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메멘토, 2015)


밀린 독후감이 많아서 기록의 의미로 짧게 쓴다.


1. 작년 말에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이다. 한참 책읽기와 글쓰기 ‘기술’에 몰두하던 때라 실질적인 글쓰기 팁을 전수하는 책인줄 알았건만 웬걸, 글쓰기를 주제로 한 에세이집이었다. 찾던 주제의 글이 아닌지라 글의 첫 장을 읽자마자 바로 덮었다. 그때는 뭔가 삘이 오지 않았다.


2주 전에 도서관을 찾았을 때, 사실 이 책은 관심목록에 없었다. 다른 책을 한참 찾다가 우연히 서가에 꽂힌 빨간 표지의 책을 봤다. 그때 느꼈지, 아, 이놈은 지금 읽어야 하는구나. 그길로 뽑아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찬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었다.


2. 은유는 필명으로 여성 작가이다. 문단에 등단해서 전문적인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심지어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 소속해 공부하며 글쓰기를 가르친다. 소설이나 시보다는 실증적인 글을 주로 쓰는 듯하다. 최근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출간하며 여성으로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실제의 언어를 통해 말했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수유너머R에서 진행됐던 글쓰기 수업의 이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수업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주부, 직장인, 학생, 취업준비생, 사회단체 활동가, 성폭력 피해 여성과 서로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을 권하는데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공감능력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는 데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관계가 부족하면 인생에서 오직 ‘내’ 이야기만 있으니, 소통도 힘들고 결국 존재의 빈곤으로 자신을 표현할 글감마저 떨어지는 셈이다.


3. 책 읽기에 대해 말하면서 카프카의 ‘도끼’를 언급한다. 김웅현이 <책은 도끼다>로 많이 퍼트린 그 구절! 거기에 발터 벤야민의 말도 덧붙인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쉬운 책, 재밌는 책만 읽지 말고 어렵고 자신을 멍하게 만들 책을 읽으라는 다소 상투적인 이야기도 한다.


저자는 특히 문학을 강조한다. 특히 문학의 ‘쓸모-없음’을 말하면서 김현 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답하며 김현 선생이 쓴 글이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 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나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_김현. 95쪽.


간혹 무의미한 책 읽기를 권하는 글을 본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김열규 교수의 <독서>에서 본 것 같다. 문학을 뭐하러 읽느냐, 돈도 안되고 명예도 되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나 경영서처럼 독자를 바꾸고 돈을 벌어다주지 못한다. 이런 비아냥 속에서도 우리가 문학을 읽고 ‘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문학은 그 자체, 그냥 문학이기 때문이다.


4. 작가가 르포르타주를 주로 쓰는 걸로 아는데, 재밌게도 시도 좋아한다고 한다. 시를 읽으면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를 접하고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천석꾼  부럽지 않게 든든하다고 한다. 이 느낌에 관한 짤막한 에피소드가 있다. 김수영의 시를 읽는 수업에서, 한 학인이 시 읽기가 너무 어려워 유명한 철학자가 진행한 김수영 시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아마 강신주일테지) 내가 보기에는 아주 기특한 일이었는데, 저자 입장에서는 아니었나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안 읽히는’ 김수영의 시-삶이지, 김수영이ㅡ 시-삶을 이론의 형틀로 찍어낸 ‘잘 읽히는’ 지식인의 해석이 아니다.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 (학자의) 권위에 복종하지 말고 (나만의) 느낌에 집중하기. 시의 본령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무한히 펼치는 데 있다. 시가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 읽을 때는 참고도서를 들춰보지 말자고 당부했다. _100,101쪽.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에서 소개한 문사철 독서법과 반대되는 입장이다. 시와 소설은 그렇게 다른가보다. 소설은 서사에 힘이 있다. 서사를 완벽히 알려면 그것이 어떻게 나왔는지 시대 흐름이나 작가가 추구하는 바를 같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이 온전하게 소화된다. 그러나 시는 다른 걸까. 물론 시대상도 중요하다. 시인이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면 시가 더 잘보인다. 허나 문학은 오독도 그 맛이다. 저자가 이런 의미로 썼다 해도 우리가 이런 의미가 아닌 저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다. 짧은 구절에 소설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시이기에 이런 점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5. 글쓰기, 문학 읽기를 대하는 태도를 다룬 2장까지는 아주 마음에 들었으나 글쓰기 기술을 조금씩 설명하는 3장부터 흥미가 떨어진다. 어라, 처음에는 글쓰기 기술을 바라고 읽었던 책인데 어느새 입장이 정반대가 됐다. 아마도 이 책에서 읽은 글이 실제의 팁이나 기술이 아니기 때문일테다. 은유라는 작가에게 기술적인 말을 듣다니, 뭔가 내 기대에 반하는 걸, 이라고 혼자 속상해하는 기분이랄까.


