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800여년전에 살았던 자이다. 길가메쉬라고 했다. 왕이었다. 왕은 왕이로되 지혜롭고 너그러운 왕이 아닌 철부지 폭군이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도시의 모든 신부에게 초야권을 행사하고 솟구치는 기운을 주체 못해 아무에게나 자기 힘을 과시하며 폭력을 휘두르던 철없는 난봉꾼이었던 것이다.

신들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만큼 기운이 센 자를 만들어 내어 그와 대적시키니 그의 이름은 엔키두라 했다. 그는 이 난폭한 왕을 초야권을 행사하려던 신부의 집 앞에서 무릎 꿇린다. 그 나이의 젊은이들이 흔히 그렇듯 크게 한판 싸우고 난 그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고 길가메쉬는 이제 좀 철이 든 듯 보이는데, 좌충우돌 그의 삶엔 이제 하나의 목표가 생긴다. '명성'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산속으로 떠나길 원합니다. 저는 제 명성을 세우겠습니다. 저는 어떤 명성도 세워지지 않은 그곳에 신들의 명성을 세우겠습니다.

명성을 위해 삼목산에 살고 있는 산지기 훔바바, 악이며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운 존재를 죽이려 하는 길가메쉬를 엔키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뜯어말린다. 말리는 그들에게 겁없는 이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친구. 자네도 저들과 똑같은 말을 할 건가? '나는 죽음이 두렵다'라고. 응?

이 피끓는 젊은이에게는 죽음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나중의 걱정거리였던 것이다. 엔키두와 함께 훔바바를 죽이고 명성을 얻는데 성공하나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신들의 노여움은 길가메쉬와 함께 훔바바를 죽인 엔키두에게 돌아가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친구의 죽음을 근척에서 보고 나서야 죽음이란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게된 길가메쉬는 영생을 찾는 여행을 떠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 탕탕 치던 젊은이는 이제 이렇게 오열하며 대초원을 헤맨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속을 파고드는구나!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 대초원을 헤매고 있고.....

인간은 몇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철없는 어린 시절엔 주변이 보이지 않고, 어른이 되어서는 명예나 돈같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천년을 살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막상 눈앞에 닥치면 받아들이기 힘들어 몸부림치는 것이.....

영생을 찾으려다 실패한 그에게 신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슬퍼해서도, 절망해서도, 의기소침해서도 안 된다. 너는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고난의 길임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너는 이것이 너의 탯줄이 잘려진 순간부터 품고 있었던 일임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날들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그러나 너는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갖고 저승에 가서는 안된다....

이 충고 역시 지금까지도 유용한 충고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다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던가. 나도 저 충고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고, 그로 인해 안타까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지니.

