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를 읽고


 









  그런데 어제 쓴 것 처럼 '지루한 이야기' 가  내내 슬프기만 하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중간중간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게 되는 부분도 많다.


  우리 집에서는 나와 아내와 딸 외에도 딸아이의 여자 친구 두세명, 그리고 리자의 숭배자이자 청혼자인 알렉산드르 아돌포비치 그네께르가 함께 식사한다. (중략) 그는 화려한 색상의 조끼에 짤막한 재킷, 허리께는 풍성하고 발목 쪽은 매우 좁은 커다란 체크무뉘 바지를 입고 노란색 단화를 신고 다닌다. 두 눈은 새우 눈깔처럼 볼록하고 넥타이는 새우 꼬리와 비슷해서 이 젊은 녀석의 존재 전체에서 새우 수프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p.49

: 새우 눈깔, 존재 전체에서 새우 수프 냄새ㅋㅋㅋㅋㅋㅋ (이 부분 읽고 한동안 이 닦다가도, 세수하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아내와 하인들은 "저분이 바로 그 약혼자이셔" 라며 의미심장하게 속삭거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를 보면 내 식탁에 줄루족이 앉아 있기라도 하듯 당혹스럽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기만 하는 딸 애가 저 넥타이와 저 눈깔과 저 흐물거리는 뺨따귀를 사랑한다는 것이 사뭇 이상하기만 하다……


-p.51

: 흐물거리는 뺨따귀.......미쳐 미쳐.



  "아까 강의를 마치고 가는데 글쎄 층계에서 저 늙은 멍청이 NN을 만나지 않았겠어요. 그 양반 늘 그렇지만 그 말 주둥이 같은 턱을 쑥 내밀고 걸어가면서 두리번거리더라고요. 자기 편두통이랑 마누라랑 자기 강의 안 듣는 학생들 욕을 하고 싶어서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던 거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 양반이 저를 본거 같더라니까요. 이제 저는 망한거지요. 끝장이 난 거지요……"


-p.65

: 가끔 나도 회사에서 미하일 처럼 '나는 망했지요. 끝장이 난 거지요.' 같은 기분 느낀다. 이 문장도 너무 웃겼다.



  내 현재 기분으로는 그와 딱 5분만 같이 있어도 영겁의 시간 동안 함께 있어온 것처럼 지긋지긋하다. 나는 그 비참한 인간이 싫다. 그의 조용하고 고른 음성과 책 읽는 듯한 말투는 나를 잠재우고 그의 이야기는 나를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든다. 그는 나에 대해 오로지 가장 훌륭한 감정만을 품고 있으며 오로지 나를 즐겁게 해주겠다는 일념에서 주절거리지만 나는 그 댓가로 마치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한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러나 그는 나의 정신적인 암시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머문다, 머문다, 머문다……


-p83

: 물러가라고 속으로 세번이나 생각했는데도 안 물러간다. 머문다 머문다 머문다 도 세 번씩이나 쓰신 체호프님.



  또 한 군데 감탄한 부분이 있다. 동료 교수 미하일은 까쨔를 사랑하고 있는데 체호프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나는그의 눈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가 까짜한테서 컵을 받아 들 때, 혹은 그녀의 말을 경청할 때, 혹은 무언가를 가지러 방을 나서는 그녀를 눈으로 뒤쫓을 때, 그의 시선에서 온순하면서 애원하는 듯한, 그리고 순수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p.62


P.S 쓰다보니 너무 많이 내용을 발췌했는데, 창비에서 뭐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 정말 이 소설 대단한 소설이었다. 나를 이렇게 웃겨놓고 막판에는 그렇게 눈물을 쏙 빼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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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9-29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이 만나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보기엔 한참 덜떨어져 보이는 사람에 대한 저 묘사 정말 웃기면서도 날카롭죠? ㅎㅎ 하여간 체홉 양반 천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케이 2017-09-29 11:43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천재예요. 새우 수프는 진짜 근래 들은 말 중 최고 웃겼습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체호프님. ㅋㅋㅋ
 
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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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여름에 이 소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 '니콜라이' 처럼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볼 때, 눈부신 시절로 기억할 수 있는 때가 몇이나 될까? 나에겐 한순간도 없을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내 인생의 최고의 시절은 아직 안 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고 보니 내 인생 좋은 시절은 아직 안온 것이 아니라, 그냥 영원히 안오는 것이고 내가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그 시절이 어쩌면 내 인생의 절정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설령 눈부신 시절이 있었다고 한들 늙고 병든 자기의 노년 시절을 마냥 즐겁고 흐믓하게 보낼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존경받는 의대 교수이자 고위급 3등 문관으로 살고 있는 '니콜라이'는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내 '바랴'도 아이스크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딸 '리자'도, 애정을 다해 친딸처럼 기른 친구의 딸인 '까쨔'도 모두 니콜라이가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모두 흉측하게 변했고, 예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니콜라이는 변해버린 그들이 어색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바로 자기 자신이 점점 흉하게 변해가는 것을 끊임없이 자책한다. 가족은 물론이고 맘씨 좋은 동료교수 '미하일 표도로비치'도 자기의 교수 자리를 물려받을 조수 '뾰뜨르 이그나찌예비치' 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일 뿐이고, 니콜라이에게 위로가 되긴 커녕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조차 괴로울 뿐이다. 

