼 없이 깨닫고 또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의 깨달은 마음은 깨우치는 노래가 된다.


 

     시인은 약하다. 허나 한 편 강하다. 그의 노래에 녹아 있다. 지렁이, 옹달샘, 새끼 잠자리, 똥거름밭, 아이들, 이름 없는 노인과 아낙네, 상문이, 수남이, 경호 등 평생 누군가의 기억 속에 크게 기억되지 않을 만한 사물과 민초들을 그는 추앙한다. 그들에게 배운다. 그들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 힘을 가진 자들에게 한 없이 강하다. 그리하여 그의 노래 소리에는 죽비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나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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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가을 처음으로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우리 가족 모두는 간절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렸다. 봄이 오면 텃밭을 가꾸어 상추며 고추며 토마토를 심자고, 꽃밭을 만들어 예쁜 꽃들을 많이 심자고 약속을 했다.
 

     드디어 봄이 되었고 우리는 약속대로 텃밭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초보 농사꾼이었지만 욕심을 부려 상추, 고추, 토마토 뿐 아니라 근대, 고구마, 파, 부추까지 심었다. 아이들과 약속한 대로 정원 한 편에는 갖가지 꽃 씨와 장미 모종을 심었다. 난생 처음이었지만 땅을 갈아업고 퇴비를 뿌리고 씨앗을 뿌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아마도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힘겨움보다 풍성한 수확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나무들이었다. 씨앗을 뿌릴 때만 해도 앙상했던 나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잎이 나고 자라고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무성해진 나무들은 그림자를 만들었고, 이 그림자로 인해 정성껏 심은 농작물들이 자라지를 못했다. 비가 와서 젖은 땅과 농작물들이 했볕을 받아 자라야 하는데  나무들의 그림자가 햇빛을 막아버리자 이 놈들이 썩거나 자라지 못하거나 힘이 없어 픽픽 쓰러져 버렸다. 
 
 겨우 상추 한 번 따먹는 기쁨밖에 얻지 못하고 우리의 첫 농사는 망가지고 말았다. 썩어가는 녀석들,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녀석들, 도무지 자라지 않는 녀석들, 아예 쓰러져버린 녀석들. 이 녀석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쓰라렸다. 아침마다 빨리 갈아 엎어버려야지 하면서도 쉽게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그림자가 원망스러웠고 햇볕이 몹시 아쉬웠다. 제 아무리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어도 그림자로 인해 이 녀석들은 햇볕을 한 모금도 받지 못했고 도무지 자라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농작물을 기르면서 햇볕의 소중함과 그림자의 모진 피해를 절실히 느꼈다. 농사뿐일까? 나는 부모로서 자식들을 기르고,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농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기대가 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 하루 하루 학업성취도가 높아지는 것, 예의 바르고 곱게 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숨가쁜 희열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그림자가 있다. 도무지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그림자가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이다. 소극적인 아이들 뒤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가 있다. 자주 다투고 자기 맘대로만 하려고 하는 아이들 뒤에는 과잉보호하는 부모가 있다. 열등감이 심해 가진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아이들 뒤에는 자주 다투는 부모들이 있다. 집중하지 못하고 학업성취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 뒤에는 지나치게 기대하거나 지나치게 무관심한 부모들이 있다. 문제 있는 아이들 뒤에는 문제 있는 부모가 있고, 건강한 아이들 뒤에는 건강한 부모가 있다.

 

     아이들의 그림자는 어른들이 만든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과도한 기대, 강압과 비교, 지나친 경쟁, 무관심. 이런 말들은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이다. 멀리 봐야 하는데 앞만 보게 하고, 상생과 상식과 원칙을 가르쳐야 하는데 경쟁만을 유도한다. 자유롭게 사고하기보다 간섭과 강제를 통해 아이들을 지배하려 하고, 관계보다 기능을 중시하는 풍토를 만든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그림자 때문에 햇볕을 받지 못해 자라지 못하고 꺽이고 쓰러지고 만다. 나도 그림자를 만드는 어른들 중의 한 명이다. 맘이 편치 않다.

 

     농작물들을 다시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제거해야 한다. 그림자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을 다 해도 햇볕을 받지 못하는 농작물들이 자랄 길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그림자를 제거하지 못했다. 나무를 베어내는 일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림자를 하나씩 걷어낼 것이다. 나무보다 농작물이 소중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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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농구화 버리는 날이다. 15년이 넘은 내 농구화이다. 잠시 어찔하며 눈물이 핑 돈다. 

     쓰레기 분리 수거함에 넣으려다 가지고 들어왔다. 문득 나이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진다. 한 살 한 살 더 들어갈수록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지겠지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남자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전진만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공부를 오래 했기에 남들에 비해 더욱 바빴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갔고 30대 중반까지 공부를 했다.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결혼도 서른 다섯에야 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후에는 이전보다 몇 배나 더 바빠졌다.  

        대학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 별명은 '운동권'이었다.  많은 시간을 농구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교수님과 원우들은 농구장에 가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며 나를 운동권이라 불렀다. 땀 흘리고 몸을 부딪히며 농구를 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 무렵 먹고 자고 씻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 외에 내 생활의 대부분은 농구장과 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 농구는 어릴 때부터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내 손에는 늘 책 아니면 공이 들려 있었다. 

      바빠지면서 농구도 서서히 내 생활에서 사라져갔다. 치열하게 살아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 나는 옆을 돌아볼 여유가 많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만의 시간'은 사치였다. 일해야 했고, 벌어야 했고, 윗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했고, 뒤쳐지지 않도록 끊임 없이 정보를 모으고 나를 개발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경쟁의 세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전진해야만 했다. 

     시간은 흘렀고 결국 오늘은 내 마지막 농구화를 버려야 하는 날이 되었다.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깟 농구화 한 켤레에 뭐 그리 많은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핀잔을 놓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오늘 매우 슬프다. 어지럽다. 답답하다.

     이제 나는 공을 퉁퉁 튀겨 가며 멋지게 날아 올라 슛을 던질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남들보다 높이 뛰어 올라 리바운드를 잡아내거나 쏜살같이 달려가 몸을 뻗어 레이업을 올려놓을 수도 없다. 10년도 더 넘게 공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버렸다.
 
    오랫동안 신발장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내 농구화. 아내의 구박을 견뎌내면서도 언젠가는 신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며 지켜왔던 내 농구화. 신발장에서 가장 덩치가 크지만 가장 긴 시간 동안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내 농구화. 오늘 나는 그 농구화를 버려야만 한다.  

     요즘은 사람이 그립다. 잠시 멈추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마흔이 넘은 지금 브레이크를 한 번 쯤은 밟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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