최초의 신화라고 하지만, 이건 인간의 이야기이다. 3분의 2는 신이었던 이 대단한 젊은이는 결국, 지상의 모든 인간이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방황하는 여정의 전부를 자기의 일생에 녹여 보여준다. 인간이면 가질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 욕망, 좌절, 두려움이 이 4800여년전에 살았던 사내의 일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신화가, 혹은 영웅담이 호쾌한 서사시라기보다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의 슬픈 자서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건 한 사람의 일생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읽고 웅녀가 진짜 곰이었다고 믿지는 않듯이 사실 길가메쉬가 신의 아들은 아닐 것이다. 모든 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민족의 조상을 신성시하고 백성에 대한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 이야기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나혼자 그걸 추리해가며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예를 들어 엔키두는 길가메쉬를 힘으로 이겼고, 이야기 곳곳에서 묘사되는 걸 보면 지혜도, 힘도, 용기도 길가메쉬보다 나은데 왜 길가메쉬가 영웅이고 엔키두는 영웅의 친구에 불과한 걸까? 길가메쉬는 무모하고, 막상 두려움이 닥치면 엔키두의 뒤로 숨던데? 거기다 훔바바를 만나선 치사한 꼼수까지.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대적하는 것이 아닌 여자와 각종 공물을 바칠 것을 제시하며 훔바바의 능력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버리던데. 그것은 이 신화를 쓴 민족의 왕이 길가메쉬였고, 엔키두는 변방 다른 민족의 지도자나 장수였으며 둘이 연합하여 막강한 적국 훔바바를 계교로써 물리친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하급신들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신들이 만들어낸 '원시 노동자'였다. 이런 생각은 신의 대리인이라 칭하는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부리는데 더 없이 좋은 세뇌도구였으리라. 그런데 신들은 자신들이 편하기 위해 인간이라는 '원시노동자'를 만들어놓고 그들이 지혜를 갖게 되자 두려워하며 홍수로 쓸어버리려 한다.이 이야기는 노아의 홍수 등 후대의 여러 홍수설화로 변주된다. 그리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인간은 자기들이 편하려고 자동기계인 로봇, 인조인간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을 대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 SF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길가메쉬 이야기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인류는, 이 최초의 신화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도, 게르만의 신화 <베어울프>도, 히브리족 창세기 <베레쉬트>도, 현대의 <반지의 제왕>까지 길가메쉬에 빚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많다. 오디세이아 이야기도, 노아의 홍수설화도, 바벨탑 전설도 그 원형은 이 최초의 신화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길가메쉬 이야기의 주인공인 수메르 민족은 7이란 수를 신성시 여겼는데, 혹 1주일이 7일인 것은 그래서는 아닐까? 그런데 이 최초의 이야기 길가메쉬가 최초임이 알려진 것은 겨우 200년도 안되었다. 그동안 그리스신화나 성서를 가지고 사람들은 최초를 논해왔다. 그런데 길가메쉬가 쓰여진 것은 그보다 무려 2000년 전인 것이다. 그리스신화나 성서가 지금부터 2000여년 전의 이야기임을 생각하면 참 아득한 이야기이다. 혹, 모른다. 수메르의 신화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가 땅 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실제 <신의 지문>이란 책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전쟁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젊어지고자 기를 쓰고 불로초를 찾고, 술 먹으면 다른 사람 옷자락에 구토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에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기에.

** 이 이야기는 수메르의 신화이며 수메르는 현재 이라크라 불리우는 곳이다. 수메르의 신화에 빚지고 있는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그곳에 폭탄을 퍼부었다. 슬프다.

** 4000년 전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의 소설인 것처럼 술술 읽을 수 있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피맺힌 노력이 있었다. 설형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많은 분들과 저자인 김산해 님께 감사한다. 아울러 이 책이 굉장히 읽기 쉽도록 편집되어 있으며 충분한 화보와 연표 등으로 먼 곳,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한층 가깝게 만들어 주었음을 언급해야 하겠다. 여러 분들의 노력으로 이런 좋은 책이 나왔는데, 왜 저자분은 인터뷰를 거절하셨는지,  뜻은 충분히 존경하나 솔직히 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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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8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5-02-28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고마워요^^
근데 이 책 안 어려워요. 그림도 많고, 얘기도 재밌고, 그 얘기에서 생각할 거리도 많고 말이에요.

로드무비 2005-02-28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라잉넛 갔다오고 또 이런 회심의 리뷰는 언제 쓰셨소?
깍두기님 글은 쉽게 읽혀서 좋아요.
그나저나 이 책 너무 비싸서 포기했는데 회가 동하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깍두기 2005-02-28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이 쉽게 읽히는 건 쉽게 밖에는 못쓰기 때문이 아닐까요?^^
간만에 심혈을 기울여서 리뷰를 썼는데 반응이 없어 너무 슬퍼하고 있었어요. 땡스여요^^

하얀마녀 2005-03-05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이상합니다. 페이퍼엔 댓글쓰기 쉬운데 왜 리뷰엔 댓글 쓰기가 어려울까... 잘 쓰셨습니다라고 밖에 쓸 말이 없어서일까요?

딸기 2005-03-1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