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귐
필립 얀시 지음, 차성구 옮김 / IVP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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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필립 얀시/차성구 옮김, IVP)

필립 얀시 책으로는 아마도 네 번째 읽었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이미 13, 14년 전쯤 되었다. 다시 읽게 된 것은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독서모임 책이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만큼 고구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고구마였다. 얼른 사이다를 마셔야 할 것 같다(사이다로 낙찰된 책은 [유사 그리스도인]). 아무래도 필립 얀시와 나는 신앙의 결이 무척이나 다른 모양이다. 게다가 얀시를 수용하는 것도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진다더니 아직 불혹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얀시의 머릿속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더 쉬웠던 것 같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사례의 나열이기나 했지, 이 책은 사례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있고, 여러 가지가 짬뽕으로 섞여 있다 보니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야 해서 힘들었다.
어릴 때 논리야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 권 중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예쁜 눈, 제일 예쁜 코, 제일 예쁜 입, 이런 식으로 제일 예쁜 부분만 모은 얼굴이 실제로는 제일 예쁜 얼굴이 아니더라는 내용.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책이 그런 느낌이 들어서였다. 얀시는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고, 책도 많이 읽었고, 경험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것들을 다 끌어모으니 제일 좋은 책이 되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또, 분당우*교회 목사님 설교도 생각났다. 얀시처럼 예민한 감성, 감정에 호소하는 것 같은 서체와 분위기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달 독서모임 책에서 얀시에게 실망했기에 이번에도 실망감 가득 안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닐까, 계속 자기검열을 했다.
이 책은 대략적으로 의심에서 시작해서 회복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라고 소개해야 할까. 의심이 믿음으로 가는 출발점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 신앙이 자란 것은(자랐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계시는지에 대한 의심이 만연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때부터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6쪽에 재미있는(?) 기도가 나온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주님, 이 고난을 내게서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반면, 옥에 갇히고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과 가난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여, 이 고난을 견뎌 낼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와 핍박받는 그리스도인, 가난한 나라와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내 기도가 바뀐 과정이 이랬다. 처음에는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해주세요.‘였고, 그 다음에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였고, 그 다음은 ‘힘든 일을 잘 버틸 수 있게 해주세요.‘였다. 아마도 그 다음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이 되겠지만 그 단계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겪고, 그 가운데 믿음으로 이겨나갈 때마다 기도는 바뀌게 되는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학생 때 선교단체 간사님이 ‘믿음은 이성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다.‘고 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분명 그런 믿음은 논증이 아닌, 감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이 구절을 읽으니 [신앙감정론]을 꼭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곧 복직인데 한 달에 세 권 읽을 수밖에 없고 도대체 언제 읽느냐는 말이다.). 믿음이 감정을 통해 형성된다? 믿음은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나. 교리를 공부하는 이유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풍성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음, 루이스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루이스도 늘 어려웠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고, [나니아 연대기]는 소설 속에 녹아든 루이스의 세계관에 경탄하며 읽었고,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의문나는 몇 구절들을 소개하며 내 생각을 써본다. 싸우자는 것은 아니고,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한 것임을 밝힌다.

그 교리 가운데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대로 효력을 발휘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15쪽)

자칫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교리와 신학을 가르쳤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까지 바닥을 치고 있을까.

5세기의 신비주의자나 글도 모르는 이민자가 20세기의 신학자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 수도 있다.(32쪽)

아무래도 나는 신비주의를 수용할 생각이 없어서, 신비주의에는 거부반응이 든다. 신비주의자들의 확신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인가? 그 확신은 성경적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확신은 성령님께서 주신 확신이 분명한가? 개인적인 기도는 은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면, 굳이 저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것 운운하는 이유는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하는 걸까?

즉, 지금 현재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과거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것 역시,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과 함께한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그 위대한 조상들 역시 ‘시험‘과 ‘의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99쪽)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서인가? 시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 이야기가 그런 이유였나?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닐까?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떠오르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 과거를 계속 되돌아 본다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닌가?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말씀하셨을 수는 있지만, ‘시험‘과 ‘의심‘의 시간을 견뎠던 위대한 조상들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너무 자의적인 해석인 것 같다.

