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기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031.


  소설의 존재 의의에 대한 글을 볼 때면 매번 가라타니 고진이 떠오른다. '문학은 이미 죽었다'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동시에 쭉정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프다. 마음과 영혼을 흔들 정도의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진즉에 잃었다는 것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한때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회고발적 소설은 단지 내용이 충격적이어서이지,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살아 있는 문학'이 가진 힘 때문은 아니다.


  데뷔작 <농담>부터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웃음과 망각에 관한 책>까지 숱한 소설을 써온 세계의 문호 밀란 쿤데라에게 소설이란 어떤 의미일까. 소설에 대한 에세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설가(카프카, 헤르만 브로흐 등) 평론, 자신의 소설론, 대담, 연설문으로 잘 짜인 <소설이 기술>에서 쿤데라는 여전히 소설의 힘을 믿는다. 기술의 발전속도만큼 세상은 빠르게 진화했다. 지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총체상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신을 망각하게 된다. 우리는 매스미디어와 함께 살지만 끝없이 증식하는 매스미디어와 달리 한없이 작아진다. 소설의 존재 이유가 우리를 '존재의 망각'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하다고, 쿤데라는 역설한다.


  <소설의 기술>은 쿤데라를 쿤데라를 새로 읽게 하는 힘을 가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물과 장(章)이 가진 약호나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몇 개의 단어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인물과 여러 개의 사건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면서 작가의 손에서 창작된 게 아닌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하는 실존적 약호로 탈바꿈한다. 테레자는 '현기증'이란 열쇠어가 있다. 이는 토마시와의 사랑에 지쳐 그녀의 원래 출신의 '저속한' 곳으로 돌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테레사와 쿤데라에게 현기증이란 피로에 지쳐 느껴지는 단순한 증상이 아닌,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고 그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하며 종말에는 땅바닥보다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으로 진화한다.


  쿤데라는 소설의 열쇠어뿐 아니라 다른 열쇠어도 소개한다. 다소 생소한 체크어(체코, 보헤미아 등의 모국어)로 쓰인 쿤데라의 소설은 타국어로 번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번역가들은 프랑스어 판을 놓고 중역을 하기도, 하나의 문단이었던 긴 문장을 짧게 조각내기도 했다. 이에 번역가들이 쿤데라에 대해 '고민'하도록 쓴 것이  쿤데라 자신의 열쇠어와 그가 좋아하는 단어들에 대한 사전이다. 쿤데라를 대표하는 '가벼움'이란 단어를,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공허의 무거운 가벼움을 느꼈다'고 표현하여 읽는 이를 묵상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존재 이유인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형식이다.


  <소설의 기술>의 한 축을 쿤데라와 그의 소설이 담당한다면 다른 한 축은 그가 존경하는 소설가들이다. 특히 <몽유병자들>의 헤르만 브로흐, <변신><성><소송>의 카프카를 각각 한 장에 배치하였다. 보로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에서 비합리적인 것이 맡는 역할에 대해 탐구한다. 카프카는 요제프 K에게 아무 이유 없이 벌을 줌으로써 벌이 잘못을 만드는 부조리함을 표현한다. 두 작가의 작품 모두 비합리적 체계를 다루면서 모든 행위의 바탕에는 혼동의 체계인 비합리적 체계가 한 사람이 아닌 정치적 생활까지도 지배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쿤데라의 소설이 사회주의 체제와 부조리함에 대한 풍자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아 앞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고 그들과 정신적 유대감이 강했으리라고 감히 추측할 수 있다.


  <소설의 기술>은 쿤데라에게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그를 새롭고 다르게 보여주는 반면, 그와 친해지기 위해 막 악수자세를 취하는 이들에겐 다소 소화하기 힘든 책이다. 쿤데라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글이 주는 지적 매력을 느꼈다면 반드시 펴볼 만하다. 쿤데라와 더불어 보로흐, 카프카도 함께 탐독한다면 <소설의 기술>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소설이 그려낸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30.


