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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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정혜신, 해냄)

이 책 제목은 많이 보았다.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라서 읽게 되었다. 페이스북에서인가, 언뜻 이 부부가 같이 나온 뉴스(?)를 지나쳤는데, 그래서 나는 남편(이 책에서는 영감자라고 따로 책 표지에 나와있기까지 하다.)도 정신의학과 의사이거나 상담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물론 최근까지 심리기획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현재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은이와 영감자가 둘 다 적혀 있으니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검색을 했는데, 음.. 나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뭐, 제3자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의 영향과 사적인 부분은 따로 봐야 할까? 좀 혼란스럽다(대학원 수업 때 들은 건데, 가장 큰 스트레스 1위는 사별, 2위는 이혼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도 ‘당신이 옳다‘이지 않을까?).
처음 책을 펼치면 영감자 이명수 씨의 글이 나온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만 안 할 수 있어도 공감의 절반은 시작된 거다.‘(9쪽)는 대목을 보고 이 책을 평가하지 말라는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다른 사람에게 충조평판하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책 한 권 읽고 충조평판 안 하기가 쉽나. 쉬웠으면 벌써 했다. 상담 공부 7년 해도 여전히 하고 있는 충조평판인데. 교사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하고 있고. 뭐, 행동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니 변명이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다.
지금도 나는 정신과 의사와 상담가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글쓴이는 사실 정신과 의사보다는 상담가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상담 공부할 때도 둘의 차이를 배웠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정신과 의사도 경험한 적이 있고, 상담가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둘 다 별로였는데, 오히려 대학원에서 만난 동기 언니가, 대학원 교수님들이 훨씬 공감을 잘해줬었다. 물론, 공감받지 못했던 공감을 받은 수업도 있었다. 감정이 차게 식었고, 수업이 끝난 이후로 너무 화가 났었다.
그렇다. 이 책은 공감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공감을 조금 더 잘할 수 있을까, 살짝 기대도 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이명수 씨가 초반에서 극찬을 해서 기대를 했건만. 이 책이 기술적인 부분을 말하는 책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 기술적인 부분이라면 차라리 지금 읽고 있는 [교사의 마음리더십]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옳다‘는 말은 (그릇된) 행동의 배후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글쓴이는 계속 ‘나‘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105쪽)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이 심리적 CPR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밑도 끝도 없이 이 질문, 던져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면서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위험부담을 안는 일이기도 하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상대에게 공감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난 시절의 내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 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120쪽)

역전이를 설명하는 것 같고, 그 상황에서는 자신의 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기도 한다. 저자는 역전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 부분이 안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말에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본 사람들은 타고난 공감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것이 공감이다, 저것이 공감이다, 라고 사례도 들고 비유적으로 설명하지만(개인적으로 왜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썼는지 모르겠다. 비유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본다면 비유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더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공감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나와있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기술적인 책이 아니다. 공감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많고, 그 요소들을 인지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아닌 이상(그 요소들을 인지하면서 대화하면 대화에 에너지가 얼마나 많이 소모되는지 안 겪어본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공감은 힘들다. 책에서도 말한다.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245쪽)‘ 애초에 ‘나는 왜 공감하려고 하는가?‘
나에게 공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보다, 공감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이 이것은 공감이고, 저것은 공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니가 하는 건 공감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알고 있는데, 그걸 다시 각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사람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만 공감이 가능한데, 나는 사람 존재 자체에 관심이 있는 걸까, 그냥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 묻고 있는 걸까? 나를 사랑하는지, 상대를 사랑하는지에 따라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까지 지나쳐간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제대로 공감해주지 않고 윽박지르기만 한 것 같아서. 마음 한 켠에는 늘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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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그리스도인 -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 잉글랜드 P&R 5
매튜 미드 지음, 장호익 옮김 / 지평서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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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그리스도인](매튜 미드/장호익 옮김, 지평서원)

