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 - 현대의 바리새인 신앙에 대한 경고
래리 오스본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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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래리 오스본/장혜영 역/새물결플러스)

몇 년 전에 사두고 앞 부분 조금 보다가 책꽂이에 꽂아놓았던 책인데 다시 보았다. 이 책을 사게 된 경위가 어떠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떤 목사님의 추천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때 당시 핫하게 떠오르던 출판사 때문이었는지 제목이 재미있어서였는지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현대의 바리새인 신앙에 대한 경고‘이다. 내가 좀 바리새파적인(?) 부분이 있기도 해서 이 책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7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서론격이고, 2부부터 7부까지는 ‘현대의 바리새인‘의 특징-교만, 배타성, 율법주의, 과거의 숭배, 획일성의 추구, 은사의 투영-을 서술하고 있다. 각 부가 끝날 때마다 토의 질문이 있어서 함께 읽는 책이 되도록 만들었다.

2부는 교만 파트인데, 교만 부분을 읽을 때는 좀 찔리는 듯 했으나, 3부를 읽을 때에는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책이 생각나서 매우 언짢았다. 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기독교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고,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아직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이들을 초청해서 예수님과 성경이 무엇인지 와서 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건물은 (그것이 가정 교회든 대형 교회든) 가능한 한 매력적이고 편안한 것이 좋다.(110쪽)

이 대목을 보고서 반감이 들기도 했다. 이게 복음이고 전도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수님과 성경을 편안한 환경에서 보여주면 더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아마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책이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저자에 의하면 10장에서 말하는 바 ‘복음 중심적 그리스도인‘이다. 저자는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여러 그리스도인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러한 분류 기준이 성경에 비추어 타당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분류를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율법주의에 대한 저자와 나의 정의가 다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또 138쪽, ‘많은 헬라 그리스도인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율법을 포함하여 구약의 율법들을 모두 성취하셨다고 주장했다. 유대의 율법, 무엇보다 구원의 능력이 없는 율법을 자신이 왜 지켜야만 하는지 이들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율법을 왜 지켜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서‘라는 부분에 의문이 들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율법은 지키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6부에서는 획일성의 추구가 하나됨을 파괴한다는 측면에서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할 것인가, 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자는 이단은 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저자의 포용의 경계는 너무 느슨해서 어디까지가 이단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야기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포용하신 사람은 어디까지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그것을 이 책에서는 경계표지라고 하는데, 경계표지는 불가피한 한편 누가 천국의 일원이고 아닌지에 대한 우리의 경계표지가 하나님보다 좁아지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194쪽) 이 말이 모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의 경계표지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당연히 좁아지거나 넓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경계표지를 좁히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저자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저자는 용어의 정의가 주는 문제들을 매우 간과하고 있다. 같은 단어라도 개인이 경험한 바에 따라서 생각하는 뜻이 다 다른데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현대의 바리새인은 수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수용하니 현대의 바리새인 너네도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해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상대주의가 모순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맥락과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가 바라보는 ‘성도들‘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교회 내에서 예수님도 하지 않으실 잣대질(?)을 내가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면서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지는 않았는지, 교회 내의 성도의 범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초대 교회들도 굉장히 문제가 많았고(그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에도 성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에 내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문구로 글을 마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면 당신은 전임사역자다.(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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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자유로운 존재이다. - P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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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신약편) - 낮은 자의 예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김동문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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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신약편)(김동문 글/신현욱 그림/선율)


구약편에 이어 신약편을 읽었다. 읽은지는 한참 되었는데 감상평은 좀 늦었다.
개인적으로는 구약편이 더 재미있었다.
신약편에서는 성경 순서대로 전개하신 것 같지는 않았다.
구역편에 이어 신약편에서도 그림 그리신 목사님의 유머 코드는 역시나 나랑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지적 구원 시점이라니.. 정말 센스 최고이십니다!)

신약편에서는 이스라엘 서민(?)들의 생활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쉽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삯군으로 부르셨다는 것(그 당시의 목자의 이미지랄까..)-이것은 현재에도 그러할 것이다.-인데 내 양을 먹이라고 부르신 것이 삯군 목자의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백부장이 거느렸던 100명의 구성원들-이 파트를 보면서 신약에 종이 그렇게나 많이 등장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년 된 양은 결코 어린 양이 아니라는 부분은 깜짝 놀란 부분이었다. 개를 키워보긴 했지만 개를 엄청 좋아해서 키운 것은 아니어서 그런지 개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그러다보니 동물 전반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년 된 어린 양은 1년 된 젊은 양이라고 해야 할까..
바울의 직업이었던 텐트메이커의 생활 모습도 어떤지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상상했던 텐트메이커가 아니었다.).

