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영광
죤 오웬 지음, 서문강 옮김 / 지평서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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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존 오웬/서문강 옮김, 지평서원)

개혁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이다. 다 읽은지는 몇 주 되었는데, 이 일 저 일 하다 보니 이제야 서평을 남기게 되었다.
이 책은 앞서 읽은 존 오웬의 책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보다 훨씬 어렵게 다가왔다. 그것은 아마 이 책에서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거나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서 우리의 생각과 정서가 늘 다른 것들을 즐거워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복음의 위대한 비밀을 생각하는 데 기울이지 않거나 기울일 능력이 없는 주된 이유다.‘(86쪽)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생각했나? 얼마나 자주 묵상하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대학생 때 이후로 영적 침체에 자주 빠졌던 까닭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일까.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단지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려는 것도 선한 행동으로는 (열매로 안다고 하지만) 구분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행동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거나 그 영광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고서는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85쪽)

교회에서는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참 아쉽다. 단순히 선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으로 복음의 열매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정답은 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맘몬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나님과 맘몬은 동시에 섬길 수 없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맘몬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맘몬을 따르는 것은 내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기에 [유사 그리스도인]에서 유사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항목이 많은 것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맘몬을 따르며 내세에서는 구원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전도를 한다. 우리의 ‘구원받음‘이 주목적인 전도를 한다. 그게 너무 싫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태도는 자신을 속이는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53쪽)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탁월하게 나타내신다.‘(82쪽)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우리의 ‘구원받음‘에만 초점을 두고 예수님이 하신 일(직무)과 그의 인격(인성과 신성)에 대한 묵상은 뒷전이다([밥심으로 사는 나라]에서 ‘복음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메시지입니다.‘라고 했다.). 설교 본문은 성경이지만, 성경을 풀어서 말씀하시는 것보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내용이 훨씬 많다. 사실은 그래서 기대가 안 되고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과 거룩한 도덕적 의무들을 이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고 복음도 모르며, 교회가 가진 보편적인 믿음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다.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이 그 뿌리에서 나온다.(89쪽)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연말 시상으로 성경 다독상을 주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유일한 거울을 잃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가거나 날마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지 못하도록 낙담시키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성경을 지키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114쪽)
그리고 이 책에서는 영적 침체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서술하고 있다. 그 영적 침체라는 것이 ‘때때로 우리가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찾는데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거나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117쪽)는 것이라면 말이다. 부지런히 찾는데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부지런히 찾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적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는 기도와 묵상과 애통과 성경 읽기와 말씀 듣기, 그리고 하나님께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간에 예배 드릴 때에 주어지는 모든 규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사모하는 심정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예전처럼 자신에게로 돌아와 계신 것을 발견하기까지 그 일을 해야 한다.‘(118~119쪽) 부지런히 찾음에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을 이 책에서는 믿음의 속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단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보지는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기‘ 때문이다.‘(254쪽)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요인이 있다. 하나는, 믿음 자체의 성질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할 때 믿음으로 보는 것은 이 탁월한 영광을 직접 바라보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믿음의 눈앞에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실체 자체가 아니라 희미한 거울에 비쳐서 나타나는 것 같은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273쪽)

정말 그리스도의 영광을 갈구하고 있는가? ‘나‘의 구원받음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 일의 수많은 힘든 일을 겪으면서 ‘위로‘와 관련된 찬양을 원하는 것은 얕디 얕은 신앙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일은 힘든 것이 당연하다. 그 힘든 일은 믿는 자에게도, 믿지 않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위로‘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둔갑시켜 찬양을 부르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 힘든 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들어가도록 북돋는 것이 교회의 역할 아닐까? 신앙의 선배들이 당한 힘든 일은 우리가 겪는 세상 일의 고단함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일 것이다. 세상 일의 고단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단함은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동일하게 임하는 것이기에 믿는 자라면 믿음의 행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직 그 영광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쉽고도 즐겁게 여기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심지어 죽음 자체까지도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41쪽)

이 책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묵상해야 하는지 매우 세세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성경의 주제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정독을 권한다. 존 오웬의 기도문으로 서평을 마친다.

