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인간은 이렇게도 욕망에 충실한 존재였다는 거지. 감독의 생각에 100퍼센트 동의할 맘은 없다만 그것이 인생의 한 단면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천사같은 얼굴과 천상의 목소리로 <문리버>를 부르는 이 소년이 신부에게 유린을 당할 때만 해도 나는 제목이 주는 이미지와 더불어 이 영화를 '천진한 어린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추악한 어른에 대한 고발' 정도의 메시지를 주는 작품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영화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남달랐다)
이야기는 점점 얽히고 설켜 영화에 나온 등장인물들은 모두 동시에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어간다. 신부도, 저 소년(이나시오)도, 그의 동생도, 이나시오가 사랑한 친구 엔리케도 모두 너무도 충실히 자신의 욕망만을 따라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신부는 추악한 욕망으로 이나시오의 삶을 분열시키고, 이나시오는 또 그런 신부의 약점을 잡아 한몫 잡으려 하고, 그의 동생(후안인가?)은 자기 형을 발판 삼아 성공에의 욕망을 채우려 하고, 엔리케는 또 그런 후안을 다 알면서도 자신의 침실로 끌어 들인다.
이들 모두가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왔던 신문기사처럼 "악어에게 잡아먹힐 줄 알면서도 스스로 뛰어들어 악어를 끌어안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악어에게 먹혀버리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보자니 속이 터질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 욕망 때문에 파멸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여 성공한다. 그래, 권선징악이니, 사필귀정이니 이런 건 없다 이거지. 슬프지만 권선징악 해피엔드로 끝나는 영화보다 이런 영화가 훨씬 설득력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현실인 게지.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이나시오와 극 중 극에 나오는 이나시오(그러니까 후안)에게 매혹을 느끼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한 줄기의 욕망이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