  남겨진 인생에 대한 남루함을 끊임없이 토로하는 이 소설은 가슴이 아리지만, 제목처럼 지루하지만은 않다. 체호프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을 읽다보면 주인공 니콜라이의 인생에 진심으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인생이란 나중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외롭고 비루하고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세상 누구에게도 엄청나게 큰 기쁨도 슬픔도 되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니콜라이 같은 사람도 그 누구라도 결국... 결국, 인생은 슬픈 것일까!!

  이런 생각에 '지루한 이야기'를  다 읽고나선 결국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대체로 식사 후 부터 한밤이 될 때까지 사이에 나의 신경성 흥분은 극에 달한다. 나는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는다. 이 시간이면 누군가 방에 들어올까봐 두렵고 갑자기 죽을까봐 두렵고 내 눈물이 부끄럽다. 전반적으로 내 영혼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이상 램프도 책들도 마룻바닥 위의 그림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참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거칠게 아파트에서 끌어낸다.

-p.57

"바람결에 저 멀리 어딘가 술집에서 손풍금 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담장을 따라 달려가는 뜨로이까 썰매의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도했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중략) 그리고 자, 봐, 내 꿈은 실현되었어. 나는 내가 감히 꿈꾸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어. 30년 동안 나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고 탁월한 동료들을 알고 지냈고 찬란한 명성을 만끽했어. 나는 사랑에 빠졌고 열정적인 사랑 끝에 결혼했고 아이들을 가졌어 한마디로 말해서 뒤를 돌아보면 내 인생 전체가 재능있는 손끝에서 창조된 아름다운 예술품 처럼 느껴져.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저 피날레를 망치지 않는 일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죽어야만 하지. 만일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닥쳐온 위험이라면 나는 그것을 교사이자 학자이자 그리스도교 국가의 시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맞이해야 되겠지. 즉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지금 피날레를 망치고 있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너에게 손을 내밀며 도와달라고 애원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그냥 빠져 죽으라고, 그게 순리라고 말하고 있어."

-p.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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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루한 이야기」 잡담
    from 케이의 책꽂이 2017-09-29 09:51 
    그런데 어제 쓴 것 처럼 '지루한 이야기' 가 내내 슬프기만 하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중간중간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게 되는 부분도 많다. 우리 집에서는 나와 아내와 딸 외에도 딸아이의 여자 친구 두세명, 그리고 리자의 숭배자이자 청혼자인 알렉산드르 아돌포비치 그네께르가 함께 식사한다. (중략) 그는 화려한 색상의 조끼에 짤막한 재킷, 허리께는 풍성하고 발목 쪽은 매우 좁은 커다란 체크무뉘 바지를 입고 노란색 단화를 신고 다닌다. 두 눈은 새우
 
 
잠자냥 2017-09-28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빠는 바닐라 맛이야!˝
안녕, 나의 보석이여!
이 두 문장을 저는 올해의 문장으로 꼽고 싶네요...

케이 2017-09-28 17:20   좋아요 0 | URL
˝아빠는 바닐라맛이야!˝ 라고 말하며 엄지 척 하는 모습 생각만해도 너무 깜찍하죠.
안녕 나의 보석이여! 하고 별안간 느낌표로 소설 끝나는데 진짜 눈물이 핑 돌았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폭풍의 언덕」 을 읽고


 1. 등장인물들의 가족관계

* Wuthering Heights 저택 (언쇼 집안)  : 힌들리 언쇼(오빠) - 캐서린 언쇼(여동생) 남매 / 입양한 히스클리프

* Thrushcross 저택 (린튼 집안) : 에드거 린튼(오빠) - 이자벨라 린튼(여동생) 남매


2. 등장인물들의 혼인 및 자녀

* 힌들리 언쇼 - 프랜시스 혼인 : 아들 헤어튼 언쇼

* 에드거 린튼 - 캐서린 언쇼 혼인 : 딸 캐서린 린튼

* 히스클리프 - 이자벨라 린튼 혼인 : 아들 린튼 히스클리프


  구글에서 찾아보니 폭풍의 언덕을 읽던 사람들이 그린 가계도 같은 사진이 많았다. 나 역시 소설을 읽다가 캐서린 죽었다면서 여기 왜 또 캐서린이 있지? 이런 생각에 혼자 노트에 막 가계도를 그려보았다.