이래 저래 잘못 알고 있고, 잘못 상상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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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구약편) -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김동문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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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구약편)(김동문 글/신현욱 그림/선율)


권일한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표지를 제대로 보지 않았음) 만화책(?!)이었다.ㅋㅋㅋㅋㅋㅋㅋ 그림이 글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책이 술술 넘어갔다. 아무래도 시각적 효과가 있으니 글을 이해하고 기억하기에는 글만 있는 여타 성경 관련 책에 비해 훨씬 좋았다. 그리고 목사님 개그 코드도 나랑 조금 맞는 것 같다.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제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잘 보는 내 성향상 찾아낸 부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아무튼.(여담, 출판사도 매우 생소하다.)
추천사부터 읽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분부터 음..? 싶은 분까지 다 있었다.

책 내용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창세기로 끝난다. 일에서 시작하여 안식으로 끝이 난다. 일부러 인클루지오 구조를 쓰신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성경의 순서대로 나가는구나, 생각했는데 맨 끝에서 난데없이 다시 창세기라니, 라고 생각했었다.
또, 얼마나 생각을 안 하고 성경을 읽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했던 것은 보통 양이 아니었음을. 롯이 대접했던 게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보낸 양 또한 엄청났는데, 그걸 모르고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했다니! 그것도 창세기부터 앞부분 일부는 해마다 시작하는 부분이어서 수십 번 읽었다고 자만했는데 읽는 게 읽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의 목사님들을 생각하고 제사장을 상상했었는데, 실제로는 제사장이 그런 급(?)이 아님도 알게 되었고, 엘리야가 쉬었던(?) 로뎀나무는 실제로는 큰 나무가 아니라 댑싸리 수준이었음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상이라든지, 머리를 든다든지 하는 부분도 이 책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그냥 내 식대로 해석했을 게 뻔하다.
왠지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가 생각나는 책이었다.
물론 성경보다 그 시대의 문화나 환경을 앞세워서는 안 되겠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신약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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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외계인을 만나다 - 책벌레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시를 쓰고 놀며 배운 행복의 법칙
권일한 지음, 반예림.이가진 그림 / 우리교육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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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외계인을 만나다(권일한 글/반예림, 이가진 그림/우리교육)


권일한 선생님은 [글쓰기가 좋아졌어요] 책부터 알게 되었다. 글쓰기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책이었다. 그리고 2014 기독교사대회에서 선택식 강의 강사님으로 만났고, 선생님이 쓰신 책 여러 권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사인본을 보내주신다고 하여 구입한 두 책 중 한 권이 이 책이다.
선생님이 쓰신 책 중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은 [글쓰기가 좋아졌어요] 이후 이 책이 처음이다(선생님께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책 읽기가 힘들었던 최근 몇 년이었고, 배움을 목적으로만 책을 읽기에는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하며) 책만 사놓고 보지 않았던 몇 년이었는데, 어째선지 요즘 다시 책을 읽고 있다. 일단 흥미진진한 책부터 시작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책도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1부는 아이들의 동시와 선생님의 덧붙임글(?), 2부는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1부를 읽으면서 아이들이 솔직하게 마음을 끄집어내는 데에 감동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끄집어내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궁금했다. 내 마음은 ‘나도 그렇게 가르치고 싶다’인데, 그렇게 가르치고 싶은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서인지 헷갈렸다. 정말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보고 싶은 걸까? (워낙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니) 그저 내가 궁금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보고 싶은 건 아닐까? 또, 내가 그렇게 가르치지 못함은,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보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 더 큰 까닭에 아이들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시에 대한(?) 선생님의 덧붙임글(?) 중 마음에 와닿는 글들이 있었다.
‘세계 평화가 별건가요? 내 마음대로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문득, 내가 너무 순서를 정해놓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정한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불편해하고 윽박지르고 소리낸 건 아니었나...

2부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물론 힘드셨겠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아이들을 외계인으로 바라보는 시각,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다니시는 모습, 아이들을 대하시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때까지 참 많이 혼냈었다. 어릴 때부터 많이 혼나면서 자라오기도 했고,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객관화시키게 되기는 했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여전히 기복이 크다. 내 안의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아이들을 통제 안에 두지 않으면 힘들어하고, 통제 안에 있지 않으려 하는 아이들을 외계인 취급하며 지구인이 되지 않는다고 닦달했던 것 같다. 두렵게 하면 빨리 행동이 고쳐지는 것처럼 보이니까, 나 역시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치중했던 것이다.
6개월 유예기간(?!) 동안 공부한다고 하루아침에 내 행동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날마다 뼈를 깎지 않으면, 날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외계인 같은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지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자연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자연을 사랑하라고, 자세히 관찰하라고 말하지는 못할 텐데, 하는 생각에 답답함이 들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몇 분야만 파는 편협한 시각이 그동안 그대로 아이들에게 상처로 다가갔던 건 아닐까.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는 건 나부터 시작이어야 하는데, 난 그게 참 어렵다(그래서 글쓰기와 연결도 어려워하는 것이겠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무엇을, 왜 가르치고 싶은 걸까? 복직하기 전까지 계속 던지게 될 물음이겠지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6개월 뒤에는 어느 정도 답을 찾게 되길.

덧. 아, 이렇게 길게 쓰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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