제일 황당했던 주장은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본능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그분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앙 생활이란, 때로는 마치 그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하는 행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며, 선이 악을 정복할 것이고, 결국에는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될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완전히 확신할 수 없고,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나를 자극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 많은 아버지인 것처럼 여기고,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웃들을 대한다.(120쪽)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하다니,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라는 것 아닌가? 신랑은 이 부분을 듣더니 ‘세뇌‘, ‘자기기만‘이라고 했다. 믿음은 없지만 그렇게 ‘여긴다‘는 것. 내가 그렇게 살아봐서 안다. 그것은 가식이다. 가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목회자이시니 믿음이 있는 양, 사실인 것처럼 여기고 행동했다. 부모님이 그러했듯, 나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썼다. 껍데기를 부수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 ‘여기면‘ 믿음이 생기나? 천만의 말씀.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행동이 없기에 믿음이 없다고 여긴다면, 실제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여겨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가차없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가차없어야 바닥까지 갈 수 있고, 그래야 간절해질 수 있다. 믿음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생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우연히‘ 만날 수 없다. 내가 나서서 찾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가시적인 단서를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행동, 그같은 추구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121쪽)

내가 하나님을 찾아나서다니, 개혁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부분은 얼핏 보면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이게 바로 알미니안적 발언.). 하지만, 우리가 노력하는 것 같은 그 일들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되는(섭리) 일이라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늘 소제목의 처음과 끝에 작은 글씨로 소제목과 연관 있는 글들을 실어놓는데, 155쪽 소제목 밑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추구할 수 있는 정도의 암시만 주실 뿐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것을 알려 주시지는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될 것이나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귀하게 여기신다.
-론 한센

이 부분을 본 신랑은 이 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셨다. ‘ 하나님이 암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발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간다면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하나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결정적으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게 되었는지를 여러 자리에서 말해 왔는데, 그것은 성경도, 기독교 서적도, 누군가의 설교도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은 자연과 클래식 음악,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이 세계 속에 누군가의 선함과 은혜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162쪽)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일반계시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는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한 문제이기에.. 여기서 얀시가 발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클래식 음악,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하나님(신)을 만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이니까.

이 외에도 정말 많지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적으면 적을수록 얀시와 내 신앙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3부의 하나님에 대한 내용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4부 연합 : 전혀 다른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다‘는 제목만 보더라도 신인합일을 이야기하고 있고(이 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5부 성장의 3단계도 하나님을 너무 인간에 끼어맞추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6부 회복은 에덴으로의 회복을 말하는 것 같아 계시록의 새 나라와 새 땅이 에덴은 아닐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이번 책도 정말 꾸역꾸역 읽었다.
20대 때에 도움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거짓 확신이었을까. 모호하게 설명하며 대충 뭉뚱그려 놓음으로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책은, 나에게는 너무 넓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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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2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22 0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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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전경아, 인플루엔셜)