신랑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이다. 신랑은 나보다 훨씬 전부터 개혁주의 신앙에 관심이 많았고 고전 책을 읽어왔다. (요즘은 잘 안 읽는 것 같지만) 주로 읽는 책이 로이드 존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의 책이다. 나랑 연애할 때부터 이 책을 그렇게나 말해왔다. 이 책과 더불어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시리즈, [신앙감정론]도 엄청 말했었더랬다.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이 책의 부제는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이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좀, 아니 많이 무서워진다. ‘나는 그리스도인일까?‘를 계속 생각했다. 두려웠지만 꼭 필요한 논제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신앙관을 견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최근에 발행된 책이 아니다. 지은이 머리말을 읽고 놀랐는데, 무려 1661년에 쓰여진 책이었다. 저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이전 사람이었고, 존 오웬과 같은 시기 사람이었다. 뒤에 보면 나오지만, 영국 정부가 이들을 탄압할 때 존 오웬, 매튜 미드가 함께 그 목록(라이 하우스 공모)에 들어가 있다.-교회사 공부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대답은 ‘예.‘이다. 불신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다 만 사람이다. 따지자면 불신자와 다름 없겠지만,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장에서 어떻게 그런 사람이 나올 수 있는지 성경적으로 설명하면서 아그립바와 부자 청년, 열 처녀 비유를 언급한다. 바울의 논증으로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직접 고백했던 아그립바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부자 청년, 그리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똑같이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렸던,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기름의 준비 여부였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 대한 해석은 내 신앙의 수준이 어떠한가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게 했다(물론 신랑이 워낙 스포일러를 많이 한 탓에 긴장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2장이 매우 핫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데, 2장 제목이 ‘신앙적인 삶에서 큰 진보를 보였는데도, 단지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서는 그 답으로 스무 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얼마나 꼼꼼하고 세세한지, 읽으면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실제로 책의 반 정도의 분량을 차지한다.). 이렇게까지 나누어서 설명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 이런 사례들이 보여도 (개혁주의 교단에서)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통에(웬만하면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둥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랑으로 감싸더라도 바른 교육은 해야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전혀,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 책에서 말한 대로 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 내에 과연 몇 명 정도나 될지 궁금해진다. 그 스무 가지 사례의 소제목 중 충격적인 것만 적어보자면, 큰 은사를 받을 수도 있음, 수준 높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음, 죄를 미워하고 대적할 수도 있음, 은혜를 사모할 수도 있음, 말씀을 두려워할 수도 있음, 말씀을 기뻐할 수도 있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있음,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 그리스도로 인해 손해를 입을 수도 있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음, 성령을 받을 수도 있음,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음,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도 있음, 성화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인데(적고 보니 거의 다 적은 것 같지만), 너무 너무 충격이었다. 적고 있는 지금도 너무 충격이다. 열매로 안다고 하는데 그 열매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게 너무 소름돋고(비기독교인의 선함은 착한 일 수준이지만 기독교인의 선함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성령을 받을 수도, 믿음을 가질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넌 가짜‘라고 말씀하신다면 세상 이보다 더 억울할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신랑과 2장에 대한 내용을 말하며 어디에 해당하는 것 같냐고 물으니 두 세 가지 빼고 다 해당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충격받은 소제목을 적은 것만 저 정도이니, 나도 비슷한 지경이다. 정말 읽다보면, ‘내가 회심한 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죄를 자각하는 게 회심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저 죄를 인식하는 정도에서 끝날 수도 있다고 하니까 내 상태가 그런 상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성적인 죄의 각정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이성의 공통 원리의 작용에서 자연의 빛으로부터 죄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자연적인 양심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84쪽)
한편으로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천국 가는 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유사 그리스도인도(검색해 보니 존 번연도 이 시기의 사람이다.) 이 스무 가지 사례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정리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시간만 많으면 그렇게 해보고 싶다.).
충격받은 소제목의 내용들은 얼마나 더 충격적인지 적어본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67쪽)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79쪽)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를 돕는 것은 새로운 결심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입니다. 즉, 결심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지만, 새로운 본성이 없다면 결심할 수 없습니다.(81쪽)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받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죄를 더 바라보고, 자신의 믿음보다는 자신의 타락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보다는 내재하는 정욕을 더욱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매우 선한데도 매우 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194쪽)

3장과 5장에서 유사 그리스도인이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일 정도로 신앙적인 삶의 진보를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6장에서 유사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머무르는 원인, 7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을 설명하며 8, 9장에서 어떻게 믿음을 검증하고 확증해야 할지 설명한다.
지은이 머리말에 나오는 구절을 끝으로 서평을 마친다.

