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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ㅣ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전경아, 인플루엔셜)
[미움받을 용기]는 페이스북에서 한때 아들러 심리학이 유행했을 때 구입했다. 그게 몇 년 된 것 같은데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아들러 심리학에 근거해서 쓰인 [학급긍정훈육법] 책도 구입했던 것 같은데 결혼한 이후에 샀던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아들러는 꽤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아들러의 이론을 기시미 이치로가 각색(?!)한 것이라 아들러의 이론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가 후미타케가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해석 책(?)을 보고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해석 책만 봤다고 하기도 했다.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고민인 ‘행복은 무엇인가‘를 아들러 심리학으로 풀어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한 학자의 이론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책으로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요즘 심리/상담 관련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결과를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복직을 앞두고 생긴 심리 현상이다.)이 심리/상담 책을 읽게 만드는 것 같다. 성경을 읽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으니까 책을 통해 빨리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심리/상담을 교회로 끌고오는 데 대한 비판은 나에게부터 적용해야할 것 같다. 이런 모순덩어리라니.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형식을 띠고 있다. 한 청년이 철학자를 찾아와 철학자의 주장(세상은 단순하며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을 반박하려다가 철학자의 의견(아들러 심리학)을 따르게 되는 내용이다. 총 5부로 되어 있고, 아들러의 용어(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들을 대화에 넣어 사용함으로써 아들러 심리학을 설명한다.
1부에서는 지금까지 사회에 만연한 프로이트식 원인론에 반박하는 아들러식 목적론이 등장한다.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일이 현재의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트라우마가 있다.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부정하는데, 과거의 일이 현재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며,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데에는 의심이 들긴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고 해서 모든 자녀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부모가 자녀를 방치했다고 해서 모든 자녀가 엇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꼭 트라우마가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물론 반대급부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경험 그 자체에 초점을, 아들러는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내가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들었던 교수님의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그 일을 해서 당신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현재의 생활양식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 7년이 다 되어가는 그 수업 당시에도 매우 획기적이었던 질문이었고, 지금도 그 질문을 종종 떠올리곤 하는데, 프로이트식 원인론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인지 아들러식 목적론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의 철학자가 5부 끝에서 새로운 양식을 익히려면 지금껏 살아온 세월의 반을 투자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7, 8년은 더 지나야 아들러식 목적론을 익히게 되려나. 아무튼, 주변인들 중 저 질문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잔인할 수 있지만,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자신에게 그 책임을 떠넘김으로서 현재의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책임전가를 매우 잘하는 인간의 본성과 너무나도 일치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인론과 목적론, 둘 다 성경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원인론에 둘러싸여 살아와서 성경도 원인론으로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5부 끝에서 다시 나오지만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인생을 선으로 보고, 아들러식 목적론은 인생을 점으로 보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초점을 두고, 아들러는 현재에 초점을 둔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니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부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장은 용어 정리가 필요한 내용이라서 서평이 길어질 것 같다. 인간은 무기력하게 태어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보편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우월성 추구‘라고 한다. 우월성 추구는 경쟁의 의미가 아니며,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를 구분짓고 있는데, 열등감이라는 말을 현재 통용되는 맥락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이 아들러라고 한다. 열등감은 정상적인 심리 상태(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도착적인 심리 상태, 즉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한다. 열등 콤플렉스는 ‘권위 부여‘ 같은 ‘거짓 우월성‘으로 드러나는 ‘우월 콤플렉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예전에 낮은 자존감과 교만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미 아들러가 이론으로 정립한 내용이었다. 우월 콤플렉스 중 하나는 ‘불행 자랑‘이라는 것도 있는데, 자신의 불행을 뽐내듯 말하며 타인이 위로하려고 하면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같은 식으로 대하여 주변인이 그 사람을 신중하게 대하게 만들며, 주변인보다 자신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돌 맞을 각오하고 쓰는 말이지만) PK(목회자 자녀들) 모임 중 일부도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PK 이외에는 PK를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PK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자신의 불행을 뽐내듯 말하며 타인이 위로하려 들면 너는 내 마음 몰라, 라고 하며 주변인이 더 다가설 수 없게 되는 것, 이것이 불행 자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마 내가 더 이상 PK 모임에 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측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적인 분노로 화가 났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는 당사자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이론에 대한 예로 어릴 때 부모의 학대로 비행청소년이 된 사례를 꼽았는데, 프로이트식으로는 ‘부모의 학대가 비행청소년이 되게 했다‘이지만 아들러식으로는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비행청소년이 되었다‘고 해석하게 된다. 부모의 학대와 비행청소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비행청소년은 부모가 전적으로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던 어떤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때 나는 ‘왜 부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지? 모든 학생이 다 엇나가는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을 했어서 논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목사님이시라나 뭐라나. 결국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지만, 지금도 왜 사과를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무례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의견이 달랐을 뿐인데. 그럼에도 결국, 나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인 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라고 122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친구가 아닌 적으로 보는 이유는,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피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과제를 직시함으로써 아들러가 말한 행동의 목표(자립할 것,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와 심리적 목표(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를 달성할 수 있는데, 이 인생의 과제는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로,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를 일컫는다. 이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하며, 자신의 생활양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한 번 더 이야기한다.