  올해 초부터 안 좋은 일이 겹겹이 생겼다. 멘붕도 이렇게 극심한 멘붕이 없다. 남을 챙기기는 커녕 나 하나 지키기도 벅차다. 회사, 취미, 진로, 애정, 다이어트, 친구, 선배, 후배. 당최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마리아나 해구보다 깊은 곳에서 허우적대며 언제 압력이 날 잡수나 기다리고만 있다. 이런 때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이하 한마디)를 만난 건,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다.


  요즘 자기계발과 힐링을 표방하는 책이 넘친다. 나긋나긋 말하는 멘토가 있는 반면 윽박지르며 큰 소리로 떠드는 멘토도 있다. 인생의 답뿐 아니라 자신의 고민마저 남이 해주는 시대에서 그들의 말을 들으며 성공한 사람이 다 옳고 이렇게 사는 나는 참 나쁘고 못됐구나 생각한다. 계속 자책하면 뭐 되는 게 있나? 사실 자기계발서의 답은 자기의 머리에 다 들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할 뿐이다. 힐링 부류도 이에 편승한다.


  <한마디>도 사실 힐링을 말한다. 정호승 시인의 전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나 이번 <한마디>나 힘들고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다. 힐링이 판치는 요즘 시대에 그저 그런 책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생각으로 보았다. 어디선가 다 들어본 말(모차르트가 되기보다 살리에리가 되라', 뻔한 말('나마의 속도에 충실하라', '진주조개도 진주를 품어야만 진주조개다'), 한눈에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이 많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판에 박힌 말만 한다. 다 거기서 거기고, 힘내라고 다독여준다. 산문집이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힐링이다.


  내가 고집하는 산문이나 수필의 기준은 확연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세상을 다르게 보거나, 문장이 너무 유려해 나도 모르게 노트에 문장을 옮겨 적거나. <한마디>는 두 기준에 못 미치지만 여타의 책(힐링책)과 달리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저자 정호승 시인 때문이다. 시집 <외로우니까 사랑이다>이나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소설 <모닥불> 등 걸출한 작품을 써왔던 시인은 산문을 참 편안히 쓴다. 자신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 어디서 들은 이야기, 책에서 본 이야기, 해주고픈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섞어낸다.


  그럴 듯한 말만 적어두고 알맹이가 없다면 그 책은 버려져야 마땅하다. 재밌는 건, 역설적이게도 <한마디> 안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조금은 다른데, <한마디>의 알맹이는 바로 읽는 이 자신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생각해라, 그렇게 하지 마라고 하는 책은 읽는 이의 삶이 아니라 글쓴 이의 삶을 답습하는 것뿐이다. <한마디>에는 문학, 구비동화, 신문기사, 신화 등 이야기가 많다. 그 이야기는 글쓴 이의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 자체에는 결말이 없다. 처음에는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도 곰곰히 씹다 보면 조금씩 이치에 맞게 된다. 그리고 그 이치는 오로지 읽는 이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명언과 격언을 살피면 모순되는 것들이 많다. 5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보면서 참 앞뒤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어쩜 당연할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모범답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믿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음을 향해 떠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류교실 1 세미콜론 코믹스
우메즈 카즈오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24, 025, 026.


  다쓰마카 쇼는 야마토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다. 말도 없이 자신의 서랍을 청소한 엄마와 다툰 다음 날, 쇼는 이런 집에 들어오기 싫다는 말을 남기고 뛰쳐나가듯이 등교한다. 1교시가 시작하려는 찰나, 학교는 굉음과 함께 흔들린다. 단순한 지진인줄 알았건만 웬걸, 교문 밖을 본 쇼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높은 건물과 슈퍼, 문방구 같이 익숙한 건물이 아닌 끝없는 사막만 펼쳐져 있다. 학생들은 불안해 하지만 아이들을 돌봐야 할 어른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학교 전체는 혼란에 빠진다. 주변을 탐색하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곳도 아닌 인류 멸망 후의 미래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밖에서는 괴물, 안에서는 파벌이라는 적을 만나는 아이들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살기 위해 끝없이 발버둥친다.