[미움받을 용기]는 페이스북에서 한때 아들러 심리학이 유행했을 때 구입했다. 그게 몇 년 된 것 같은데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아들러 심리학에 근거해서 쓰인 [학급긍정훈육법] 책도 구입했던 것 같은데 결혼한 이후에 샀던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아들러는 꽤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아들러의 이론을 기시미 이치로가 각색(?!)한 것이라 아들러의 이론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가 후미타케가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해석 책(?)을 보고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해석 책만 봤다고 하기도 했다.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고민인 ‘행복은 무엇인가‘를 아들러 심리학으로 풀어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한 학자의 이론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책으로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요즘 심리/상담 관련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결과를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복직을 앞두고 생긴 심리 현상이다.)이 심리/상담 책을 읽게 만드는 것 같다. 성경을 읽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으니까 책을 통해 빨리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심리/상담을 교회로 끌고오는 데 대한 비판은 나에게부터 적용해야할 것 같다. 이런 모순덩어리라니.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형식을 띠고 있다. 한 청년이 철학자를 찾아와 철학자의 주장(세상은 단순하며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을 반박하려다가 철학자의 의견(아들러 심리학)을 따르게 되는 내용이다. 총 5부로 되어 있고, 아들러의 용어(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들을 대화에 넣어 사용함으로써 아들러 심리학을 설명한다.
1부에서는 지금까지 사회에 만연한 프로이트식 원인론에 반박하는 아들러식 목적론이 등장한다.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일이 현재의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트라우마가 있다.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부정하는데, 과거의 일이 현재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며,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데에는 의심이 들긴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고 해서 모든 자녀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부모가 자녀를 방치했다고 해서 모든 자녀가 엇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꼭 트라우마가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물론 반대급부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경험 그 자체에 초점을, 아들러는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아들러의 목적론은 내가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들었던 교수님의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그 일을 해서 당신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현재의 생활양식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 7년이 다 되어가는 그 수업 당시에도 매우 획기적이었던 질문이었고, 지금도 그 질문을 종종 떠올리곤 하는데, 프로이트식 원인론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인지 아들러식 목적론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의 철학자가 5부 끝에서 새로운 양식을 익히려면 지금껏 살아온 세월의 반을 투자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7, 8년은 더 지나야 아들러식 목적론을 익히게 되려나. 아무튼, 주변인들 중 저 질문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잔인할 수 있지만,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자신에게 그 책임을 떠넘김으로서 현재의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책임전가를 매우 잘하는 인간의 본성과 너무나도 일치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인론과 목적론, 둘 다 성경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원인론에 둘러싸여 살아와서 성경도 원인론으로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5부 끝에서 다시 나오지만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인생을 선으로 보고, 아들러식 목적론은 인생을 점으로 보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초점을 두고, 아들러는 현재에 초점을 둔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니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부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장은 용어 정리가 필요한 내용이라서 서평이 길어질 것 같다. 인간은 무기력하게 태어났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보편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우월성 추구‘라고 한다. 우월성 추구는 경쟁의 의미가 아니며,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를 구분짓고 있는데, 열등감이라는 말을 현재 통용되는 맥락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이 아들러라고 한다. 열등감은 정상적인 심리 상태(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도착적인 심리 상태, 즉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한다. 열등 콤플렉스는 ‘권위 부여‘ 같은 ‘거짓 우월성‘으로 드러나는 ‘우월 콤플렉스‘로 발전하기도 한다. 예전에 낮은 자존감과 교만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미 아들러가 이론으로 정립한 내용이었다. 우월 콤플렉스 중 하나는 ‘불행 자랑‘이라는 것도 있는데, 자신의 불행을 뽐내듯 말하며 타인이 위로하려고 하면 너는 내 마음을 몰라, 같은 식으로 대하여 주변인이 그 사람을 신중하게 대하게 만들며, 주변인보다 자신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돌 맞을 각오하고 쓰는 말이지만) PK(목회자 자녀들) 모임 중 일부도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PK 이외에는 PK를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PK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자신의 불행을 뽐내듯 말하며 타인이 위로하려 들면 너는 내 마음 몰라, 라고 하며 주변인이 더 다가설 수 없게 되는 것, 이것이 불행 자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마 내가 더 이상 PK 모임에 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측면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적인 분노로 화가 났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는 당사자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이론에 대한 예로 어릴 때 부모의 학대로 비행청소년이 된 사례를 꼽았는데, 프로이트식으로는 ‘부모의 학대가 비행청소년이 되게 했다‘이지만 아들러식으로는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비행청소년이 되었다‘고 해석하게 된다. 