3부의 소제목은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이 말은 내게 타인과의 경계선을 확실히 세워라는 말로 들렸다. 가족상담 강의 들을 때 배웠던 것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가족과 경계선이 모호해서 내 문제가 다른 가족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었던 것 같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보기도 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정욕구를 부정한다. 인정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과제로 주어진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176-177쪽을 읽으며 나는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내가 못하는 것은 엄마가 들고가서 대신 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게 늘 못마땅했는데, 아들러가 속시원하게 이렇게 말했다.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177쪽)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회피하려고 하는 까닭은 곤경에 직면한 경험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하니 프로이트식 원인론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제를 분리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는데, 이 자유는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인정받지 못하든 마음에 두지 않게 되어야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자유라는 말인 것 같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어느 정도는 들어야 사회성이라는 게 길러지지 않나..? 타인의 평가를 너무 박하게 대하는 것 같다. 타인의 평가를 듣지 않아 이상한(이렇게 표현해야 하려나..) 사람들도 있기는 한데.
4부는 유기적 관점의 아들러 심리학을 설명하는 것 같다.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이라고 말하며, 인간뿐 아니라 공동체 감각도 유기적으로 바라본다. 아들러는 과거, 현재, 미래, 동식물, 사물 등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 인정욕구라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내가) 잘 보이기 위한 욕구이므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에 대한 집착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너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때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고,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소속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제를 분리하면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데에는 인간관계가 ‘수평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수평관계라는 것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수평관계는 과연 가능할까? 수평관계를 맺으려면 평가를 그만두라고 하는데, 평가를 내려야 하는 입장에서 교사는 학생들과 수평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물론 상호평가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평가라는 어감 때문인지 평가하고 평가받는다는 것은 ‘수직관계‘에서는 어울려도 수평관계에서는 어울리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칭찬도 벌도 아닌, 타인의 개입이 아닌,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용기부여‘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으며,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또,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내가 한 일로 감사의 말을 듣게 되면 공동체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여기에서 방해가 되는 것이 칭찬이나 벌이 된다. 이 책에서는 칭찬을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고 정의한다(233쪽).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6단계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인정욕구에 매인 수직관계에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5부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필요한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에 대해 설명한다. 자기수용은 ‘자기긍정‘과 구분되어야 하며,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긍정적 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를 수용했으면 타자신뢰가 필요한데, 타자신뢰는 언뜻 보기에는 아가페와 닮았다. 상대방이 배신하더라도 끝까지 사랑한다, 가 아가페라면, 아들러는 상대방이 배신하는 것은 상대방의 과제이니 내가 신경쓸 영역이 아니라고 경계를 짓는(과제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럴 때 타인은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고, 이때 타자공헌을 통해 공동체 감각을 얻을 수 있다. 타자공헌은 자기희생과 구분되는 것으로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를 일컫는다(272쪽). 어떤 사람의 행위가 타자공헌인지 자기희생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분명 자기희생을 하셨는데, 사람들의 이타적인 행동들은 자기희생보다는 타자공헌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는 데 목적이 있는 행위가 많은 것 같아서 말이다. 물론 이 행동들은 수평관계에서의 타자공헌은 아닌 것 같고, 그럼 타자공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려나. 어쨌든 이 타자공헌에서 오는 공헌감이 아들러의 행복이다.
이 책을 읽으며 궁금한 점은, 신생아 때처럼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때에는 아들러 심리학이 적용될 수 없을 텐데 언제부터 적용할 수 있는 걸까, 하는 것이었다. 신생아 때 과제의 분리가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부모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가 있는데, 언제까지 부모가 개입해야 하는 것일까.
아들러 심리학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원인론을 엎어버리는 것이라서 그런지 용어에 대한 이해도 해야 하고 적용도 해보아야 해서 서평이 너무 너무 길어졌다. 생각도 오래 해야 했고 정리하는 데 시간도 걸렸다. 지금도 머리는 복잡하고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를 나의 주인으로 두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자네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겠지.(2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