  음... 주요 주인공들의 2세들이 부모 중 누구의 성향을 더 많이 물려받았는지 상징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작가는 이런 식의 작명을 했던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다른 이름으로 지어주지. 너무 헷갈렸다!

  안그래도 헷갈리는데, 민음사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번역까지 잘못 되어 있다. 민음사의 폭풍의 언덕 p.57 을 보면 캐서린 린튼의 이종사촌이 헤어튼 도련님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난 힌들리 언쇼랑 프랜시스가 서로 부부 사이가 아니고 프랜시스가 힌들리 엄마의 자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캐서린은 왜 이모한테 언니라고 불러? 이런 생각도 하고 아무리 읽어도 등장인물 관계를 모르겠어서 초반에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헤어튼 언쇼는 캐서린 린튼의 외삼촌의 아들이니까 이종사촌이 아니라 외사촌이 맞는 건데, 책에 잘못 번역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읽은 책은 헌 책으로 산거라 오래전 출판된 버전인데, 개정된 버전에는 제대로 번역되어 있겠지?


  또 한가지 궁금한 게 헤어튼이 캐서린 린튼의 외사촌이면 둘이 4촌 밖에 안되는 어마어마하게 가까운 친척인데, 옛날 잉글랜드에서는 이 정도로 가까운 친척이 사랑하고 결혼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걸까?

  토마스 하디가 쓴 '무명의 주드' 를 보면 주드가 사촌인 '수'와 결혼하는 건 사회적으로 금기시 된다고 나온다. (읽진 않았지만, 영화 때문에 대략적인 이야기만 앎) 토마스 하디와 에밀리 브론테의 출생년도가 불과 22년 밖에 차이 안나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어떤 이유로 잉글랜드에서 사촌 사이의 결혼을 금지시킨 건지 궁금해 죽겠는데 찾기 귀찮아서 그냥 궁금해하고만 있다.


P.S 영화 '미녀와 야수' 를 봤는데 거기 야수로 나온 배우 '댄 스티븐슨' 이 아무리 생각해도 에드거 린튼 이미지다.



내 머리 속의 에드거 린튼은 딱 이런 이미지다.

다른 주인공들을 맡으면 좋을 배우는 떠오르지 않는다.

귀여운 헤어튼은 10대시절 니콜라스 홀트가 하면 어울렸을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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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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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제일 가깝게 지냈지만 어느날 갑자기 내 곁에서 종적을 감춰버린 내 친구 제이는 이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책을 워낙 많이 읽던 친구였는데... 가끔 그 친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면서 그리운 감정을 느낀다.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걸까.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이제 볼 수 없지만 나는 현재 그 친구의 모습을 어쩐지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왜냐면 내가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처럼 그 친구도 그대로일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좋아하던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제서야 이 소설을 읽었다. 중학생 때 '제인에어' 를 읽다가 지루함에 못이겨 결국 중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어서 (아직도 안읽음) 같은 시대를 다룬데다 샬롯 브론테의 자매가 쓴 이 작품도 이상하게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 은 '제인에어' 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고, 나는 한동안 이 소설에 푹 빠져 잠도 제대로 안자며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에밀리 브론테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인 '폭풍의 언덕'을 남기고 병에 걸려 30살에 죽었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불꽃같은 열정으로 남은 생명을 쥐어짜내가며 소설을 썼을 작가를 떠올리니 눈물이 고였다.
 작가가 생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써내려간 소설이라 그런지 이 소설은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어둡고 우울했다.

  서로 깊은 상처를 주기만 하는 캐서린 언쇼와 히스클리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나마 그 둘은 불행하게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중학생 때 '제인에어' 대신 '폭풍의 언덕' 을 읽었다면, 이런 처절하고 비극적인 사랑을 꿈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캐서린 언쇼가 죽고난 뒤에도 엄청나게 남아있는 책의 남은 페이지를 보며 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더 써져 있는 것일까?! 란 생각에 의아했는데 그 뒤는 헤어튼 언쇼와 캐서린 린튼의 또 다른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이 소설에서 제일 내 맘에 드는 인물은 의외로 헤어튼이다. 캐서린을 사랑하면서도 조금만 수가 틀어지면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자기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캐서린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몰래 글을 배우는 그는 히스클리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귀족적 품위를 희미하게나마 간직한 남자다. 나는 마지막에 캐서린과 헤어튼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부분이 어찌나 좋든지 그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어느새 캐서린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애정 표현도 거리낌 없이 하는 헤어튼이 귀여웠다.

