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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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했던 엄연하고 무거운 현실도,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져버립니다. 그 반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일도 일단 기록되어버리면 존재했던 것으로 착각되어요. 세월이 흘러 증언자들이 모두 늙어 죽어버리면 더욱 그렇죠. 기록은 기억의 확장이니까요. 우리는 기억을 믿듯이 기록을 믿어요. 결국 기록은 존재를 대신해요. 존재는, 기록이 남아 있는 그 범위까지만 유효성을 가지죠. 그렇기 때문에 영리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그 기록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에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p.8쪽

빗방울의 소멸은 참 쿨하기도 하지. 사람의 목숨도 투명한 셀로판테이프처럼 원하는 길이로 착착 끊어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사라질 때 집착이나 슬픔 따위 구질구질한 찌꺼기는 남기지 않고 물방울처럼 투명하게. 빗방울처럼 유쾌하게.-p.114쪽

섹스를 할 때 이진은 자신의 몸이 천 겹의 꽃잎을 가진 커다란 작약꽃과도 같다고 상상했다. 수없이 겹쳐지고 포개어진 그 화려한 꽃잎 사이의 어느 갈피에 까다로운 하얀 고양이가 숨어 있었다. 하얀 고양이가 어느 꽃잎 사이에 숨어 있을까. 가장 부드럽고 가장 섬세한 몸짓으로 한 장 한 장 꽃잎을 들추어가는 것이 그들의 섹스였다. 고양이는 한 곳에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녔다. 아주 조심스럽게 성깔을 부리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천겹의 꽃잎을 가진 작약은 갑자기 조명이 꺼진 듯 풀이 죽고 꽃잎을 내려버렸다. -p.163쪽

이현의 깊고 우아한 눈시울, 지구상에서 가장 달콤한 눈웃음을 담은 그 아름다운 눈시울이 이진의 앞에서 애태우고 목말라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뼈 안쪽의 몹시 깊숙하고 예민한 부분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금세 온몸의 뼈마디로 퍼져나가 나의 온몸을 지지고 달구고 부수었다. -p.258쪽

성공의 여부를 모르는 대로, 희망에 들떠 일단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요? 그러므로 육신과 정신의 고통을 이기고 이세 공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결심한 나의 이름은 기록될 가치가 있습니다. 나의 이름은 이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p.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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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2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반가워요.^^ 163쪽의 글이 어쩜 그리 좋은지요.
천겹의 꽃잎을 가진 작약, 그 속을 헤치고 다니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
성깔 부리고 까다로운... 그 고양이 한 마리 키우고 싶어져요. ㅎㅎ
건강하신 거지요? ^^

비자림 2007-05-26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씩씩하게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가 읽은 구절을 님이 읽으시니 저도 반갑네요^^ 배혜경님, 편안한 주말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