˝내 영혼이 주의 영광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로 하여금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 하옵시고, 그 영광의 아름다움과 충만함 속에 영원히 거하기 위하여 지금 이 세상에 살 때에도 그 영광으로 감격하게 하옵소서.˝(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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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사는 나라 - 기도와 삶의 부흥을 이끄는 주기도 강해
박영돈 지음 / IVP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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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사는 나라](박영돈, IVP)

2월부터 읽은 책인데, 5개월만에 다 읽었다. 중간 중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보니(성서교육회 독서모임, 개혁주의 성경공부에서 읽는 책) 집중해서 읽기 어려웠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느낌이 든다.

박영돈 교수님은,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고신대학원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페친 중 한 명이 박영돈 교수님 글에 가끔 ‘좋아요‘를 누르는 것을 보고 박영돈 교수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튜브에 교수님 설교(?)를 편집한 영상을 보기도 해서 교수님이 어떻게 책을 쓰셨는지 궁금했다.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 책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기도 해서 고신대학원에서 강의하신 분이니 주기도문 강해를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처럼 하셨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다. 아니, 내가 기대하던 방향과 달랐던 것 같다.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의 책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처럼 풀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밑줄 그어야 할 부분이 많았고, 띠지를 붙여서 다시 한 번 더 보아야 할 부분도 많았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중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기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교회에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주기도문을 외우지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외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따로 묵상하는 시간을 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주기도문 설교집이다. 부제는 ‘기도와 삶의 부흥을 이끄는 주기도 강해‘이다. 어렸을 적 교회 목사님이 소위 ‘부흥사‘로 불리던 분이셨다. 2000년쯤 ‘부흥‘이란 곡도 나오면서 교회의 양적 부흥을 말하는 설교자도 많았다(이 곡의 의도가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부흥‘에 대해 말하면 색안경을 끼게 된다.

주기도문의 첫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한다. 아버지라는 데에서 묵상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인간 아버지를 통해 이해하는 데는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서 우리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도전받을 필요가 있습니다.(35쪽)

따라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과 그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특권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반응입니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아빠를 부르는 것입니다.(42~43쪽)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호출에 반드시 응하신다는 약속에 스스로 매이신다는 뜻입니다.(57쪽)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육신적인 아버지의 의미를 넘어서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아버지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예전에 한신대학교(기장)에서 학생회장이었던가,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다음 인용이 그 논란에 대한 개혁주의적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과 같은 아들의 자리에 서서 아들의 특권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74쪽)

요즘 한국교회의 답답한 점 가운데 하나, 복음이 구원으로 끝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이런 생각을 하게 된 대표적인 질문이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두 번째 간구 ‘나라가 임하시고‘에 있는 내용이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입니까? 내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복음을 그런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메시지입니다.(105쪽)

다음 문단은 참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미미한 기도를 그분의 나라를 앞당기고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방편으로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자신과 함께 왕적 권위를 행사하는 자녀로 대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중략)...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108~109쪽)

다음은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더 생각해야 했던 대목이었다. 요즘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어서 사실상 할 말은 없지만, 공적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는 늘 어렵다.-세 번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 및 교제인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동역이기도 합니다. 사귐과 동역은 사실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만 생각하면 그분의 임재를 홀로 누리는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도를 하나님과의 동역으로만 여기면 기도가 고역스러운 의무가 되고 맙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봉사와 사역으로서의 기도는 매우 힘든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오는 영적 즐거움과 평강이 이 수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기도가 힘들지만 즐거운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163~164쪽)

그리고 다섯 번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에서 ‘여러분의 심령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맛본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 마지막으로 회개하셨습니까?‘(209쪽)는 너무 찔렸고, ‘회개할 것이 없을수록 회개가 깊어진다‘(211쪽)는 소제목과 ‘회개할 것이 많을수록 회개가 없다‘(213쪽)는 소제목도 통찰의 문구라 ‘아, 그렇지.‘ 하면서 읽었다.우리가 용서해야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의 비밀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용서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용서가 반드시 우리의 용서로 열매 맺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이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219쪽)

여섯 번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다음 내용이었다.