부모의 학대와 비행청소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비행청소년은 부모가 전적으로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던 어떤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때 나는 ‘왜 부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지? 모든 학생이 다 엇나가는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을 했어서 논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목사님이시라나 뭐라나. 결국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지만, 지금도 왜 사과를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무례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의견이 달랐을 뿐인데. 그럼에도 결국, 나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인 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되네.‘라고 122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친구가 아닌 적으로 보는 이유는,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피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과제를 직시함으로써 아들러가 말한 행동의 목표(자립할 것,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와 심리적 목표(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를 달성할 수 있는데, 이 인생의 과제는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로,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를 일컫는다. 이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하며, 자신의 생활양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한 번 더 이야기한다.
3부의 소제목은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이 말은 내게 타인과의 경계선을 확실히 세워라는 말로 들렸다. 가족상담 강의 들을 때 배웠던 것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가족과 경계선이 모호해서 내 문제가 다른 가족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었던 것 같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보기도 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정욕구를 부정한다. 인정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과제로 주어진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176-177쪽을 읽으며 나는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내가 못하는 것은 엄마가 들고가서 대신 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게 늘 못마땅했는데, 아들러가 속시원하게 이렇게 말했다.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177쪽)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회피하려고 하는 까닭은 곤경에 직면한 경험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하니 프로이트식 원인론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제를 분리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는데, 이 자유는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인정받지 못하든 마음에 두지 않게 되어야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자유라는 말인 것 같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어느 정도는 들어야 사회성이라는 게 길러지지 않나..? 타인의 평가를 너무 박하게 대하는 것 같다. 타인의 평가를 듣지 않아 이상한(이렇게 표현해야 하려나..) 사람들도 있기는 한데.
4부는 유기적 관점의 아들러 심리학을 설명하는 것 같다.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이라고 말하며, 인간뿐 아니라 공동체 감각도 유기적으로 바라본다. 아들러는 과거, 현재, 미래, 동식물, 사물 등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 인정욕구라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내가) 잘 보이기 위한 욕구이므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에 대한 집착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너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때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고,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소속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제를 분리하면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데에는 인간관계가 ‘수평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수평관계라는 것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수평관계는 과연 가능할까? 수평관계를 맺으려면 평가를 그만두라고 하는데, 평가를 내려야 하는 입장에서 교사는 학생들과 수평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물론 상호평가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평가라는 어감 때문인지 평가하고 평가받는다는 것은 ‘수직관계‘에서는 어울려도 수평관계에서는 어울리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칭찬도 벌도 아닌, 타인의 개입이 아닌,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용기부여‘라고 하는데,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으며,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또,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내가 한 일로 감사의 말을 듣게 되면 공동체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여기에서 방해가 되는 것이 칭찬이나 벌이 된다. 이 책에서는 칭찬을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고 정의한다(233쪽).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6단계에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인정욕구에 매인 수직관계에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5부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필요한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에 대해 설명한다. 자기수용은 ‘자기긍정‘과 구분되어야 하며,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긍정적 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를 수용했으면 타자신뢰가 필요한데, 타자신뢰는 언뜻 보기에는 아가페와 닮았다. 