여러분의 육신, 즉 여러분의 육욕은 사랑하면서 여러분의 영혼은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체를 감싸며 욕망을 채워주면서 영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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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 율리시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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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스캇 펙/최미양 옮김, 율리시즈)

나는 이 책 제목을 어디에서 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빠 서재에서 봤던 것 같은데 잘못된 기억일까. 어째서 이 책 제목을 알고 있는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므로 읽어보았다.
스캇 펙 책은 처음이다. 스캇 펙이 어떤 사람인지 검색해 보았는데, 책 앞면에 나온 소개 이외에 더 자세한 소개는 없었다. 집에 책장이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채 얌전히 꽂혀 있는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스캇 펙 책인 줄 이제 알았다. 아마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학원 수업 들으면서 추천받은 책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그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아마도 읽는다면 한참 뒤에 읽게 될 것 같다.). 스캇 펙이 기독교인인 줄 알았는데(정확하게는 기독교인으로 이 책을 집필한 줄 알았는데-이 책을 아빠 서재에서 봤다면 당연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니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전까지 불교도였고, 이 책을 집필한 이후에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선언했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자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책 내용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책 집필 이후,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그러면 또 서평이 길어질 것 같으므로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훈육, 사랑, 성장과 종교, 은총이다. 은총 파트는 번역은 은총이지만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은혜를 은총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서는 은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번 독서모임에서는 각자가 한 파트씩 맡아서 발제문을 만들기로 했고, 내가 맡은 파트는 3부 성장과 종교 파트여서 3부를 더 공들여 읽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제일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파트는 1부 훈육이었다. 1부에서 저자의 통찰력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19쪽)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훈육이다... (중략)...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중략)...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20쪽)

삶이 힘든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으로 체험하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삶이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훈육,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뭔가 아이러니하다.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깎여져 나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훈육의 결과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다. 삶이 힘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고,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문제를 직면할 용기는 가지지 못한 채.
저자가 말하는 훈육은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에 대한 헌신, 균형잡기 네 가지이다. 훈육은 사용법의 문제보다,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23쪽). 사람들은 고통에 대항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더 고통스러운 편을 택한다.
저자는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삶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을 맛보는 순서를 정한다는 의미(25쪽)라고 말했다.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부모의 양육방식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27쪽). 부모의 삶이 무절제하면서 자녀에게 절제를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랑이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시간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부모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치있는 존재인지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이 느낌은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32쪽). 자기존중감을 가진 아이들은 안정감을 지니게 된다. 안정감이 없다는 것은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위험하고 무서운 곳으로 인식하고 미래에 더 큰 즐거움이나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해도 현재의 어떤 즐거움이나 안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참으로 미심쩍기 때문이다.‘(35쪽)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어릴 때는 그렇게 했었다. 오히려 성인이 된 지금 즐거운 일을 먼저 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져 버렸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가치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어릴 때와 지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
두 번째 훈육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전, 먼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44쪽)으로부터 시작한다. 외부에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저 동정받고 싶은 것 아닐까. PK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도,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부터였는데, 사실 내게 PK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PK라는 말 자체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목회자 자녀들, 즉, 부모와 나 사이의 문제를 목회자와 목회자 자녀인 나 사이의 문제로 특수하게 바라봤던 것이 오히려 더 독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특별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 말이다. 그 특별한 문제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하는 부모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 사는 동안 책임져야 할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분간하는 것이 실존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50쪽)
세 번째 훈육 진리에 대한 헌신은 직면이라고 보아야 할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은 계속 수정되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내가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비합리적 신념에 맞서 합리적 신념으로 바꾸는 인지상담을 좋아해서일 것이다(말이 쉽지 실제로 비합리적 신념을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앞의 훈육들을 훈육하기 위해 필요한 훈육인 균형잡기이다. 이 파트에서는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들로 내 생각을 대신한다.

그리고 삶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죽음이다.(101쪽)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107쪽)

저자는 1부에서 말한 훈육의 기술들(?)을 사용할 힘과 에너지와 의지는 사랑이라고 말하면서(108쪽) 2부에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114쪽). 사랑에 빠지는 것(흔히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사랑을 엄밀히 구분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동굴 이론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참 사랑의 그림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또, 사랑이 아닌 것과 사랑인 것에 대해 차례로 서술하고 있는데(저자는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로 구별한다. 진정한 사랑의 목적은 영적 성장이다.(166쪽)), 다음 대목은 생각해볼 만해서 적어본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할 때에는 그것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다른 사람을 위해 한다 해도 사실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다.(165쪽)

실제로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교회 봉사들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교회 봉사는 최대한 적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긴 하다. 죄인된 사람이 예수님을 ‘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자기 만족을 위해 했으면서 예수님을 위해 했다는 것은 너무 위선적이다.
다음 구절을 끝으로 2부를 마친다.