가난보다 부의 시험을 이기기가 더 어렵습니다. 낮아졌을 때보다 높아졌을 때 교만의 시험에 빠지기 쉽고, 무명이었을 때보다 유명해졌을 때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쓰러지기 쉽습니다.(243쪽)

국회의원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정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목회자들이 쉽게 유혹에 빠지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을 가지게 되므로) 가난하기보다 부하게 되고, 높아지는 위치에 있을 확률이 높다(교사의 경우에는 부장이나 관리자로 볼 수 있겠다.). 그만큼 쓰러지기 쉽다는 말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어릴 때보다 판단력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혹거리는 그만큼 더 늘어나 있다. 여전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249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할 것을 아시기 때문‘(250쪽)이다. ‘만왕의 왕이 드리는 기도를 함께 드리는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을 지닌 사람들입니까?‘(295쪽)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태도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친다.

기도와 찬양은 감정과 감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온전히 나타날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바라보며 그 관점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석할 때만,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비로소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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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글쓰기 - 눈빛을 반짝이게 하는 글 마음에 깊이 남는 글
권일한 지음 / 우리교육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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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글쓰기](권일한, 우리교육)

다 읽은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라 다시 읽었다. 5개월 전에는 한 달에 걸쳐서 읽었는데, 이번에는 3일만에 부랴부랴 읽었다. 이번 달은 독서모임 당일까지 읽어야 할 정도로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5개월 전에 읽었던 책이라 그런지 책 내용이 조금씩 생각이 났다. 선생님 책을 계속 읽으니 여러 번 등장하는 아이들 글이 있어서 속으로 ‘나는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을 알지.‘ 하며 읽었다. 3일 만에 읽으니 너무 급하게 읽어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체한 느낌이다. 책은 좀 천천히 씹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다.

지난 달에 읽은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책이야기]를 두 번째 읽으며(읽다 만 것까지 포함하면 세 번이지만) ‘아, 이 책은 선생님이 책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구나.‘ 했다면,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며 다가온 문장은 선생님이 (아이들) 글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대목이었다. 글을 귀하게 여기시기에 아이들 글에서 보석을 발견하실 수 있었던 것일 테다. 아이들이 쓰는 글에 가치가 있다고 외치는 선생님의 글에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던 강형욱 씨가 생각났고, 레이놀즈의 [점] 책이 생각났다. ˝너의 글은 가치가 있어.˝ 베티가 찍은 단 하나의 점을 미술작품으로 존중해주었던 미술선생님 같았다.
나는 글이 귀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에게 글은, 현실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글은 귀한 것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도구였다. 슬프면 썼고, 우울해도 썼다. 드라마 보고 감동해서 쓰기도 했다. 숨 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정작 숨을 쉬지 못하게 될 때까지 숨 쉬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기 어렵다. 나에게는 글도 그런 존재인 것 같다. 당연하게, 늘 거기 있는 대나무숲이다.
권일한 선생님은 주변에서 경탄의 순간을 찾아내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나는 관찰을 잘 못한다. 하나만 깊이 파는 스타일이라, 하나만 보고 주변의 것을 잘 보지 못한다. 그 하나도 내가 관심있는 분야만 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것을 놓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과 같은 교육방법을 취할 수가 없다.
글쓰기에 대한 관점도, 주변을 보는 관점도 다르다. 그리고 다른 것이 당연하다. 내가 글쓰기에 고민하는 지점이다. 나에게 맞는 글쓰기 교육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김경인이라는 학생이 [딸들의 제국]을 읽고 쓴 글이, 내 마음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한길을 걷다가 ‘어떤 지점‘에서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같은 길을 지나 ‘어떤 지점‘에 다다랐을 때, 수많은 길들 중 나의 길을 선택하는 방법을 아직 나는 깨닫지 못했다.(78쪽)