6. 6장 부록에 딸린 르포와 인터뷰는 읽기를 추천한다. 저자의 글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공부한 학인들의 글이다. 별 내용이 아닌 듯싶으면서도 가슴에 조그만 멍울 하나를 만든다. 인터뷰가 이렇게 울림을 주는지는 몰랐다. 나도 언젠가는 우리 부모님을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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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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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화재 감시원 - 코니 윌리스 (아작, 2015)


밀린 독후감이 많아서 기록의 의미로 짧게 쓰고 간다.


예전에 ‘리알토에서’를 읽다가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대로 덮었던 책이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인물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았고 엉망이었다. 아작 출판사가 막 책을 낼 때, 출판사의 느낌과 책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어서 책을 폈지만 그 난잡함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마음 다잡고 읽어보고자 꾹 참고 페이지를 넘겼다. 전에 재미없게 읽었던 ‘리알토에서’도 중반을 넘어가니 속도가 붙었다. 흠, 괜찮네, 하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니 그뒤부터는 일사천리. 아주 만족스런 소설집이다.


코니 윌리스는 미국 작가로 역대 최다 휴고상을 수상한(11번) 아주 화려한 이력을 가졌다. 네뷸러상, 로커스상도 여러번 받았다. 데몬 나이트 기념 그랜드 마스터 상을 받은 그랜드 마스터이기도 하다.


작가의 대표 장르가 SF라고 하는데 코니 윌리스 작품집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이 책은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SF는 아니다. 흔히 SF 하면 떠올리는 로봇, 시간여행, 우주활극, 우주비행선은 이야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스터리, 스릴러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심지어 ’내부 소행’은 강령술 이야기다.


단편이기 때문에 전체를 통과하는 메세지나 요약은 넘어가고, 각 이야기마다 느낀 감상을 한두 줄로 써보면,


리알토에서 - 미시세계에서 설명되는 양자역학이 거시세계인 우리의 현실에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소 난잡하고 시끄럽지만 양자역학의 불가해성을 잘 표현해낸 이야기다.


나일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명의 작품을 오마쥬한 작품이라고 한다. 원작을 읽어보지 못해 오마쥬 어쩌구는 패스.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미스터리이자 스릴러다. 주인공은 정말 죽은 것일까? 언제부터 망자의 이야기인가? 그녀는(혹은 그들은) 왜 죽었을까? 저승으로 가는 주인공은 과연 어떻게 될까? 궁금증을 마구 일으킨다.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 세기말의 절망적인 상황. 어딘가에 이유모를 폭탄이 떨어지고, 가족이라는 한 공동체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할수밖에 없는 서글픈 상황을 그린다.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 인물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화재 감시원 - 코니 윌리스에게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안겨준 작품. 책의 표제작인 동시에 코니 윌리스의 대표 중편이라고 한다. 역사를 어떤 식으로 봐야 하냐는 질문에 답하는 코니 윌리스의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단순히 몇 줄의 글에 표현된 역사 사건을 넓게 넓게 펼치면 순간은 정말 찬란하고 아름다우며,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온갖 감정의 집합체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 단순히 문자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당시를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코니 윌리스의 강력한 설득.


내부 소행 - 특이하게도 강령술에 대한 이야기다. 흠,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두 명의 회의주의자를 보여줌으로써 합리적 의심과 이성적인 판단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적어도 나는 회의주의자가 사랑에 빠지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읽었다. 회의주의자의 두 번째 규칙 - ‘너무 훌륭해서 진짜라고 믿기 힘들 정도라면,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 을 계속 되뇌게 만드는 작품.


이렇게 재밌게 읽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봤어야 했는데. SF라는 이름에 피하지 말고 놀라운 이야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본다는 생각으로 책을 봤으면 한다. 읽는 재미에 생각하는 재미까지 여러모로 좋은 작품집이다. 미국에서 열 편의 중단편을 모아 책을 냈는데 <화재 감시원>은 이중 다섯 편을 추렸고 나머지는 <여왕마저도>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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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3-20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엔가 사서 읽다가 무슨 일에선지 다 못
읽은 책인 것 같습니다.

아마 <나일 강의 죽음>까지 읽은 듯 하네요.

