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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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201901)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 (한겨레출판, 2003)

한국 남자 소설가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단언코 박민규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형식의 <카스테라>부터 시작해 찌질한 사랑 이야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감히(!) 미국을 비판한 <지구영웅전설>, 단편집 <더블>까지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집도 2010년에 박민규가 대상을 타고나서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그와중에 읽지 못한 책이 있었으니, 이번에 읽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삼미’)이다.

책 첫 장을 펴자마자 박민규 특유의 이야기꾼의 재담 같은, 한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사다난한 1982년을 이야기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전세계의 온갖 사건 사고를 읽으며 꽤나 즐거웠다. <삼미>가 2003년에 출간된 책이어서 작가 특유의 문장과 표현방식이 이제 한물 간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왕년에 좋아하던 작가의 다다다다 쏟아붓는 수다가 반가웠다.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수식어( ‘아쉽게도’ 전대통령은 아프리카 4개국과 캐나다 순방을 마친 후, 무사히 귀국한다 _11쪽)는, 역시 박민규 이꼬르 위트라는 공식을 머리에 떠오르게 만든다.

감히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보자면,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탄생한다. 인천 시민의 온갖 기대를 받으며 시즌이 시작했건만 온갖 기록은 다 세우며 6개 팀 중 6위를 기록한다. 다음 해에는 엄청난 선전을 해 2위로 시즌을 마감하지만,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갱신하는 등 대체 프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많은 팬들이 등을 돌렸고 소설의 주인공도 야구에 관심을 끊고 대학에 입학하고 회사에 취업한다. 사회의 온갖 짐에 짖눌려가던 나에게 어릴적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하던 조성훈이 찾아와 이미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 팀의,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인 것이다.

범인인 내가 과거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이었다면 돈 받고 그것밖에 못하냐며 온갖 쌍욕을 다했을텐데 박민규는 특유의 상상력과 시선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책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처럼 야구 이야기가 메인일줄 알았건만 왠걸, <삼미>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그 안에서 좌절하는 우리네의 모습을 그린다.

작가에 의하면 야구가 처음 프로리그를 출범하면서 사회에는 프로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로라는 새로운 세계와 가치관, 의미가 생기고 프로복음이라는 것까지 설파한다.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와 같이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문장들이 프로복음에 속해 있다(77, 78쪽). 모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 위에 서서, 사회가 인정하는 프로쪽으로 발돋움을 하려고 노력한다. 지옥철에 몸을 실고 야근을 하고 퇴근 후에 학원을 찾는다.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IMF 같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온몸 받쳐 열심히 살아도 결국 사회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만다. 프로의 세계에서 평범한 삶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삶은 몇 위일까? 순위는 커녕 프로팀에서 바로 방출당할 것이고, 삶으로 치면 죽음인 셈이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봐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는다. 허리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126, 127쪽). 사회의 모두가 프로가 되기를 원하는 곳에서 어설픈 아마추어에게 주어진 것은 결국 죽음인 것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우리도 마냥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길들여왔을지도 모른다.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와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은 산업혁명시대에 착실한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제도가 시발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알게 모르게 제도와 시스템에 길들여져 근면과 성실이 최고의 가치인줄 알고 쉬지 않고, 쉴 줄 모르고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262쪽).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수록 훌륭한 사원으로 꼽히는 것마냥 말이다.

자본주의와 프로의식에 삐딱한 시선을 보이는 작가의 의도는 꽤나 좋았지만, 그가 풀어낸 뒷 이야기와 결말은 다소 아쉽다. IMF 시대를 겪은 주인공은 아내와 재결합해 돈도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조성훈은 프라모델 도색으로 장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얼른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어려운 때에 낭만적으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충분히 희망적으로 봐도 될법하지만 이렇게 삐뚜름하게 쳐다보는 건, 과연, 내가 프로 ‘프로인 척하는 아마추어’여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도 좋다. 절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캐치볼을 하다가 공을 잡지 않고 거대하고 광할한 파란 하늘을 쳐다보기만 해도 좋다. 2루타성 타구를 잡으러 갔다가 땅에 핀 노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 멍하니 쳐다보아도 좋다. 박민규 식으로 말하자면, 진짜 인생은 삼천포로 빠져야 만날 수 있는 것이고, 프로의 세계에서 이길 수는 없어도 삼천포에서는 무얼 해도 좋을 것 같으니까. 비록, 지금 삼천포는 사라졌지만, 그럼 어디로 갈까요, 칠천포는 어떨까요.