+ 독서모임 후기
서평도 쓰지 못하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독서모임에 참여해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던진 발제문(글을 쓰는 목적/까닭)이 있었는데, 실은 내가 그 질문에 답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몇 년째 ‘왜?‘를 달고 살지만, ‘왜?‘에 대한 답은 분명하게 표현될 때도 있고, 답을 찾지 못할 때도 있다.
내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글은 주로 서평이다. 그래서 이번 [선생님들의 시간표 2.0](가제인지 어떨지 모르겠지만)에 서평을 주제로 써달라고 초청(?)받았다(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지라 글을 다듬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뒷일은 닥쳐서 고민하는 것으로 한다.). 싸이월드에 글을 쓸 때는 주로 일기를 썼다. 지금도 블로그에 일기를 쓴다. 수업에 대해 쓰고 싶어서 쓰고 있다. 그마저도 무엇을 써야 할지 헤매고 있지만.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이 주로 어떤 종류인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닥치는 대로 쓰고 있다. 일기, 서평뿐 아니라 반주법(싸이월드를 사용할 때 ‘페이퍼‘라는 블로그 비슷한 곳에 반주법에 대한 글을 연재한 적도 있었다.), 영화평(이건 배우들을 잘 몰라서 내용 중심으로 쓰긴 하지만, 워낙 서사를 좋아하는 탓에 ‘나에게 적용‘을 중심으로 쓴다.), 여행 후기(방법적 설명이 많다.) 등등 특별히 정해 놓고 쓰는 글은 없다.
독서모임에서 서평을 왜 쓰는지 물었을 때, ‘기억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 이상 생각을 발전시키지 않아서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야 했다. 덧붙여 ‘책의 내용보다는 책에 대한 내 생각을 기억하고 싶어서‘라고 답을 했다. 글쓰는 이유로 ‘기억‘을 많이 얘기하셔서, 글쓰기는 기억을 위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선생님은 다른 사람과 연결, 소통하고 싶어서 쓰신다고 했다. ‘그래, 맞아‘하고 생각했다. 내가 쓴 글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자신감이 없는 편인데, ‘내 생각‘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없어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을 바꿔야 할까?‘라는 마음이 크다. 옳은지 그른지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내 삶에는 옳고 그름이 중요했다. 내 감정보다 옳고 그름이 중요했다. 그것까지 쓰려면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뤄서 써야겠다. 왜 기억하고 싶은지도 더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내가 어떤지 아는 것이 내 글의, 글쓰기 지도의 기본이 되는 것 같기에 이 질문들에는 꼭 답을 찾고 싶다.-서평을, 독서모임 후기를 읽어보니 답을 찾은 것도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반복하게 되는 법이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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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연필 - 2011년 제17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71
신수현 지음, 김성희 그림 / 비룡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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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연필](신수현 글, 김성희 그림, 비룡소)