리뷰 보고 나서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손잡이 2017-03-20 17:54   좋아요 0 | URL
제대로 된 리뷰는 아니지만, 예상 밖의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여왕마저도> 평이 더 좋던데 기대 중입니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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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의 우리말 바로 쓰기> 이후로 4년 만에 보는 교정에 관한 책이다. 그동안 읽은 글쓰기 책이 기본에 바탕하거나 특정 장르의 기술을 말했다면,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는 글쓰기 기술을 알려준다. 다만, 이 책은 초벌이 아닌 재벌을 위한 책이다. 다 쓴 글을 하나하나 공들여 교정하는 작업을 다루기 때문이다.

저자는 20여 년 동안 교정일을 보면서 수많은 글을 고쳐왔다. 유유 출판사에서 책을 세 권 냈는데, 첫 작인 <동사의 맛>으로 차차 유명세를 타더니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는 출판사의 대표작이 되었다고 한다. 시립 도서관에 갈 때마다 항상 대출 중일 정도다.

책은 두 개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메일이 오면서 시작한다. 보낸 이는 ‘이 책의 저자 김정선’이 교정 작업을 한 책의 저자인 함인주다. 함인주는 문장을 다듬어주어 고맙고 혹시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여러 통의 메일이 오고 가면서 교정자와 작가는 올바른 문장은 무엇인지 의견을 나눈다.

두 번째는 교정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흔히 잘못 쓰이는 문장의 예시를 들면서 문장을 어떻게 고치는지 보여준다. 목차의 첫 교정은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다. 문장에 끼인 ‘적, 의, 것, 들’을 빼고서도 충분히 글이 자연스러운지 여러 예문을 말한다. 뒤이어 ‘있다’, ‘-에 대한’, ‘보이는’, ‘로부터’, 잘못 쓰이는 사동형 피동형 동사, 무분별하게 등장하는 지시 대명사 등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단어를 콕 집어 거침없이 고친다.

읽는 이마다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다르겠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교정 기술을 보여주는 부분이 더 좋았다. 서로 주고받는 메일과 저자 개인의 이야기는 그 안에 함축적인 ‘무언가’를 담은 것이 분명했지만 통찰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다. 반면에 저자가 말하는 교정의 예시는 내 글쓰기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에 더 절절히 다가왔다. 예전에 이런 부류의 책을 읽었다면 예문은 다 뛰어넘고 교정 기술만 봤을 테지만 이번에는 예문 하나하나를 저자와 함께 고쳐가며 그의 지식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글쓰기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이라면 글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쓰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을 것이다. 사실 ‘적의를 보이는 것들’ 정도는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앞서 언급한 ‘있다’와 과도한 피동형, 한국어에 그다지 필요 없는 복수형(들)도 마찬가지다. 조금 깊게 들어가면 주격 조사 ‘이, 가’와 보조사 ‘은, 는’, ‘에’와’에는’, ‘에’와 ‘에게’를 구분하여 사용해 문장의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문장을 무조건 고치고 간략하게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심지어 외국어에서 빌려 온 듯한 문구도 우리말 표현을 풍성하게 해준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다만 귀찮고 편하다는 이유로 고민 없이 머리에 박힌 습관의 언어로 글을 쓰지 말자고 한다. 지적으로 보이는 문장이어도 표현을 더 정확히 하려고 고민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예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습관처럼 반복해서 사용하는 일은 피해야겠다.

문법책처럼 난해하지 않고 예시의 수준도 적당하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에게 안성맞춤인 책이다.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종이책을 다시 주문해야겠다. 옆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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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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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캠프에서 구호가 시작된다. 의료진은 난민의 상태를 보고 그들이 살아날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고 구분한다. 무자비한 행동이라 비난할 수 있겠지만 한정된 자원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가망이 없는 이들에게 간호사는 그들의 아이는 너무 약하고 배급이 빠듯하니 손목밴드를 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상과 현실이 강하게 부딪혀 모순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구호현장에 장 지글러가 서 있다.

장 지글러는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우석훈은 그를 학자이면서 활동가이며 전문가라고 평한다. 학자로서 제네바 대학 교수와 제 3연구소 소장으로 역임했다. 활동가로서는 스위스 사회당원으로 일하고, 2000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다. 국제적 기아문제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시각이 뛰어나고 저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보여준다.

책은 저자의 아들 카림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한다. 선진국은 먹을 것이 넘쳐 사람들이 비만을 걱정하고 음식 쓰레기를 마구 버리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아이들이 왜 굶어가냐고 아들이 질문하고 저자가 이에 답을 하면서 시작한다. 저자는 질답을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기아 지역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가 겪은 일화뿐만 아니라 UN에서 발표한 통계를 소개하면서 객관적인 지표를 말하기도 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한다. 후자는 더딘 경제발전, 인프라의 미정비로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저자는 FAO와 다른 구분을 한다. 인간이 개입하느냐 하지 않느냐다.

