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할 때부터 느꼈지만 이놈의 회사는 직원들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다. 책과 영화를 시간이 남아도는 이들만의 취미로 전락시켰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매일 야근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달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겨울휴가 기간에 가족과 특별한 추억을 만들라는 문구가 쓰인 카드를 화장실 소변기 위에 자랑스럽게 걸어 놓은 것부터 어이가 없다. 과격하게 말하면, 역겨울 따름이다. 소중한 이들과의 추억은 휴가 때만 만들라는 무언의 주문처럼 읽힌다.


  덕분에 사람들의 취미는 줄어만 간다. 온전히 자신에게 쓸 시간이 모자르니 순간의 흥미를 위한 취미가 대부분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회사에서 지내는 시간에 길들여진 우리는  휴식이 주어져도 뭘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것이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남들을 따라하고 말초적인 재미를 끊임없이 찾는다.


  나도 점점 이렇게 변해갔다. 회사 입구를 들어간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매일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자리에 앉아 퇴근시간만 기다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낸다. 군 제대 후 쭉 이어오던 1년에 책 100권 읽기는 입사 2년차에 벌써 무너졌다. 올해는 30권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추천할만한 책도 없는, 비루한 기록만 남았다.


  회사와 관련 없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독학의 의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교과서와 함께 싸그리 날려버렸으니 어디서 배우기라도 해야 할텐데 시간을 내기 어렵다. 24시간 계속 가동해야 하는 공장 특성상 교대근무는 필수여서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강좌를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평일 강좌는 언감생심이다. 주말마저도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심지어 1년 반 동안 회사에서 소속이 5번 바뀌었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에게 짧은 기간에 이런 변화는 큰 스트레스였다. 변화도 변화지만, 내가 빠져도 이전 부서는 특별할 거 없이 잘만 돌아가는 것도 슬프다. 대기업 직원은 하나의 부품에 불과하다는 말은 전부터 수도없이 들었지만 이렇게 뼈저리게 다가올줄은 누가 상상했으랴. 게다가 옮긴 부서는 업무가 많아 퇴근시간도 늦으니, 가뜩이나 부족했던 내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여러 생각이 겹치니 자연스레 퇴사가 머리에 맴돌았다. 그래, 감옥 같은 회사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찾아 모험을 하는거지. 퇴사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예전과 현격히 달라졌다. 심지어 퇴사가 요새 트렌드라는 말까지 나온다. 같이 부서 이동한 사람들, 다른 부서로 간 사람들, 각자 부서에서 꾸준히 일해오던 친구들과 퇴사를 얘기해보았다.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출근도장을 찍는 느낌을 준다. 요새 취직이 그렇게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직장인들이 안 힘든 건 아니다.


  회사를 나가면 뭘 할까. 6개월 정도는 그동안 못가본 여행을 떠나야지. 타지에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자유를 만끽하자. 여행에서 돌아와 당분간은 취업 생각은 접어두고 치열하게 살지 말자. 아침햇살을 쬐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자고, 잠에서 깨면 다시 책을 읽자. 꾸준히 글쓰기도 연습해서 나만의 작업물을 만들어야지. 인문학 강좌도 들으면서 나를 바꿔가야겠어.


  올해 보너스만 받고 정말 나간자고 생각했다. 허나 퇴사를 한번도 하지 않은 나라도 현실의 벽이 녹록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당장은 돈이 있더라도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취업을 해야 하는데, 애초에 좋아하는 걸 하려고 나왔던 회사를 돈을 벌기 위해 다시 들어가는 모순이 생긴다. 현실은 언제나 꿈을 압도한다.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서 헤쳐나갈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좋은 직장이 있다고 한들 그 회사에서 뭘 보고 나를 채용할까? 회사에서 나가면 나를 써줄 곳이 없다고 매번 한탄했는데, 그건 내게 강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이다. 미련하게도 그런 강점을 얻기 위해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일이 힘들다, 회사의 톱니바퀴로 일하는 느낌이 들어 괴롭다, 이런 푸념은 제 얼굴에 침뱉기나 마찬가지다.


  월말에 따박따박 입금되는 월급에 만족이 드는 순간 깨달았다. 웬만한 용기 아니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용기는 없다.