상대방이 배신하더라도 끝까지 사랑한다, 가 아가페라면, 아들러는 상대방이 배신하는 것은 상대방의 과제이니 내가 신경쓸 영역이 아니라고 경계를 짓는(과제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럴 때 타인은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고, 이때 타자공헌을 통해 공동체 감각을 얻을 수 있다. 타자공헌은 자기희생과 구분되는 것으로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를 일컫는다(272쪽). 어떤 사람의 행위가 타자공헌인지 자기희생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분명 자기희생을 하셨는데, 사람들의 이타적인 행동들은 자기희생보다는 타자공헌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는 데 목적이 있는 행위가 많은 것 같아서 말이다. 물론 이 행동들은 수평관계에서의 타자공헌은 아닌 것 같고, 그럼 타자공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려나. 어쨌든 이 타자공헌에서 오는 공헌감이 아들러의 행복이다.
이 책을 읽으며 궁금한 점은, 신생아 때처럼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때에는 아들러 심리학이 적용될 수 없을 텐데 언제부터 적용할 수 있는 걸까, 하는 것이었다. 신생아 때 과제의 분리가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부모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가 있는데, 언제까지 부모가 개입해야 하는 것일까.
아들러 심리학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원인론을 엎어버리는 것이라서 그런지 용어에 대한 이해도 해야 하고 적용도 해보아야 해서 서평이 너무 너무 길어졌다. 생각도 오래 해야 했고 정리하는 데 시간도 걸렸다. 지금도 머리는 복잡하고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를 나의 주인으로 두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자네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겠지.(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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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 단단한 기독교 시리즈 7
신호섭 지음 / 좋은씨앗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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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신호섭, 좋은씨앗)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꾸역꾸역 읽고 있을 때, 이 책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생일) 선물로 책을 받기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얇은 책인데 어쩐지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아서 조금 안달이 났다. 운동을 해서인지 겨울이 와서인지 신랑이 불러주는 찬송가에 아기보다 계속 빨리 잠드는 현상으로 밤에는 도통 책을 읽을 수 없고 아침에는 묵상을 주로 하다보니 묵상을 다 하면 아기가 깨는 일이 발생해서 진도가 통 나가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아기보다 일찍 잠들었지만 새벽에 잠이 깨어 잠이 오지 않는 통에 이 책을 다 읽고 서평을 남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으면서 답답함에 괴로워하다가 이 책을 읽으니 고구마 먹다 사이다를 마신 듯 체기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궁금해서 앞의 몇 장을 읽다 보니 계속 읽게 되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읽게 되었다. 독서모임 전까지 다 못 읽을까 싶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얼른 다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먼저 다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의 5대 표제에 대한 책이다. 종교개혁의 5대 표제는 흔히 5 솔라로 말하는데,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이다.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은 20대 시절 마음에 와 닿아서 라틴어(라틴어식 영어라고 해야 할까..)로 메신저 대화명을 해놓곤 했었다. 그때 5대 표제를 다 알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표제를 아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5 솔라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실제로는 3솔라, 1솔리, 1솔루스) 이 책의 순서를 정한 의미(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와 부록(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4대 특징)을 저술한 까닭을 서문에서 밝힘으로써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오직 믿음을 제일 처음에 두었다고 했고(10쪽), 교의신학에 기초하여 썼다고 했다(13쪽). 교의신학이 무엇인지는 서평 쓰고 나서 더 공부해 보는 것으로 한다(동생한테 물을까.).
5대 표제에 대한 책인 만큼 각 표제가 소제목이 되고, 소제목에 따른 내용이 전개되기 전에 소제목과 관련된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내용 일부가 함께 실려 있어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이 책은 하나의 설교집인데, 성경 구절과 5대 표제를 연결지어 설교하신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 같았다. 교단과 교파에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때를 살고 있는 지금은 교리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성경을 읽을수록, 신앙생활을 할수록, 교회사가 궁금해지고, 선조들은 왜 이런 신앙고백들을 했으며, 웨스터민스터 대/소요리문답과 도르트신경을 신앙고백의 골자로 하는 교단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써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믿는 바를 행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요즘은 교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5대 표제를 하나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이 만든 표제도 아니지만, 후대 사람들이 이렇게 다섯 개의 표제를 만든 데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오직 믿음
첫째, 오직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중략)... 바라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영혼의 행위입니다...(중략)...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믿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19쪽)
믿음이 무엇인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보통 믿는다고 하면 사람이 어떤 대상을 ‘믿는‘ 행위에 집중할 때가 많다. ‘사람‘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시작은 주님께서 하시고 우리 믿음의 마지막은 우리가 마치는 것이 아니(24쪽)‘라는 저자의 말처럼 믿음의 초점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져야 할 것 같다.