저자가 묘사한 기아의 예시를 살펴보면 자연재해를 제외하고 모두 인간이 관련된다. 앞에서 경제적 기아의 예시로 든 전쟁, 자기 민족을 망치는 군벌 우두머리, 나라를 지배하는 사회구조, 시카고 곡물거래소에서 거물급 곡물상이 결정하는 농산물 가격 등 인간이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하는 일들이 세계의 기아를 키운다. 저자가 세계 기아의 주범으로 꼽은 신자유주의도 이와 궤가 같다. 일부 자연재해도 안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욕심이 들었다.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아마존 삼림을 해치는 산업도 자본 때문에 생긴 일이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토마스 상카라를 통해 희망을 보기도 했다. 이 젊은 개혁가는 나라가 자급자족을 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해도 사회정의가 이룩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비효율적인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인두세를 폐지했다. 철도사업을 진행하고 개간 가능한 토지의 국유화했다. 그는 부패가 심한 정치권, 턱없이 낮은 국내 생산량, 매년 적자를 보이는 무역수지를 타파하고 나라를 차차 개혁해나갔다. 외국세력에 의해 살해되어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저자가 언급한 기아에 의한 생명파괴에 어떻게 대처 방법의 실례이기도 하다.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 인프라 정비)

일부 사람들은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한다는 엉터리 논리를 믿기도 한다. 심지어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조차 이렇게 믿는다. 기아의 원인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려는 선진국의 비겁한 변명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논리를 믿는다. 학교에서 기아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아에는 구체적인 원인이 있음에도 학생들은 모호한 이상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인간애만을 갖고 사회에 나오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뜬구름 잡는 식의 정서적 대응을 하기 일쑤다. 우리가 사회와 경제 시스템에 대해 더 공부하고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깊게 사고할 필요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7년 전에 발간된 책이지만 그동안 나아진 점이 없어 보인다. 1999년 8억 명이었던 영양실조 사람의 숫자는 2010년에 이르러 10억에 이른다. 태동하던 신자유주의는 이미 전세계에 위력을 과시하고 있고 광풍에 휩쓸려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전세계가 나서서 구호활동을 진행한 지 몇십 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세계의 기아는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는다. 그 소를 소비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책은 기아를 없앨 방법을 명시하면서 독자에게 우리의 행동과 사고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자고 설득한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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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1-2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전에 읽었던 책인데, 기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 의식의 흐름으로 썼습니다. 일기를 쓰다가 푸념을 쓰다가 대충 책 이야기로 끝이 났습니다. 내 안의 잉여력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여태껏 책을 읽고 어떤 형태로든 감상을 적어왔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발췌문으로 가득해 겉으로는 참 멋있어 보이지만 - 작가의 문장이기 때문에 정제되고 깊은 의미가 담길 수밖에 없다 -  실제로 내 생각은 거의 없거나, 아니면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책을 읽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재작년에 한참 허세 가득찬 글쓰기에 취한 동안, 그 허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알라딘에서 몇번의 이달의 마이리뷰나 마이페이퍼로 선정해주기도 했다. 그저, 멋있어 보이는 글을 길게만 썼다. 그러면 있어 보이고, 진짜 같으니까.

똑같은 발췌문을 옮겨적더라도 단순히 멋있는 장식으로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발판삼아 더 넓고 깊은 사유의 세계로 뻗어나갈 것인가. 나는 항상 전자였다. 그러면서도 나를 담은 글쓰기를 진득히 바랐다. 바라기만 했고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면서도 바뀌려고 노력조차 안했다는 말이냐, 하는 말에 나는, 지금도 잘나보이는데 뭐하러 칙칙하고 끈적거리는 속마음을 내비춰 못나보이는 것도 싫다, 고 답했다.

마음 안이 고통으로 범벅된 지금, 이렇게 힘든 지금이야말로 나를 바꿀 기회라고 생각했다. 전부터 고민이었던 단순한 감상에 그치던 독후 활동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1월부터 서평 쓰기 수업을 듣고 있다. 서평에 관한 책을 읽고서도 독후감과 서평은 별 다를 게 없고 비평을 해봐야 뭐가 바뀌겠냐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이왕에 마음먹은 거 대차게 해보자. 끝에 쪽박을 차더라도 이때만큼은 열심히 해보는 거야. 다짐했다.

새해를 맞이해 모두들 신년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은 3일을 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작심삼일.

