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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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첫 직장에서 힘든 겨울을 보내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읽었다. 그때도 감상문을 쓰긴 썼다. 당시 내 상태가 형편 없었기 때문에 그때 쓴 감상문은 읽어보고 싶지 않다. 아마 끔찍한 내용일 것이다.

  직장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당시 나는 히라오카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부자집에서 태어나서 평생 직업을 가져본 적 없이 우아하게 사는 다이스케가 절대 미치요를 택할 리 없다고 확신하며 책을 읽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30대하고도 중반이 된 지금 다시 읽으니, 히라오카 같은 놈에게는 아무런 동정이 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딱한 사람은 바로 미치요다. 대학시절 미치요와 다이스케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친구인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을 적극 돕는다. 오빠도 엄마도 갑자기 죽어 의지할 곳 없던 미치요는 결국 사랑하지도 않는 히라오카와 결혼하고 불행한 삶을 산다. 몇년이 지나 도쿄에서 다시 만난 미치요와 다이스케는 함께하기로 하지만, 이미 미치요는 몸이 약할대로 약해진 상태이고, 다이스케는 가족에게 의절당하고, 히라오카는 아픈 자기의 부인 미치요를 다이스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에는 불륜에 빠지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남녀가 서로 오랜 기간 사랑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헤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실연한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심하여 이별을 통보한 사람을 죄인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사람의 감정에 벌을 주고, 상을 줄 순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이 평생 옳은 선택을 할 수 없고,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을 순 없을 것이다. 설령 사회적으로 큰 도덕적 의무가 요구되는 결혼을 한 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혐오하는 작가의 태도가 소설 군데군데 드러나서, 나쓰메 소세키가 평생 얼마나 외롭게 살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래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나쓰메 소세키 뿐이구나. 하는 생각도 이 소설을 읽으며 자주 했다. 다만, 난 나쓰메 소세키 처럼 쓰지 못한다. 이렇게 대신 내 마음을 표현해주는 작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도 이게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읽고, 생각할 기회를 갖는 것 만으로도 내 인생은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히 이 소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편소설 중 하나인데, 다시 읽으니 처음 읽는 것 처럼 새로웠다. 특히 다이스케가 마침내 미치요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내 기억에는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다이스케가 자신이 가진 특권 전부를 포기할지 안할지 그 부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다른 부분에는 집중을 안했던 것 같다. 이렇게 대충 읽어놓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그 후' 라고 자부했던 내가 좀 부끄러웠다. 

그는 스스로가 정당한 길을 걸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 만족을 이해해 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이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그리고 사회도 세상 사람들도 전부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 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고 태워 죽이려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빨리 자신을 태워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p.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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