2. 오직 은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갑갑했던 이유를 알았었다. ‘...선한 일이 은혜를 낳지 않고, 도리어 은혜가 선한 일을 낳습니다.‘(48쪽)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서평으로 갈음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51쪽)

내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오히려, 이 구절을 읽으며 위로를 얻었다.

3. 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의 핵심 내용은 아니지만 어떤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구절을 가져온다.

여러분은 무슨 이유로 목사를 잘 섬깁니까? 목사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오직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신 그리스도를 가장 잘 설교하는 영광스러운 설교자의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고 존경해야 합니다.(66쪽)

사실 이 이유로 목사님을 잘 섬기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이때까지 들어왔던 것도 그렇고. 얄팍하게 복 받으려면 목사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하니까 거부반응이 드는 것을.

중보자이시고 대속자이시며 유일한 주님(the Lord)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께 삶을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죄 사함은 좋아하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기뻐하며, ‘오직 예수‘라는 찬양을 부르기 좋아하지만 정작 예수님께 생명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좋지만 나의 삶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67-68쪽)

대학원에서 마지막 학기에 발달심리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이 자주 하신 말씀이 있다. 그 일을 했을 때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 사람은 자기가 얻는 것이 있는 쪽으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 것‘과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좋아하지만 정작 고통을 ‘얻는 것‘은 싫어한다. 그리고 내 것(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지만)을 내어주는 것도 싫어한다. 손해보기 싫어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4.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 소제목 옆에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강해를 읽을 때 갸우뚱했는데, 이 대목 때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것이라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담뱃불을 끄고 파이프를 멀리 던져 버렸을 것입니다.‘(70쪽) 실제로 로이드 존스는 골초였다고 하고, 금연을 하게 된 것도 건강상의 이유로 금연을 하게 된 것이라고 신랑이 말해주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영광이 하나님께, 또는 하나님을 향해 영광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73쪽) 종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말을 많이 하고, 사람이 어떻게 해야만,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영광스러워지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교만해도 한참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바울처럼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75-76쪽)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마치 거울처럼 자꾸만 하나님의 영광에 나를 비추어 보고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84쪽)

5. 오직 성경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로 하여금 정경을 받아들이게 만든 것입니다.(96쪽)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책임말입니다.(96-97쪽)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의 의미를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순히 ‘나는 말했으니 너는 지켜!‘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해볼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

부록에 나오는 루터의 종교개혁 4대 특징은 신학의 개혁, 미사(예배)의 개혁, 말씀의 개혁, 많은 이들이 조력한 개혁이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사실 루터는 말만 많이 들었지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몰랐다. 루터가 굉장히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다는 것도, 루터와 츠빙글리가 무엇으로 논쟁을 했는지도(루터와 츠빙글리가 논쟁을 했는지도 몰랐지만) 이 대목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성찬의 요소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지 아닌지의 문제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루터는 공재설(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한다)을 말했고, 츠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기호로만 보았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추천도서는 5대 표제에 대한 추천도서이다. 5대 표제 전체를 볼 수 있는 추천도서와, 각각의 표제를 볼 수 있는 추천도서가 있었다. 그리고 루터 관련 추천도서도 따로 정리되어 있었다.

듣기만 하고 잘 모르는 분야(교리)여서 서평이 더 길어진 것 같다. 워낙 주옥 같은 말씀이 많기도 했다. 교리 쪽 책을 계속 보다보면 서평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긴 하다. 이렇게 쓸 수 있는 것도 휴직 중이고 아기가 자고 있으니 가능한 일. 나는 새벽에 왜 잠이 깨었나. 책 읽고 서평 쓰라고 깨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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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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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필립 얀시/윤종석, IVP)