  냉정히 생각해 퇴사는 무리다. 돈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돈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여태까지의 삶이 있기에 쉬이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일까. 내린 결론은 결국 자기계발뿐이었다. 예전에는 자기계발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이제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있다. 인생은 아이러니의 집합체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것을 꼽았다. 책 읽기와 글쓰기. 두 가지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여러 고민을 했다. 책은, 지금까지 흥미 위주로 읽었다면 조금 무겁게 읽으려고 한다. 재작년부터 읽겠다고 한 <안나 카레니나>를, 책을 산 지 무려 4년만에 책상에 꺼내두었다. 많이 읽기에 중점을 두었던 독서에서 적게 읽더라도 울림을 주는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겠다.


  글쓰기는 우선 매일 쓰기부터 연습하고 있다. 나로서는 기특하게 3주째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이 글도 그동안 쓴 일기의 조합이다. 쓰다보니 괜스레 무게잡는 이야기가 많아졌지만 말이다) 1월에는 온라인 서평 쓰기 수업을, 2월부터는 100일 쓰기 수업을 듣는다. 그동안은 발췌문으로 가득한 독후감을 써와서 내 글이 없었다. 글쓰기 근육을 조금씩 늘려 2017년에는 나를 대표할 수 있는 글을 하나 쓰고 싶다.


  혼자 공부하는 건 조금 힘들기도 해서 아예 타의로 공부할 방안을 마련했다. 경희사이버대 에 입학 원서를 넣었다. 학부는 후마니타스, 전공은 인문고전이다. 업무와 정반대로 동떨어진 공부다. 그러나 하고 싶은 공부가 인문학이기에 딱 하루 고민했다. 대학을 졸업했기에 3학년 편입이 가능했지만 과감하게 신입학을 선택했다. 무려 4년의 대학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회사생활과 병행하기 어렵다는 건 알지만 용기가 없는 나에게 현실과 이상의 최상의 절충안이다.


  이 계획들은 흔히 말하는 성공과 대박을 위한 자기계발이 아니다. 나를 더 잘 알기 위한 마음의 수양이다. 더불어 다른 이들을 알고 싶은 욕망도 있다. 인간의 학문이라는 인문학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1달, 100일, 4년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 끝이 큰 성공이 아니어도 좋다. 전환점을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열차게 빛날 순간임을 알기에.



* 자기계발서는 <리딩으로 리드하라> 이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무려 두 권이나 샀다. 장족의 발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2-31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손잡이 2016-12-31 22:18   좋아요 0 | URL
양손잡이입니다!!! ㅎㅎㅎ
예전 글을 읽어보니 되게 그럴 듯한 거예요. 그런데 발췌문이 6~70%이어서 이게 제 감상을 쓴 건지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옮긴 건지 영 모르겠더라구요 ㅠ 겉으로는 그럴싸한데 제 생각이 없었다랄까요? 그 비율을 잘 맞추려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발췌문 정리도 잘 해놔야겠지요... 흑흑 제 읽기 습관을 바꿀 때가 된 것 같아요.
덧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스포 조심)

오늘은 출근할 때 어떤 책을 들고 갈까, 어제 빌린 책 다섯 권 중 <은하영웅전설> 8권을 잠깐 꺼내들었다. 뒷 내용이 어떨까 너무 궁금해서 가장 마지막 장을 잠깐 펴봤는데 오마이갓. 상상도 못한 인물의 죽음이라니. 이건 마치 <얼음과 불의 노래> 3부를 읽기 전에 가문 소개를 읽었는데 2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미리 본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아, 쓰바시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일찍(9 30분으로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일어나 졸음을 이기고 기숙사를 나섰다. 오후 시부터 근무 시작인 이번 주는 오전 아니면 도서관에 들를 방법이 없다. 날이 생각보다 춥지 않아 가뿐한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전에 빌린 결국 권밖에 읽지 못했다. <은하영웅전설> 7, <반지의 제왕> 1. <필경사 바틀비>, 소설 말고 다른 분야를 읽어 보고자 들였던 <예술수업> 채사장의 신간 <열한 계단> 밀려 침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오늘은 권만 빌릴 예정이었다. <은하영웅전설> 8, <반지의 제왕> 2, 저번에 계약한 <글쓰기의 최전선>. 그러나 <반지의 제왕> 누군가가 2~4권을 모두 빌려 상태였다. 1권까지 예약해둔 보니 동안 <반지의 제왕> 초토화시킬 작정이었나 보다.