사랑은 노력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186쪽)

훈육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3부 성장과 종교는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 생각했더니 자기 성장을 하는 데 훈육이 필요하고, 훈육을 하는 데 사랑이 필요하며, 그 사랑에 대한 통찰력을 얻으려면 종교라는 주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며 연결짓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의 편협한 이해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통틀어 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과학도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사실 저자에게 놀란 것이, 이 책을 집필했을 때는 불교도였다고 했는데 323쪽의 질문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더럽고 비참한 문제들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행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하느님에게 저지른 것인가? ...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경향이 문제일까, 인간이 독단적인 게 문제일까? ... 우리가 제거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독단주의인가?
그래서 3부에서의 내 발제문은? 독서모임이 끝나고 나서 말하도록 하겠다.
2부에서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라고 했다. 이 게으름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393쪽). 이 저자의 말에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4부 은총에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말한다. 심리치료 역시 증상을 보고 진단을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낫게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은총이라고 말한다. 4부의 은총 파트는 성경 구절을 신선하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야깃거리가 많고, 독서모임 때 각자 어떤 발제문을 가지고 생각을 나누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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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김기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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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김기현, 성서유니온)

새해, 새로운 책으로 묵상을 하기 전에 묵상 시간에 묵상법에 대한 책을 읽기로 했다. 김기현 목사님은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책으로 처음 만났고(그 책도 아마 페이스북에서 했던 광고를 보고 샀던 것 같은데, 몇 년 전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그 책에서 나온 [동물농장] 책도 사놓고 몇 페이지 읽다가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놓고 있음..), 최근에는 페이스북으로 팔로우하고 있는 분이다.
얇고(그래도 301쪽), 쉽게 쓰였고,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해놓은 책이지만 절대 얕지는 않은 책이다. [독서모임 꾸리는 법]처럼 알맹이가 꽉 찬 느낌의 책이다. 묵상의 기초와 방법, 실천과 문제에 이르기까지 묵상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싫어하는 누군가를 주야로 묵상합니다.‘(15쪽)에서 뜨끔한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2012년 말씀묵상캠프에서 연애편지 읽듯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했던 데에서 한 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싫어하는 누군가를 묵상하듯 성경을 읽어야 한다니 느낌이 완전 다른데 가능할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직도 성경을 엄청나게 많이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위의 캠프에서 묵상의 원어는 ‘하가‘라고 하며 사자가 뼈다귀를 계속 핥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이 또한 8년 전이니 정확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는 원래 의미가 ‘중얼거리다‘라고 하는 데서 그동안 묵상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읽기를 강조한다. 눈으로 읽는 것 말고 소리내어 읽기. 중얼거리는 것 자체가 소리내어 읽어야 가능한 일이니. ‘요컨대, 성경이 말하는 묵상이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는 행동을 가리킵니다.‘(33쪽)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33쪽)라고 하는 대목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와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모국어(?)의 느낌이었기에 한 번도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면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나름 성경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절로 겸손해지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읊조리다‘, ‘읊다‘는 말에는 소리를 낸다는 뜻과 함께 되풀이한다는 뜻도 있습니다.‘(34쪽)
‘˝묵상은 곧 생각˝이 아닌 ˝묵상은 곧 읽기˝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반복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45쪽)