 근미래(인지 먼 미래인지는 모르겠다)를 그린 SF 만화이다. 약 2천 쪽을 끌고 가는 긴장감과 스릴은 대단하다. 처음 보는 괴기한 모습을 그리는 이토 준지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도처에 등장하는 괴물은 익숙한 듯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생김새로 공포감을 준다. (파벌이 주는 무자비함과 힘에 도취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비인간성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닮았다) 70년대 작품이어서 그런지 스토리 전개나 씬과 씬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고 툭툭 튀는 부분이 있다. 환경파괴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인류멸망이란 스토리는 다소 평이하고 중간 중간 설정에 무리가 있지만(학생의 망상이 만든 괴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수단) 크게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다.


  이 작품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설정이 주는 위화감이다. 작품이 연재되던 70년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그것이 가저다줄 밝은 미래를 기대했다. 우메즈 카즈오는 이런 기대를 져버리고 어두운 미래의 단편을 그린다. 희망을 말해줘도 벅찬 때에 말이다. 한참 기술과 발전을 외치던 정부는 어쩌면, 이 작품을 금지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발표된 지 40년이 된 <표류교실>은 그때보다 기술이 더 발전한 지금에도 경고의 메세지를 전한다. 원자력이 가장 안전한 에너지라 외쳤지만 실상은 평생을 가도 사라지지 않을 위험을 가진 화약고와 같은 존재였다. 해마다 백년만의 가뭄, 폭우, 폭설 등 이상기변은 계속된다. 타지 않는 쓰레기는 땅에 매립하고(생명이 남지 않은 사막에 모양새를 온전히 유지한 조화(造花)를 보고 어찌나 헛웃음이 나던지!) 바다에 버린다.


  헛똑똑이들이 머리로만 생각한대로 세상이 돌아가면서 이상해지는 건 아닐까 싶다. 조금은 급하게 보이는 결말부는 일말의 희망이 보이지만 급한만큼 불안하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끝을 낸 듯 보인다. 다쓰마카 쇼와 엄마의 긴 연서(만화를 기반으로 한 일본 드라마의 제목이 '롱 러브레터: 표류교실'이다)는 너무나도 절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김진송 지음 / 난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13.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세이분야) 활동의 차원에서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이다. 평가단은 전 달에 출간된 책 몇 권을 고르고, 알라딘 측에선 그걸 취합해 두 권의 책을 제공한다. 평가단을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났는데, 내가 택한 책이 모두 선택된 건 첫번째 달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이하 '이야기')는 내 선택지에 없던 책이다. 각종 인터넷 카페에서 진행되는 서평단 등의 활동을 관둔 건, 그저 '공짜'를 바라고 관심도 없는 책을 억지로 읽고 맘에도 없는 감상을 써내려가는 데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표지와 제목을 보고 책을 고른다. 나도 제목에 혹해 <이야기>를 1차 후보군에 넣었다.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선 '이야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의 가장 큰 미덕(?)인 미리보기를 누른 순간 바로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한두 페이지를 가득 메운 인형 사진과 스케치, 짤막한 토막글이 보였다. <끌림>(이병률)의 느낌도 났지만 인형의 이미지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다.


  이때문에 1월의 신간에세이로 <이야기>가 선정됐을 땐 적잖이 실망했다.(12월에 출간된 에세이 중 읽고 싶은 게 많았다) 인형과 글로 어줍잖은 감성팔이나 하겠구나, 지레짐작하고 대충 거들떠보려 했다. 사실 초반 몇 이야기는 그랬다. 인터넷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이미지와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읽으면서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비밀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매번 달라졌습니다.

  아니 사건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사건은 매번 똑같았지만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언제나 달라졌지요. 말하자면 그 집은 끔찍한 사건을 상상하는 사람들에게만 끔찍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바로 당신이 지금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_'비밀의 집', 63쪽


  이 이야기의 이미지는 육각면체의 벽돌집이다. 그 위엔 사람이 하나 앉아 있고, 집 안에는 해골이 누운 관과 밖을 빼꼼히 쳐다보는 유령이 있다. 집 아래에는 이 인형들을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들이 있다. 무언가 그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물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사물을 보는 사람인 나다. 길거리는 다 큰 어른에게는 그냥 길거리일 뿐이지만 눈이 반짝이는 아이들에게는 모험을 떠나는 여행길이다. 사물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든다. 찰나의 틈바구니에서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읽는 맛이란 얼마나 달콤한지!