여담. 박민규 하면 톡톡 튀는 문체가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위트있는 표현(한 게임 한 게임 그것은 분명 평범한 패배가 아니었고, 뭔가 야구의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의 패배였고, 우주의 역행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는, 그런 느낌의 패배였다. _63쪽)과 섬세한 묘사(창을 건너온 봄볕이 - 따끔따끔, 내 등에 스킬 자수를 놓듯 두 가닥의 햇살을 피부 속에 심었다 매듭을 지어 뽑아 올리고 있었다. _113쪽)도 꽤나 있었다. 마초 작가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의외다.

여담 2. 위에서 썼듯이 마초 작가(…)여서인지 일부 설정과 이야기, 묘사가 거북할 수 있으나 2003년 당시의 시대를 감안해야 하겠다. 작가에 대한 비호가 아니라, 소설과 시대상을 완전히 분리해서 해석하는 것은 제대로 된 소설 읽기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해당하는 부분이 소설의 주 이미지라면 안되겠지만, 다행히 <삼미>는 이를 피해갔다.

여담 3. 가장 아쉬운 점인데, 이 작품은 표절 논란이 있었고 작가는 사과했다. 논란이 있었을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읽고서 작가가 표절했다는 글을 찾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위트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원글에서 몇 보였다. 작가가 잘못을 시인했으니, 게다가 몇 안되는 애정하는 작가니까… 참작해주자… 하다가도 괘씸한 마음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여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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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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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독후감을 쓰기 쉬운 책이 있다. 내용이 너무 엉망이면 실컷 욕을 하고(<언어의 온도>,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어중간하게 마음에 들면(<열두 발자국>,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소감도 어중간하게 쓰면 된다. 반면에 마음을 강하게 흔들면 소감을 적기가 어렵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크기 떄문이다. 발췌문만 잔뜩 가져오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좋다, 좋다, 고만 하는 소감을 싫어하지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하 슬픔)은 아쉽게도 좋다, 좋다, 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책이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신작이다.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원고를 추렸다고 한다.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이어 두번째 읽은 신형철의 책인데, 앞선 두 권(<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에 비하면 이 두 권은 일기 정말정말정말 쉬운 편이었다. 초기 두 권은 읽다가 덮어버렸으니 말 다했지.

한 리뷰어는 신형철의 글이 이전보다 문제의식이 얕아지고 글의 길이가 줄었다고 말했는데, 나름 수긍이 가기도 한다. 초기보다 더 대중친화적이지만 나쁘지 않다. 이게 신형철식 진화가 아닐까. 저 같은 무지랭이에게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드립니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감히 평을 할 수 없다. 제목처럼 책은 대체적으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골자로 삼았다. <정확한 사회의 실험>에서 보지 못한 사회에 대한 글 - 진보와 보수, 박 전 대통령 탄핵, 혐오사회, 국가주의 - 은 신형철이라는 사람을 조금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아내의 수술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들어있다. 그래도 신형철은 문학평론가니까, 가장 눈에 밟히는 부분은 역시 문학에 관한 부분이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들인데 신기하게 신형철의 목소리, 아니 글소리를 통해 읽으니 새롭게 다가온다.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은 아주 많지는 않고 글이 크게 어려운 편도 아니다. 하지만 한 달이 넘게 책을 못 끝내다가, 12월의 끝자락에 마음먹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렇게 보내기 아쉬운 책이었다. 산문집의 출간 간격이 7년이니, 다음 산문집은 2025년에 출간되나? 작년에는 2018년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때문이라고 농담했는데, 2025년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이하는 발췌문. 찜해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고르고 골라 소개한다.