이 두 구절만 가지고도 이때까지의 묵상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묵상 시간에 성경을 읽을 때, 대학생 때 이후로는 한 번도 소리내어 읽은 적이 없는 것 같고, 반복도 세 번을 넘기지는 않은 것 같고, 한 두 번 읽다가 생각이 들면 썼기에 텍스트에 침잠하기보다 내 생각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부 묵상의 방법에서는 왕초보와 중급자, 목회자, 직장인을 위한 묵상의 방법이 서술되어 있어 과연 책의 제목처럼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이 쓰였다. 나는 중급자와 직장인을 위한 묵상 방법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중 ‘요지는 각자의 경험으로 본문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스스로를 읽게 되는 것이지요.‘(78쪽)라고 적힌 부분에서 일반적인 독서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이게 ‘렉티오 디비나‘이려나.). 그렇다면 아마도 일반적인 독서와 성경 묵상의 차이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중급자의 묵상법으로 ‘제목 정하기‘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라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야기적 동일시‘는 처음에는 거부 반응이 들었다. ‘이야기적 동일시‘를 맥락에 맞지 않게 자신의 감정으로 해석하며 설교하시는 분을 보았던 기억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러므로 묵상인으로서 우리는˝이게 무슨 뜻이지?˝보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한다‘(85쪽)는 구절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만(아무래도 텍스트에 빠지기에는 그 질문이 훨씬 유력하므로) 그 방법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는 주춤거리게 되는 것 같다. 묵상 본문으로 설화체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일까.
직장인을 위한 묵상법에서 많은 분량은 묵상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시며 대체로 10-15절이면 충분하다(133쪽)는 구절을 읽고서는 나는 10-15절도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문맥까지 고려하려면 그 정도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조그마한 것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세세하게 따지는 스타일이라서일까.).
적용 부분은 권일한 선생님의 강의에서도 들었던 ‘적용하지 마라‘가 나왔다. 적용의 방법으로 SPACE와 3P를 언급하는데, SPACE는 묵상캠프에서 묵상할 때의 질문과 일치해서 조금 놀랐다.
묵상과 기도 파트에서는 묵상과 기도를 이원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기도가 없다면 묵상을 제대로 한 것일 리 없습니다.‘(168쪽), ‘그래서 뮬러는 잘라 말합니다. 기도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 양육된 후에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173쪽)는 구절을 보고 묵상을 제대로 하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반복한다는 것은 중언부언이라는 구절 때문인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묵상이 곧 기도이고, 기도가 곧 묵상이라면,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경 봉독은 대충 넘어가도 되는 순서가 아닙니다.˝(239쪽) 저자는 거스리의 말을 인용했다. 친정 교회에서는 다같이 봉독, 교독을 했고, 지금 교회에서는 목사님만 봉독하신다. 이 책을 읽고 보니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묵상의 문제 중 ‘묵상은 자의적인가?‘ 파트에서는 지금 읽고 있는 [아직도 가야할 길]을 또 읽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3부 ‘성장과 종교‘ 끝부분에서 과학, 아기와 목욕물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는 루터의 말도 [유사 그리스도인]에서였는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봤는지 아무튼 또 보게 되었다.
매우 세세한 부분이지만 마시멜로 이야기나 요더 이야기를 읽으며 책이 나오기 직전에 김기현 목사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봤던 기억에 아, 이 부분 쓰시려고 그랬던 거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있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복 있는 사람 큐티집을 좋아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일부러 쓰시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묵상모임을 만드는 것은 더욱 간절해졌지만, 한 번 흐지부지되었던 까닭에 어떻게 모임을 운영하는 것이 좋을지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바라기는 내가 운영하든 숟가락을 얹든 묵상모임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묵상이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자기확장(스캇 펙 버전)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전도서를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계속 올렸던 것도 자기확장의 욕구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다음 책 함께하실 분 어디 없나요..ㅠㅠ
다음 책에서는 말씀에 침잠해서 내 생각보다 말씀이 앞서면 좋겠다.
(여담인데, 성령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은 믿지만, 성령님이 정확하게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왜인지 거부반응이 든다. 정말 끝으로... 오늘도 길어진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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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로버트 먼치 글, 안토니 루이스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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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로버트 먼치 글/안토니 루이스 그림/김숙 옮김, 북뱅크)

지난해 페이스북에 올린 [연말정산-아기가 좋아한 책] 편에서 댓글로 추천받은 책이다.
새해 제일 처음 읽은 책이 이 책이 될 줄이야.
책은 어제 도착했지만 안 보고 있다가 아기가 안아달라고 해서 안고 이 책을 연거푸 두 번 읽었다.
처음 읽었지만 자장가(?)가 나오자 금방 곡조를 붙일 수 있었다.
글이 제법 긴데도 아기는 책을 잘 보았다. 재미없는 책이 나오면 덮어버리거나 다른 책 읽어달라고 하는 아기를 생각하면 이 책은 재미있나 보다.
처음 읽을 때도 울컥했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자장가 부르면서 눈물이 났다. 이 책 맨 뒤에 보면 글쓴이 로버트 먼치에 대해 나오는데, 이 자장가가 사산된 두 아이를 기리기 위해 지은 노래였다는 글을 읽고 보니 감정이입이 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있어서도, 아기가 커감에 따라 바뀌는 커튼과 이불, 그리고 아기가 가지고 있던 곰 인형이, 성인이 되었을 때 낡아진 모습으로 갓 태어난 아기 옆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세세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이 산다는 이 책, 왜 추천하셨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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