한때 필립 얀시를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20대 초중반 시절로, 신앙적인 고민을 많이 하던 내게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준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고 위로가 되었었다. 필립 얀시 책은 총 다섯 권을 읽었고([하나님이 나를 외면할 때]-[(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때는, 제목만으로도 막혔던 마음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 중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이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게 어언 12, 13년 전의 일이 되었다.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이번 달 독서모임에서 나누고자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20대 초중반에는 도움을 많이 받은 책임에 분명하지만, 3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지금은 조금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내가 너무 비은혜의 사람이라서 이 책을 답답하게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은혜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용서, 3부에서는 율법주의와 은혜, 4부에서는 사회에의 적용이라고 해야 할까. 워낙 사례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 때문인지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매한 것을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제대로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먼저, 저자가 설명하는 은혜는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전에는 이단으로 취급했으나 현대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하지 않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강력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저자는 알미니안주의적이라고 오해할 만한 소지의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교단과 교파의 차이가 무엇이 중요할까, 싶긴 하지만, 현대 교회 내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으니 알미니안주의적인 사고를 허용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또, 아무리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이단격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허용하는 듯한 글,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종교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괴로웠고, 저자는 어떤 의도에서 썼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려고 하다 보니 ‘진리가 달라도 사랑만 베풀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저게 실제 저자의 생각인 것일까,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저자의 생각이라면, 저 생각은 범신론적으로 흐를 여지가 있고,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책 [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선한 일이 은혜를 낳지 않고, 도리어 은혜가 선한 일을 낳습니다.‘(48쪽) 이 책은 기독교인이 왜 정죄만 하고 은혜를 베풀지 못하느냐, 라고 물으면서 행하라(은혜를 베풀어라)고 말하는 듯한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불확실의 시대, ‘오직‘을 말하다], 51쪽)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나로서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알미니안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으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은 독이 든 열매(잘못된 지식)라도 열매만 맺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또, 열매를 통해 자기의를 주장할 가능성과, 열매가 자기의에서 기인한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 것인지 혼동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님 믿는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은혜를 베푸는데 너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은혜라는 말을 오용, 남용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은혜받았다고 말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에 대해서도 좋은 말이면 무조건 은헤받았다,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경향도 있다. 상담, 심리학을 교회 내에 들여와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적 태도이다.)고 가르치며, 이 영향은 구원론에도 영향을 끼친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하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상담과 심리학을 이용해 사람을 끌어모으고 복음을 싸구려로 만드는 것 같은 행태도 싫어한다. 이토록 상담과 심리학을 경계하는 이유는, 교묘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열을 내는지는 독서모임을 하기까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1부를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도대체 은혜가 뭐지? 사랑을 베푸는 것인가? 은혜의 반대는 정죄인가?‘ 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은혜를 행하는 사람들을 나열함으로써 ‘이 많은 게 다 은혜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2부에서 내 마음이 심각하게 요동친다. 내가 매우 힘들어하는 ‘용서‘ 파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나님 외에 사람에게서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잘못을 했을 때 사과는 했지만 용서받아야 할 만큼 그게 큰 잘못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용서했던 경험은.. 이것도 잘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지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된 문제는 있는데 이것을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용서의 문제는 늘 어렵다.
다음은 용서 파트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사하셨기 때문이다.˝(71쪽)
먼저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다.(101쪽)
˝... 그래도 불의를 용서한다는 건 어딘가 불공평해 보이죠. 용서와 정의 사이에서 진퇴양난이에요.˝(103쪽)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 손에 놓아드리는 것이다.(105쪽)
폴 틸리히는 용서를, 과거를 잊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149쪽)
내가 최선의 모습이 아니라 최악의 모습일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찾아오신 것과 그 놀라운 은혜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것을 나는 안다.(171쪽)
루이스는 내 표현으로 ‘은혜 남용‘이 묵인과 용서를 혼동한 데서 오는 것이라 설명한다. ˝... 용서란 베푸는 편 못지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된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213쪽)

하나님은 내가 죄인되었을 때 찾아오셨고, 용서해 주셨다. 내가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해 주셨다. 이 대목이 마음을 울렸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성해야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전에 이미 용서를 해주시다니! 물론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깨달은 이후이겠지만 말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는 깊이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논란이 될 수 있는 알미니안주의적 발언이 있었다.

선한 삶을 사는 최고의 이유는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하는 것이다.(227쪽)

사람의 본성상 어떻게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 선한 삶을 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할 수 있게 된다면 열매를 맺는 은혜도 또한 주시겠지. 이 구절은 헷갈릴 수 있게 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어쨌거나, 2부에서 말랑말랑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불편함이 많았던 책이었다. 바른 지식(완전한 지식이 아님)이 바른 열매를 맺게 한다고 믿고 있는데, 물론 100% 바른 지식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허용적이어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너무 비은혜의 사람이기에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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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관계 경험과 하나님 경험
마이클 세인트 클레어 / 한국심리치료연구소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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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관계 경험과 하나님 경험](마이클 세인트 클레어/이재훈, 한국심리치료연구소)