>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_53쪽

>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단편적인 정보로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어떤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트위터에, 각종 소문 속에 그들은 있다.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문학은 4.3과 5.18의 반복을 겨우 저지한다. 제주에서 광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것은 나의 확신이라기보다는 다짐이었다. _93쪽

>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_176쪽

>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_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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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금희 지음, 곽명주 그림 / 마음산책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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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리뷰어는 이 소설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 아무 주제도, 의미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만 좇아 소설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을 이렇게 평했을까.

소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인간 본연을 탐구하고(<죄와 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전쟁과 평화>),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냥 이야기 자체가 끝장나게 재밌는 소설이 있다(스티븐 킹의 많은 작품). 소설에 이렇게 계보가 많은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이하 나는 생각해)는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나는 과감하게 ‘무용하지만 쓸데없이 섬세해서 아름다워 좋은 소설‘류에 두고 싶다.

250쪽의 분량에 판형도 작고 한 쪽에 글자 수도 적다. 그런데 총 8~15쪽으로 쓰인 1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책 자신도 첫 페이지부터 김금희의 ‘짧은 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아, 가뜩이나 단편은 이해하기 힘든데 길이도 짧다니, 난항이구만. 각각에 대한 소감을 말하기에는 지식과 정성이 부족하므로 대충 분위기를 나눠보자면 낭만, 이별, 일상의 위화감 정도 되겠다.

낭만의 테마를 가진 작품들은 나를 살짝살짝 웃음짓고 설레게 했다. 책의 포문을 여는 ‘원피스를 돌려줘‘는 원피스를 돌려달라는 여자의 요청에 헤어진 연인이 잠시 만나는 이야기다. 주말 오후에 할 일이 없어 헤이리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주차한 차가 어디 있는지 잃어버리고 마는데, 여자가 작품의 마지막에 되뇌는 ‘산술 불가의 여름밤‘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사람의 감정은 그래, 순수 논리로만 이어진 산술과는 정반대로 제멋대로인 거겠지.

이별의 분위기는 발췌문이 덕지덕지다. <나는 생각해>를 읽은 사람 중 꽤나 많이 이 부분에 줄을 쳐두었으리라 생각한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감각적인 문장이다. 이별의 고통과 견딤에 대해 예리하게 써내려갔다.

>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_‘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에서, 77,78쪽

또 하나 소개하자면, 우리가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마음 속에서 뚝 부러지는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다. 물리적 충격으로 시디가 부서지고, 그 파편들이 가슴에 박혀 콕콕 쑤시는 느낌이 절로 든다.

> (좋아하는 가수 보아 음악은 엠피스리로 안 듣는다면서) ˝그건 뭐 다른 데서 다른 게 아니라 쉽게 지울 수가 없으니까, 지우려고 하면 이른바 일종의 충격, 버튼을 누르든 시디를 부러뜨리든 아무튼 힘을 써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해야 뭔가를 지울 수 있다는 건 중요해. 그런 건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닮았달까.˝ _‘영건이가 온다‘에서, 122쪽

마지막으로는 일상의 위화감이다. 낭만과 이별은 몽글몽글하고 감성적인데 반해 위화감이 풍기는 작품은 꽤나 불쾌하다. ‘이행성‘은 한 가족이 밀림을 끼고 있는 리조트에 여행을 가는 이야기다. 작중 아버지는 리조트에 몰래 얹혀 살아온 투숙객(멀쩡한 사람이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오랑우탄 같은 모양새를 하고 리조트에 몰래 머무른다고 한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기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들과 아내가 그들만의 다정한 대화를 나눌 때, 밀림의 깊숙하고 텅 빈 공간을 통과하는 바람소리를 들을 때 - 즉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게서 소외되고 마음 깊숙한 곳에 공허가 자리잡았다는 것을 깨닳을 때마다 불안에 휩싸여 호텔 체크아웃 날짜, 비행기 편명, 직장과 직급을 떠올린다. 자꾸 아버지와 소문의 투숙객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해>를 말랑말랑한 감성과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운 소설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려면 정교한 장치가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이 가장 잘 계산된 작품은 단연 ‘오직 그 소년과 소녀만이‘인데, 일정 시점 이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모두 어릴 적의 나쁜 기억을 지웠고, 작품의 마지막에 여자는 단골 술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와 <장 발장>을 몰래 가져온다. 재밌게도 두 작품 모두 과거 자신의 모습을 지우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인물의 이야기다. 위 두 편의 소설에 비춰보면 과거를 지운 둘은 밝은 미래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스토리가 압축된 소년소녀세계문고를 아무리 읽어도 작품 전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듯이, 과거의 한 부분을 지웠다면 나를 온전한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단골 술집 이름이 ‘없는 집‘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은 어떤 시간을 밀어내고 예정되어 있는 그 뒤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에 올 시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기대가 있는 때였다.
˝행복하다. 못할 게 뭐 있나, 맞제?˝ _‘나의 블루지한 셔츠‘에서, 146쪽