나도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건 없었다. 공들여 노력하겠다던 글쓰기 연습은, 일기를 40일 넘게 짤막하게나마 쓰고 있다지만 시간이 갈수록 양과 정성이 점점 줄어간다. 1월이 7할 정도 지난 지금,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독후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한 줄 평도 남기지 않고 단순한 감상에 별점만 주고 땡. 심지어 서평 수업의 첫 과제는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기한을 넘겨버렸다.

아아, 이 구제불능을 어찌 할꼬. 올해부터는 새로운 내가 된다고 온라인에 그렇게 홍보해대고 실상은 밀린 책을 보며 빨리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저 ‘읽기’에만 정신이 팔렸다. 책을 다 읽었으면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런 행동 없이 그저 다음 책 다음 책, 다독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헬렐레 거린다. 다독도 나름이지, 남은 게 하나 없는, 무의미한 행동들. 몇 년 전에는 책을 많이 읽으면 무의식에 암묵지가 생기리라 믿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할 수도 없다.

독서는 독후 활동을 위한 단순한 수단일 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독후 활동은 독후감 쓰기로 계속 해왔는데 심화된 과정으로서 서평을 연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후감과 서평은 단어에서 풍기는 냄새부터 뭔가 다르다. 전자가 주관적 감상 위주라면 후자는 객관적인 비평이 중심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실질적으로 서평 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책을 찾아봤다.

그러던 중 선호하는 출판사인 ‘유유’에서 작년 12월에 막 <서평 쓰는 법>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을 보았다. 서평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이런 책이 나오다니 참으로 행운이었다. 굿즈(다이어리)를 받기 위해 책을 잔뜩 사면서 이 책도 함께 주문했다.

제목이 서평 쓰는 법이라고 해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나 팁을 전수해주는줄 알았건만, 그런 면에서는 말짱 꽝이다. 책을 읽고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김민영, 황선애 공저의 <서평 글쓰기 특강>이 실용서적에 가깝다면 <서평 쓰는 법>은 ‘서평 쓰기’에 대한 전체적인 안내서다. 서평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목적, 전개, 요소, 방법 등 서평 자체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는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천천히 읽기를 강조한다. 직전에 읽은 윤성근의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에서는 저자의 속독법에 대한 꼭지와는 정반대다. 그런 면에서 김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평하는 상반된 의견을 접할 수 있다. 한 권을 읽어도 깊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과, 많이 읽다보면 그 가운데서 나름의 사유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베스트셀러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도 상반된 의견이 있다. 지대넓얕은 제목 그대로 얕더라도 넓은 지식을 갖추자고 말하지만 <서평 쓰는 법>은 폭보다는 깊이의 독서를 권한다.

다만, 이 세 권의 책과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까지 모두 맥락에 의한 독서를 권한다.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는 문사철 독서를 통해 문학 작품이 쓰인 시대의 역사와 당시의 철학까지 공부하라고 말한다. <지대넓얕>은 수없이 넓은 지식의 세계를 몇 가닥의 맥락으로 구분해 세계를 조금은 단순히 파악하는 연습을 말한다. 피에르 바야르의 책은 맥락을 읽어내는 일종의 교양을 위한 독서와 공부에 대한 책이다. <서평 쓰는 법>도 책의 맥락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훌륭한 저작은 성실한 독자의 머릿속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남긴다.(146쪽) 이 문구 그대로 <서평 쓰는 법>에 적용할 수 있다. 책을 읽고 서평이란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배운 느낌표와, 그렇다면 대체 서평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음표가 머리에 마구 맴돈다. 좋은 서평을 쓰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실용적인 팁은 부족하지만 뒷표지에 쓰인 말대로 본질부터 기술까지, 서평의 모든 것을 다룬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양이 적어 실질적인 예시가 적지만 충분히 꺠우침을 주는 책이었다.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부분을 다시 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이 많다. 다시 읽어야겠다.

다음 주 제주도로 힐링 여행을 떠난다. 며칠은 책을 읽을 예정이어서 어떤 책을 가져갈까 생각했는데 <서평 쓰는 법>이 추천해준 서평집이나 몇 권 들고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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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0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고, 한 번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양손잡이님 덕분에 이 책의 주요 내용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었어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마음에 들면 구입할 생각입니다. 유유출판사를 위해서.. ㅎㅎㅎ


양손잡이 2017-01-20 12:07   좋아요 1 | URL
사실 독후감을 쓰려고 시작한 글이었는데 이상한 짬뽕이 되었네요. 책 소개는 5%도 못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줄기는 천천히 읽기와 맥락으로 쓰기였지만요. 어제 책을 다시 읽으니 내용이 정말 좋았습니다. 계속 소장하면서 몇번이고 다시 읽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유 출판사 사랑해주세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