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박 영 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p.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