1년의 마지막 달 12월에 읽기 딱 좋은 작품집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김금희 작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읽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 산술불가의 이유였다. 사소한 일, 아무 의미 없이 우리 곁을 지나쳐간 많은 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사사롭지 않게 기록해둔 김금희 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나도 당신들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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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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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민음사, 1999)

가스 냄새가 소년 시절 친구 방의 일부였듯이, 불안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치즘이 횡행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삶의 한가운데>는 니나라는 아주 진취적인 여성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책의 뒷편에 ‘니나 신드롬을 일으킨 삶의 모험과 격정에 관한 소설‘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는데,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 당시 남자가 아닌 여자가 이렇게 멋있고 냉소적이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가히 신드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니나의 멋짐과 쿨함을 보여주는 몇 구절을 따와보면,

> 아,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 _66쪽

라며 삶에서 안전성만을 추구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발전이 없는 (나같은) 이들에게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기도 하고,

> 너에게는 생을 끊으려는 이 시도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것은 너의 정신과 생명력이 너에게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_319쪽

라는 위험 수준의 발언까지 한다. 인생이란 그 자체로 축복받은 것이라는 다소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문구는, 자살마저 인생의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하는 니나에게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니나는 자살을 실험이라고 규정해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귀속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사랑하니 예나 지금이나 이런 히피적인 모습은 열광할 만하다.

니나는 모든 것을 경험으로 생각하고 지내는데, 딱 하나, 늙은 고모할머니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시간의 흐름과 늙음이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듯하다.

> 나는 아주 오래된 사진들을 찾아냈어요. 거기에서 고모는 예쁘고 젊은 처녀였어요. 아름다운 신부였어요. 그런데 지금 저기에 늙고 추악한 여자가 있는 거예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취를 풍기면서. _189쪽

책의 마지막에 달린 작품해설에서는 니나의 여러 모습을 명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여자‘다. 바로 위의 문장과 반대된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란 자연히 추해지는데, 니나는 이를 추악하다고 말한다. 혹시 니나는 고모처럼 추악해지기 전에 삶을 끝내기 위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일까?

오직 신세대의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당찬(어떻게 보면 극단적이어서 무서운) 생각이다. 동시에 구세대가 보기에는 치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신세대와 구세대의 구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주요 인물만 봐도 니나는 진보와 신세대를, 슈타인은 보수와 구세대를 대표한다고 하면 조금 무리일까?

어느 리뷰에서는 슈타인이 답답하고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물이라고 칭했다. 분명 슈타인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감정표현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고 모험보다는 안정을 취하는 타입이다. 위의 리뷰 작성자처럼, 이런 슈타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슈타인이 틀리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우유부단하고 느리고... 그래서 그렇지...

의미가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이 논쟁을 하는 장면을 하나 꺼내보겠다.

> (슈타인의 대사) 니나. 나는 말했다. 당신은 젊기 때문에 힘을 믿고 있어요. 그러나 굴러가는 바퀴는 당신들의 저항과 희생과 어떤 영웅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아요. 어느 날 저절로 멈추는 거죠. _348쪽

> (니나의 대사)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 니나는 정말 흥분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_349쪽

읽어보니 익숙한 대화 아닌가? 개인은 힘이 적으니까, 강하게 저항하지 말고 천천히 이룹시다! 아니, 모험을 하지 않은 당신은 뭘 몰라요! 위와 같은 대화는 당장 인터넷 게시판만 봐도 수두룩빽빽하고, 인류가 문명을 이룬 이후부터 계속 됐을 것이다. 슈타인은 니나를 걱정해서 조언한 것이겠지만, 니나는 그걸 꼰대질로 느꼈으려나.