  <이야기>에서 인용한 장 그노스의 '암흑의 신 페트롤리우무스의 전설'은 매우 재밌는 텍스트다. 석유를 비유한 암흑의 신 페트롤리우무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도 적절히 어우러졌다.(원 텍스트인 <인간과 사물의 기원>을 장바구니에 넣는 계기가 되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아내의 꿈>은, 비록 오래된 클리셰지만 흥미롭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인 '개와 의자 이야기'는 그 자체로 뛰어난 단편소설이다. 인간과 개, 의자의 관계, 외형적 닮음에 대한 글인데 꽤나 통찰력 있다.


  의자가 독립적이면 독립적일수록 인간은 오히려 의자에게 의지하려 들었다. 인간의 움직임은 조금씩 둔화되었고 점점 더 한 곳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많아졌다. 그게 새로 발견된 인간의 습성이었다.

  인간은 의자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개에게 의존하는 일이 많아졌다. 개가 진간에게 충성할수록 그리고 인간이 개에게 의존할수록 어찌된 일인지 개의 자유는 점점 줄어들었다. 개는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고 불만은 없었다.

  인간은  늑대의 후손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어 친구라고 부르는 대신 원래 자신과 똑같은 특성을 지닌 늑대에게는 악마의 탈을 씌워 박멸해버렸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친구를 만든다.

_'개와 의자 이야기' 중, 276쪽


  <이야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엽편소설집이고, 상상력의 보고이며, 사물을 다르게 보여주는 책이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의외의 곳에서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자명한 원칙을 알려준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지음, 전행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사람이 호평을 했다고 그 책이 모두에게 재밌고 감명깊은 책은 아니다. 일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 몇 분은 내 생각에 동조해줬다. 남들이 좋다고 칭하는 책에 반대하는 글이라도 올라오면, 혹여나 욕을 먹을 수 있어 그게 겁나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감추는 건 독자에게도, 저자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모든 사람은 주관적이니 말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 아닌 이런 잡담을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기는 했다. 다섯 꼭지 정도였나. 웬만하면 독서를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데,도무지 읽기를 참기 힘들어서 책을 덮고 책장에 꽂았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책을 건네주었는데, 친구의 삶엔 어떤 울림을 줬을까 궁금하다.(한편으론 남들이 받았을 감동 때문에 분하기도, 부럽기도 하다)


편집장인 윌 슈발브와 투병 중인 그의 어머니가, 단 둘만의 북클럽에서 약 2년 동안 책에 대해 말한 모든 이야기를 쓴 책이다. 가족과 주변 인물의 일상과 과거, 현재를 바탕으로 책에 대해 저자와 어머니의 의견, 토론, 추억이 함께한다.


책은 예정된 이별의 아픔을 책과 그 관계에 대해 대화하면서 조금씩 삭혀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픔극복과 책은 매력적인 소재이나 둘 사이를 끈끈히 묶는 데 조금은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작년에 읽은 <혼자 책 읽는 시간>(니나 상코비치)와 비슷한 느낌이다. 소설보다 재밌는 게 우리네 진짜 인생이라지만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이야기는 영 매력적이지가 못했다. 에세이는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콕콕 박히거나, 일상의 작은 편린을 너무나도 멋있게 보여주거나, 영혼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별과 슬픔이라는 상처를 독서로써 메꾸는 과정을 그린 이 책은, 그 어느 부류에도 들지 못했다. 이야기도 다소 중구난방이고.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 차라리 딱딱한 서평을 보는 게 재밌을 성싶다.


영 쀨(feel)이 오지 않은 책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들었다 얼마 못 보고 내려놓은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