정말 오랜만에 읽은 전공서적이었다. 물론 몇 일 전에 [내가 말하는 진심 내가 모르는 본심]이라는 전공서적인 듯 전공서적 아닌 듯 전공서적 같은 전공서적을 읽기는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는데, 이 책은 매우 읽기 까다로운 전공서적이었다. 책 두께는 굉장히 얇은데 번역 문제인지 전공 단어들 문제인지 책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많이 굴려야 했다.
부제는 ‘대상관계 이론과 종교‘로, 대상관계 이론과 종교의 연관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대학원 마지막 학기 수업을 듣고 교수님으로부터 이 책을 추천받아 샀던 것 같다.
대상관계 이론과 관련해서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은 것은 첫 학기와 마지막 학기가 유일하다. 첫 학기에는 심리검사 수업 때 하나님 표상 그림을 그리면서 언뜻 접했고(그때는 대상관계 이론인지도 몰랐다.), 마지막 학기에는 대상관계 이론에 관한 책을 보았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초반부를 읽을 때 하나님 표상 그림을 그렸던 것이 생각나서(이미 10년 전) 지금 그린다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했다.
이 책은 종교라는 말이 들어가서 신앙서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결코 신앙서적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전공서적인데, 대상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신학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아서 조금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는 게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의 저자가 3장의 결론에서 제임스 파울러를 언급했는데, 제임스 파울러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신앙의 발달단계] 책으로 접했던 사람이었다. 이 책에서는 파울러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문제에만 초점을 두고 정신분석학적 관계의 개념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는데, 그렇다면 파울러의 신앙의 발달단계와 정신분석학적 관계의 개념을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고(이 책은 너무 심리학적 접근을 해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쓴 논문이 있을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없다면 다음에 (혹시라도) 공부를 더 하게 되면 그 내용을 가지고 논문을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종교 경험에 대한 서술도 어디까지나 심리학적 접근이기에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또, 대상관계 이론은 뿌리는 정신분석학이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프로이트는 영적인 부분을 퇴행적인 것이라고 인식했다(그래서 융과 갈라선 것으로 알고 있는데..). 1장에서 대상관계 이론이 어떻게 발달되어 왔는지 서술하며 여러 학자들을 언급하는데, 나는 그 중 스페로의 입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로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는 서로 평행적 차원들이 있다고 본다(31쪽). 이 사람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스페로에 대해서 더 공부해봐야 할 것 같다.
2장에서는 리주토의 이론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미지화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어릴 때 (대부분 부모님의 영향으로) 상상으로(?) 만들던 하나님의 이미지는 인간이 발달단계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개념과 하나님 표상이 통합이 된다고 하는데, 이것을 기독교식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3장에서는 (대상관계 이론에 따른) 심리의 발달 단계와 성인의 종교 경험을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고, 4장은 어거스틴과 테레제 두 성인을 비교, 대조하면서 앞에서 서술했던 부분들을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 의거하여 어릴(혹은 젊을) 때의 심리 발달과 종교 경험을 분석하고 있으며, 테레제는 자서전인 영혼의 이야기에 의거하여 어릴 때의 심리 발달과 종교 경험을 분석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테레제는 누구인지 몰랐다가 이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어거스틴과 테레제의 차이는,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너무 밀접한 관계였고(물론 중간에 어거스틴이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떨어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테레제는 상실에 상실을 거듭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친밀감을 느꼈던 언니들이 수녀원에 들어가면서 (결국 본인도 수녀원에 들어가지만) 어릴 때 정상적으로(?) 관계 개념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것이 테레제의 종교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대학원 첫 학기에 하나님 표상 그림을 그릴 때 교수님의 해석을 듣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 상처에 제대로 접근했던 건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부모님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성인이 되어 하나님을 만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하나님 표상 그림이 또 달라지기도 하지만, 성인이 되기 이전에는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지대하다.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또다시 깊어진다.
이 책은, 앞서도 말했듯, 신앙적 접근이 아니어서 아쉬웠던 부분은 있지만, 대상관계 이론으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에 영향을 주는지 잘 설명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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