  거리의 아이로 고된 학대를 견디고, 삶의 유일한 이유였던 캐서린 마저 잃은 히스클리프의 심정을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캐서린 언쇼가 죽은 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행하는 악행은 계속 읽기 괴로웠다. 야만스럽지만 숙명처럼 끌릴 수 밖에 없는 악마적 매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의 전형인 히스클리프는 분명 문학 역사에서도 기념비적 인물 중 하나겠지만, 글쎄.. 히스클리프에게 사로잡히기에는 이제 내 나이가 너무 많나보다. 더 어렸을 때 읽었다면 내 친구 제이처럼 히스클리프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적이었는지 알겠어. 왜 나를 경멸했지?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어. 캐시? 나로선 위로할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어. 당신에게는 그래 마땅해.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인 거야. 그래, 나에게 입맞추고 울려면 울어도 좋아. 나의 입맞춤과 눈물을 빼앗으려면 빼앗아도 좋아. 그러면 당신은 더욱 시들 것이고, 자신을 저주하게 될 거야.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대답해봐. 린튼에 대한 어리석인 생각 때문이었어?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아, 당신 같으면 마음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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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폭풍의 언덕」 잡담
    from 케이의 책꽂이 2017-09-25 17:03 
    감상 외 잡생각들. 1. 등장인물들의 가족관계* Wuthering Heights 저택 (언쇼 집안) : 힌들리 언쇼(오빠) - 캐서린 언쇼(여동생) 남매 / 입양한 히스클리프 * Thrushcross 저택 (린튼 집안) : 에드거 린튼(오빠) - 이자벨라 린튼(여동생) 남매2. 등장인물들의 혼인 및 자녀 * 힌들리 언쇼 - 프랜시스 혼인 : 아들 헤어튼 언쇼 * 에드거 린튼 - 캐서린 언쇼 혼인 : 딸 캐서린 린튼 * 히스클리프 - 이자벨라 린튼 혼
 
 
2017-09-26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6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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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첫 직장에서 힘든 겨울을 보내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읽었다. 그때도 감상문을 쓰긴 썼다. 당시 내 상태가 형편 없었기 때문에 그때 쓴 감상문은 읽어보고 싶지 않다. 아마 끔찍한 내용일 것이다.

  직장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당시 나는 히라오카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부자집에서 태어나서 평생 직업을 가져본 적 없이 우아하게 사는 다이스케가 절대 미치요를 택할 리 없다고 확신하며 책을 읽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30대하고도 중반이 된 지금 다시 읽으니, 히라오카 같은 놈에게는 아무런 동정이 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딱한 사람은 바로 미치요다. 대학시절 미치요와 다이스케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친구인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을 적극 돕는다. 오빠도 엄마도 갑자기 죽어 의지할 곳 없던 미치요는 결국 사랑하지도 않는 히라오카와 결혼하고 불행한 삶을 산다. 몇년이 지나 도쿄에서 다시 만난 미치요와 다이스케는 함께하기로 하지만, 이미 미치요는 몸이 약할대로 약해진 상태이고, 다이스케는 가족에게 의절당하고, 히라오카는 아픈 자기의 부인 미치요를 다이스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에는 불륜에 빠지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남녀가 서로 오랜 기간 사랑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헤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실연한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심하여 이별을 통보한 사람을 죄인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람의 감정에 벌을 주고, 상을 줄 순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이 평생 옳은 선택을 할 수 없고,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을 순 없을 것이다. 설령 사회적으로 큰 도덕적 의무가 요구되는 결혼을 한 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혐오하는 작가의 태도가 소설 군데군데 드러나서, 나쓰메 소세키가 평생 얼마나 외롭게 살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래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나쓰메 소세키 뿐이구나. 하는 생각도 이 소설을 읽으며 자주 했다. 다만, 난 나쓰메 소세키 처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대신 내 마음을 표현해주는 작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도 이게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고,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 만으로도 내 인생은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히 이 소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편소설 중 하나인데, 다시 읽으니 처음 읽는 것 처럼 새로웠다. 특히 다이스케가 마침내 미치요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내 기억에는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다이스케가 자신이 가진 특권 전부를 포기할지 안할지 그 부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다른 부분에는 집중을 안했던 것 같다. 이렇게 대충 읽어놓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그 후' 라고 자부했던 내가 좀 부끄러웠다. 

그는 스스로가 정당한 길을 걸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 만족을 이해해 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이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그리고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전부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고 태워 죽이려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빨리 자신을 태워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p.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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