권일한 선생님의 페이스북에서 보고 산 책이다(페이스북뿐 아니라 권일한 선생님이 쓰신 책에서도 보고 샀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읽어보니 권일한 선생님이 왜 좋다고 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장편동화이다. 문학을 (시 빼고)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기가 자는 시간에 단숨에 다 읽었다. 이야기책은 급하게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느낌이다. 오래 오래 꼼꼼히 씹어 먹지는 않는다. 이야기책을 가지고 생각을 하거나 등장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거나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냥 재미있어서 읽는다. 이야기책을 읽으면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좋다. 삐삐롱스타킹 같기도 하다(삐삐롱스타킹이 아닐 수도 있다. 앞에서부터 쭉 사건을 서술하는데 그 사건이 그 아이의 상상이었던 반전의 책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민호는 우연히 빨강연필을 얻는다. 주인 없는 연필이다. 민호는 그 연필을 자신이 가졌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연필이 예뻤으면 민호처럼 했을 것 같다. 주인도 없다는데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는 욕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사실 이 세상에 정말 내 것이 존재하기나 하나?). 그 욕심의 영역이 각자 다를 뿐이다.
민호는 기본적으로 잘 쓰는 능력이 있었다. 비밀 일기장에 쓰던 일기 내용도 못 쓰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 정도만 써도 괜찮은데, 라고 생각했다.-아무래도 내가 ‘잘 쓴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자신에게) 솔직하게 쓴다‘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빨강연필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학교 업무를 처리해야 할 때이다. 특히 맨땅에 헤딩해야 할 때. 전년도에 업무 계획이 올라오지 않아서 새로 업무 계획을 세워야 할 때. 그리고 협의회를 하지도 않았는데 협의회 내용을 기안으로 올려야 할 때.-요즘은 조금 바뀌었지만 말이다. 관리자의 마음속을 보고 싶을 때 빨강연필을 쓰고 싶다. 민호의 마음도 이랬을까? 하지만 성격이 다른 글인데. 내가 써야 하는 업무 계획은 솔직하게 내 생각을 쓸 수 있는 글도 아닌데. 하지만 글을 쓰는 아이들의 마음이 업무 계획을 써야 하는 내 마음과 같다면, 그건 참 마음이 아픈 일이다.
민호는 빨강연필을 이용해서 상을 받았다. 자신의 실력이 아니기 때문에 재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민호와 재규 같은 상황에 대해 생각이 많다. 계약직과 정규직, 금수저와 흙수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생각을 적지는 않겠지만, 일련의 일들이 민호와 재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민호의 상황에서 빨강연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유혹은 언제나 존재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유혹에 빠지는데,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이런 부분에서도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읽은지 3주가 지나서 쓰는 바람에 책에 대한 내 생각이 어땠는지 많이 잊었다. 서평을 쓰면서 기억해보지만 그때의 감동이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침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글쓰기] 책을 읽어서(이 책 뒷부분에 [빨강연필] 토론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이 생각나기도 해서 내 생각과 그 책의 토론 내용이 섞여 있다. 시간 날 때 다시 읽고 다시 정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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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살아있는 질문 수업 - 하브루타의 실제
양경윤 지음 / 테크빌교육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교실이 살아있는 질문 수업](양경윤, 즐거운학교)

이 책은 하브루타에 관한 책이다. 몇 년 전 하브루타 붐이 일었을 때 하브루타 연수를 듣고 이 책을 샀던 것 같다.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교육 방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나는 평소에 질문(혹은 발문)을 잘 못 던진다고 생각을 해서 이 책을 샀던 것 같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찾아 헤매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하브루타의 실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개론적 성격의 책(?)은 이미 출간된 모양이었다. 그 책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하지만, 이 책이 너무 수박 겉핥기 식의 책이라 읽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 편이라 이런 저런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권일한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만큼의 삶의 철학은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그냥 하브루타를 적용하는 방법을 소개한다는 느낌? 이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뒤에 나오는 독서 교육 부분 때문이었는데,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 쓴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에 나오는 독서교육 부분을 읽을 때에는 저자의 삶이 빠져 있어서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나보다 훨씬 훌륭하신 분이신 것은 알겠고, 이런 저런 적용을 많이 하시고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겠고, 수업을 통해 아이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으신 것도 잘 알겠는데,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 책이 선생님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래도 아이들보다는 수업에 더 초점이 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보다는 수업에 더 초점이 가 있다는 것. 기술적인 부분은 잘 서술되어 있지만 관계적인 부분이 빠져 있어서 아쉽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 선생님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요즘 스스로에게 원론적인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편이다. 위에도 썼지만, 질문만 던지고 답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나는 왜 질문 수업을 하고 싶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왜 수업을 잘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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