  달랑 그것만 가져오기는 뭔가 아쉬워서사실 읽기도 벅차다는 알지만 - 다른 책을 찾아 주변 서가를 둘러봤다. 은영전 주변 일본 소설이 눈에 띄었다. 미야베 미유키, 미치오 슈스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등등, 많이 읽어 보지는 못해서 좋아한다고는 못하지만 선호하는 작가들의 책이 많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리 히로시 <모든 것이 F 된다> 들었다. 대학시절 작가의 팬인 친구에게 뻔질나게 추천받은 책이다. <열한 계단> 읽는 동안 순수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기에 책을 번에 들었다.


  앞서 글쓰기에 대한 책을 빌려 쓰니 반대급부로 읽기에 대한 책을 찾았다. 책은 이전에 ! 해둔 <이젠, 함께 읽기다>.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었던 <서평 글쓰기 특강> 저자이자 서평 선생님이 뻔했던 김민영 작가가 공정한 책이다. 이번에 숭례문학당 김민영 작가의 온라인 서평 수업을 듣는 기념으로 빌렸다. 혼자 책들이 읽는 익숙하기에 함께 읽고 토론하는 독서 토론이 매우 궁금했다.


  책과 독서의 관한 책이 꽂힌 서가에는 맘에 드는 책들이 매우 많았다. 고르고 골라 마지막 권으로 가장 얇은 <책이 많습니다> 골랐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은 윤성근 씨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책이다. 유명인이나 똑똑한 학자의 서가가 아닌 다소 일반인의 서재를 조명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걸로 의도치 않게 -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충동적으로 대출 한도인 다섯 권을 채웠다. 주에 권도 읽기 힘든 나로서는 책들이 기숙사와 도서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힘들게 짐이 되는 느낌이다. 크헝헝.


  그러고보니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도서관 방문이 되었다. 독서기록을 보니, 올해 도대체 건가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제 <얼음과 불의 노래>(이하 얼불노)는 누구나 안다. 처음 소개됐을 때처럼 마이너한 소설도 아니고, 판타지라는 이름 아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펼치는 소설도 아니다. HBO에서 정말 멋진 판타지 드라마로 탈바꿈시켰다. 원작의 제목인 '얼음과 불의 노래'보다 오히려 드라마 제목인 '왕좌의 게임'이 더 유명하다.


  얼불노가 국내 출간 20주년을 맞이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표지가 원서의 멋들어진 그것으로 바뀌었고, 번역자가 바뀌었다. 번역자가 바뀐 게 왜 중요하느냐. 나처럼 번역본으로만 읽은 사람들은 의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4부(기선정 역)의 번역이 완전 개똥이어서 3부까지 번역을 맡았던 서계인 씨가 다시 펜을 잡아 나온 번역판을 환영했다. 하지만 서계인 씨가 번역한 여태까지의 내용도 엉망이었다니, 놀랄 노자다. (나무위키 참고)


  처음 저 문서를 봤을 때 정말 놀랐다. 그렇게 재밌게 읽었던 작품이었는데 원작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읽고 있었다니. 가장 충격적인 건, 1부 초반에 자이메(제이미)가 브랜을 창문에서 밀어버리는 장면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읽었던 번역판에서 자이메는 '난 이런 일이 너무 재미있어(위키 참고)'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서는 'The things I do for love'이다. 사랑을 위해서 하는 일들, 대충 이렇게 번역된다. 번역자는 저 한 마디로 자이메를 개쓰레기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버렸다. 이외에도 많은 오역들이 있는데, 위키에서 이 내용들만 읽어도 하루 반나절은 걸릴 것 같다. 읽다 보면 내가 정말 같은 책을 읽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번역서보다 차라리 원서를 읽으세요, 라고 인터넷에서 많이들 말해주었다. 2009년, 상병 시절에 집에 부탁해 얼불노 원서 1권을 부대에 들여왔다. 연등 시간을 이용해 하루에 한 챕터, 아니 열 쪽씩... 그렇게 한 100쪽을 읽다 지쳐버렸다. 결국 얼불노는 덮고 해리포터를 폈다.(그나마 해리포터도 2권 중간에서 멈췄다) 2012년에 얼불노 5부 <드래곤의 춤>이 막 발간되었을 때도 원서를 욕심냈다. 이번엔 제대로 시작해보고자 다섯 권의 페이퍼백을 모아둔 세트를 주문했다. 이 세트는 몇 주 뒤 모니터 받침이 된다.