> 나 같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대의 운명이 맡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명철한 통찰력은 갖고 있으나 그 통찰에 무조건 따르는 힘을 소지하지 못한 부류에 속한다. 미래는 니나와,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지나치고 일방적이긴 하지만 강력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필요가 없다. _355쪽

슈타인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작가는 이런 슈타인을 통해 보수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을 발전시키기 힘들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슈타인이 자신을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점은 조금 가슴이 아프다. 한 인간의 삶과, 세상의 진보라는 두 보기 중 진정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고르는 객관식 문제가 있다면,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 절대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항목만이 보기로 주어진 문제는 풀기 어렵다. 이 난제 때문에 우리는 인류 문명사 동안 이렇게 토론하고 싸워왔다.

그래서, 슈타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결심하면서 내뱉는 독백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구시대는 나이가 들었다고, 보수는 사회를 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사회에서 무조건 퇴장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따위는 집어치우고,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진정한 인류의 진화가 아닐까.

>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 _363쪽

하나의 책을 어떤 이는 페미니즘 소설로, 어떤 이는 역사 소설로, 어떤 이는 사회학 소설로 읽었다. 인물과 시대상을 모두 배제하면 신념과 선택에 대한 아주 근사하고 멋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을 위해서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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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제18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홍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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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홍희정 (문학동네, 2013)

다소 평론가스럽게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설정과 이야기가 진부한 편이다. 철없이 순수한 남자, 옆에서 짝사랑에 애태우는 여자,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할머니, 그 자체가 순수와 젊음을 상징하는 여자아이, 고뇌로 인한 가출. 여기다가 성장을 한 스푼 넣으면, 짜잔!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고 어른이 되는 주인공 탄생!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이하 ‘시간 있으면‘)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소설 안에는 우리에게 거창한 삶의 목표라든가 사회의 이데올로기, 미래를 뒤흔들 정도의 성장은 없다. 다만, 책의 마지막에, 이레가

> 할머니, 나 여행 가. 정확하게 말하면 율이를 만나러.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리러. (141쪽)

라고 쪽지를 남기고는 가출한 율이를 찾으러 집을 나서는 장면을 보면서 잔잔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여주인공 이레는 6년째 율이를 짝사랑하면서도 그 사실을 쉬이 말하지 못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느꼈던 ‘절정 이후엔 반드시 공포에 가까운 공허함과 슬픔이 따라온다‘(58쪽)는 나름의 법칙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테다. 지금의 관계가 어그러질까봐, 그냥 이정도로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지킬줄 알아야 한다‘(82쪽)는 이레 할머니의 말대로 이레는 자신의 욕망보다 안정감과 절제를 취했으리라. 이런 생각은 이레가 동네 주민인 칸트(이국적 외모에 매일 같은 시간에 슈퍼에 들러서 이레와 율이 붙여준 별명이다)의 미술 작업실을 들러 대화를 나누면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 -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 -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106쪽)

공허함과 슬픔에 지쳐 넘어져도 결국에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니 나를 절망에 빠뜨린 온갖 것들이 나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들어갈리 없다. 그럴 때, 자신을 망가뜨릴 줄 알면서도 용기있게 내 공간 안에 단단히 붙잡아둔 ‘원하던 것‘이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포리즘은 우리 인생에 모순으로 다가오면서도 종종 인생에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레는 결국 자신의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고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도 ‘아무 일도 아니에요‘라고 미소 짓는 느낌에 절망할 때, 저 멀리 언덕을 넘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나타날 것 같은 느낌, 그 사람이 웃어주는 것만으로 우주의 모든 애정을 받는 것 같은 느낌, 꼭 그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모아 밤새 태산이라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다시 흠뻑 젖기(79쪽)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용기있게 한발을 내딛는다.

존 레논은 40살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었고, 파블로 피카소는 91살에 심장마비로 죽었고, 유관순은 18살에 고문으로 죽었다(19, 20쪽). 죽음은 다들 제각각,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어느 때로 한정하고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구덩이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지만,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요. 좋아해달라는 말, 그리 거창하지는 않다. 한 공간에 앉아서 그저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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