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구판절판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
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
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p.15쪽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p.33쪽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리는걸요
길 위에 피를 흘리고 다니지 마라
사람들은 네 피를 보고 발소리를 더 죽일 거다
알아요 이제 저는 불빛을 보고도 달려들지 않는걸요
자기 이빨 부딛치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p.61쪽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
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
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 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p.96-97쪽

우주로 날아가는 방 3

-찰흙놀이



김 경 주





구름은 몸 안에서 눈 녹는 소리를 듣고 있다

방 안에 스며든 바람이 조용히 말라간다

누이들은 짜놓은 연고처럼 바닥에 흘러 잔다

그 옆엔 찰흙으로 빚어놓은 가족들,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

찰흙의 눈들이 축축하게 굳어간다

불을 끄자 불빛이

자기 세계로 가만히 돌아간다

어둠 속에서 한 찰흙이 숟가락을 놓고 운다

한 찰흙이 다시 손에 숟가락을 쥐여준다

검은 눈물이 고개를 들어

창턱의 촉촉한 쥐똥을 바라본다

누이도 잠 속에 뜬 캄캄한 새떼를 보고 있는 건지

발가락이 구부러지고 있다

자신이라는 시차(時差)를 견디는 일이란다 꿈이란

우리가 한 이불 속에서 말라가는 일처럼

귓속이며 머리칼이며 눈에서 나는 흰 냄새 같은 것

얘들아 슬픔이 말라가면

교실에서도 손을 잡고 다니거라

햇볕에 몸이 쩍쩍 갈라질 때까지

그늘은 빛에 젖지 않는다


-p.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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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10-2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를 보면 늘 그 책이..읽고 싶어지는 씩씩하니..
또 마음,,,꽂혔지뭐에요...

비자림 2006-10-2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서 가슴에 꽂히는 시 한 편만 발견해도 즐거운데 다는 아니지만 김경주시가 여러 편 제 가슴에도 꽂혔어요. 참 아름다운 시들 만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