  총 7부로 기획된 이 장편소설을 결국 읽기는 해야 했다. 예전부터 읽어온 시리즈기 때문이다. 2013년 5부가 막 나왔을 때 앞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침 크레마 샤인을 사서 이번엔 전자책을 샀다. 2부까지는 어찌어찌 넘겼는데 3부부터는 답이 안 나와 결국 때려치웠다.


  그리고 올해 다시 읽는 중이다. 5월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이다. 올해 책이 잘 안 읽히는 건,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얼불노가 원인이라 생각한다.


  2007년에 처음 얼불노를 접했다. 무려 4권짜리의 긴 이야기였지만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1부의 충격적인 사건(주인공인 줄 알았던 인물의 목숨이 뎅강-)은 지금 읽어도 어안이 벙벙하다. 아니, 1부가 왜 4권이냐고? 구판으로 양장본 두 권이 아니라?


  아니, 처음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얼불노는 이런 책이었다. 반양장으로 4권짜리 시리즈고, 구판의 구판으로는 2부까지 번역되었다. 맞다. 나 이거 팬 부심 부리는 거다. 엣헴.


  군대 전역 후 한 달만에 4부 까마귀의 향연까지 모두 본 기록이 있다. 다시 읽어도 재밌는 소설. 복학하기 전 잉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불어준 소설. 다 합해서 만 쪽 정도 되는 분량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정말 웨스테로스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불노가 드라마화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학생 시절 신문에서 <반지전쟁>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 기뻤다. 이 방대한 양의 서사시를 어떻게 티비 안에다 녹일까? 독자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표현될까? 아더는? 드래곤은? 에다드 스타크 역의 션 빈을 보고 아, 정말 캐스팅 한번 잘했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그렇게 얼불노는 전파를 탔고,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게 된다. 막 드라마가 나올 때 한 친구에게, 얼불노 드라마가 나오니 원작도 읽어봐라, 웅대한 서사시의 에픽 판타지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판타지라는 단어에 기겁을 하며 자기는 그런 책은 안 읽는다고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판타지가 아닌데, 주인공이 검기로 몇 만의 병사를 쓸어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물론 이 친구는 나중에 얼불노(드라마)의 광팬이 되었다.


  난 유행에 잘 반응하지만 그러지 않은 척하는 약간 이상한 성격을 가졌기에, 드라마 1부가 끝나고 나서야 챙겨봤다. 헌데 게임을 하면서 옆에 드라마를 켜놔서 그런지, 영 재미가 없다. 이미 소설에서 본 내용이라 이야기는 충격적이지 않고, 눈은 게임 화면을 보느라 아름다운 영상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드라마 얼불노를 멀리 보내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나중에 집을 얻으면 가장 먼저 얼불노 블루레이 세트를 살 거다.


  번역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잡담이 길었다. 이번 번역자는 이수현 씨로, F/SF 쪽에서는 알아주는 번역자라고 한다. 단어를 잘못 쓰거나 문장이 아예 바뀌고 내용이 통째로 빠지거나 인물을 완전히 잘못 묘사한 구작과는 달리 깔끔한 번역이라고 한다. 다만 몇 장을 읽어보니 문장이 조금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원작의 어조를 최대한 살려서일까? 또한 익숙한 영어 단어들이 한글로 번역됐다. 구판으로 시작한 나에게 너무 어색한 부분이다. 마치 빌보 배긴스를 골목쟁이네 빌보로 읽었을 때와 같달까.


  결과적으로 원작 훼손 수준인 구판과 비교하면 아주 양호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다만 똑같은 출판사(은행나무), 원서 한 권이 번역본 두 권으로 되면서 가격이 배가 된 점, 20주년 개정판이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음에도 반양장으로 나온 점들이 지적받고 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원작을 읽지 못했던 나에겐 구작이라도 감지덕지였는데, 이번 개정판이 아주 기대가 된다. 이제 1부가 출간되었고 2부는 2017년 5월 출간 예정이란다. 그렇다면 3부는 2018년이라는 소리다. 으어어... 너무 멀다. 지금 2부 후반부를 읽는 중이고 곧 3부로 넘어갈 예정인 나에겐 이 소식은, 그냥 울며 겨자먹기로 지금의 번역을 쭉 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동안 영어 실력이 확 느는 것도 아니고. 고민이다. 차라리 영어 공부를 할까? 그런데 난 해리포터도 못 읽잖아. 나는 안될 거야 아마.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7-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국내에 번역된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지 않았어요. 집중력이 딸려서 시리즈 완독을 하지 못해요. ^^

