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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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
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
간임을

-p.14-15쪽

순정



비가 오고 마르는 동안 내 마음에 살이 붙다



마른 등뼈에 살이 붙다



잊어도 살 수 있을까 싶은 조밀한 그 자리에 꿈처럼 살
이 붙다



풍경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가 솟구치는 자리에 뭔지
모를 것이 끊어져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그 짐승 같은 시간들을 밀지 못해서 잡지 못해서


살이 붙어 흉이 많다 -p.90-91쪽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
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
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
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의,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 세 걸음 봄날은 간다


-p.102-103쪽


댓글(4) 먼댓글(1) 좋아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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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7-07-0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쓸한 보헤미안 같다, 그는.
여러 겹의 외투를 입은 언어를 만났다.
외투 사이 사이 한 사내가 건너가는 강물 냄새가 흐르고
바람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의 쓸쓸함을 부벼대는 억새들이
그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다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울고 있는 것 같다.


2007-07-07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자림 2007-07-0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만 보이시는 분, 님의 서재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