양손잡이 2016-07-20 22:27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못 읽었어요ㅠㅠ 6부부터 몰입이 안되더라구요... 죽기 전에는 읽어야겠됴 ㅎㅎ

별이랑 2016-07-2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판을 까마귀~ 까지 소장하고 있어서 개정판은 패쓰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저리 극단적으로 뒤바뀌는 번역인줄 몰랐어요. 세상에나.....
저 역시 이상한 번역 말고 제대로된 글 읽고 싶네요.
양손잡이 님,
구판을 이미 읽어보셨다니, 혹시 개정판을 다시 읽으신다면 꼭 비교 리뷰 부탁드려요.

양손잡이 2016-07-20 22:29   좋아요 0 | URL
이제 1부밖에 번역이 안돼서 고민 중이에요. 이제 곧 3부로 넘어가야 하는데 ㅠㅠ

Bakzze 2017-01-2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왕들의 전쟁도 개정판이 나오는군요!!! 늦게!!! ㅎㅎㅎ 잘 봤습니다!

양손잡이 2017-01-27 19:36   좋아요 0 | URL
네 늦게 ㅠㅠ 아예 한번에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아쉽습니다. 까마귀의 항연 나오면 1부부터 차례대로 구매하려고 합니다 ㅎㅎ
 

012.

0. 기대보다 너무 실망스럽게 다가온 책이어서, 이 실망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1. 분명히 읽은 기록은 있으나 기억에는 없는 책이다. 5년 전인 대학교 졸업반 시절에 읽었다. 책 표지도 기억난다. 한참 독후감을 남기던 때에 글씨 한 자도 남기지 않았다.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데 왜 머리에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 세상이 훤희 뜨이는 느낌을 받을까?

2. 5년 동안 다시 읽은 책이 딱 세 권 있다. <화성 연대기>는 감상은 없지만 두번 모두 너무나 재밌고 감명깊게 읽었다. 두번째 감상이 더 장황했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도 좋았다. 웬만하면 재독을 하지 않는 가벼운 독자인 나에게 여러번 읽는 책은 뜻깊었다. <앵무새 죽이기>만 빼고.

3. 사회적 소수자를 어린이의 천진한 시점에서 따듯하게 그린 이야기...인데, 이미 이런 주제로 쓰인 책이 많이 나왔다. 소설이라는 특징상 주제가 우회적으로 드러나지만, 역사나 논픽션을 통해 다뤄지는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고 인상깊다.

4.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만 파악하는 게 아닌, 소설이 쓰였던 시간, 공간 배경을 함께 읽어야 진짜 읽기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책을 재미없게 읽은 이유는 소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이다.

5. 소설을 통틀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역시 제목이다. 왜 <앵무새 죽이기>인가? 소설 중간을 보면 언뜻 힌트가 보인다.

젬과 스카웃은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가 사냥총을 주면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앞서 맞힐 수 있다면 쏘고 싶은 만큼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고 한다. 아이들은 모디 아줌마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앵무새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소수의 차별 받는 이들도 남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기에 미워할 필요가 없다, 는 도식일까? 어치새와 앵무새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위 글귀만 봐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지 안 끼치는지다. 그럼 이 기준은 결국 인간이 만든 게 되고, 같은 맥락으로 사람을 가르는 기준도 누군가 만들고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책의 주제가 소외된 소수인을 향한 아름다운 시선이라고 한다면, 그외의 이들은 - 가령 폭력적인 범죄자는 어떤 기준으로 봐야 할까. 그들은 어치새인가, 앵무새인가?

6. 역시 텍스트를 해석하는 능력이 달리면 이모양이 된다. 여러분 공부하세요...

7. 젬은,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그냥 사람들만 있다는 스카웃의 말에, 사람들끼리 서로 비슷하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거냐고 반문한다. 자기도 네 나이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면서. 젬은 과거의 이상적인 생각이, 나이를 먹고보니 틀리다고 말하는 셈이다. 젬은 아버지가 흑인을 변호하는 일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톰 로빈슨이 석연치않은 유죄선고를 받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젬이 저런 말을 하다니. 현실을 알았기에 더욱 노력해서 편견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럴수밖에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뜻?

8. 책을 덮은 후 느낀 실망감은, 책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 공부와 생각 많이 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