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음악 이야기 천천히 읽는 책 17
한승모 지음 / 현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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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음악 이야기](한승모, 현북스) 183쪽(누적 2270쪽)

음악 전담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집어든 책이었다. 결국 음악 전담은 안 하게 되었지만, 음악을 가르치고는 있다.
이 책은 음악에 문외한인 선생님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 쉽게 쉽게 쓰여졌다. 한승모 선생님은 인디스쿨에서 아카펠라로 이름을 본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카펠라를 배워보고 싶다. 아이들에게 시도한 적은 없어서 코로나가 끝나면 아이들하고 함께 아카펠라를 해보고 싶기도 하다.
내 경우, 음악의 여러 요소 중 악기 연주에만 치중해서 습득하고 있는데, 이 선생님은 음악을 전인격적으로 이해하고 있으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고 느꼈다. 음, 하지만 내 스타일대로 가르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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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반양장) - 개정증보판
조이 도우슨 지음, 이상신.양혜정 옮김 / 예수전도단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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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조이 도우슨/이상신 옮김, 예수전도단) 142쪽(누적 2087쪽)

얇아서 빨리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집어들었다. 신랑 책이다. 신랑이 고등학생 때 읽었다고 했다. 20여 년이 흘렀다. 믿기지 않지만.
읽을수록 ‘예수전도단‘스러웠다(?). 예수전도단 사람이 모두 그렇지는 않다고 알고 있지만, 이 책 한정으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기도에 매우 열정 넘치시는 분이라는 건 잘 알겠다. (눈에 보이는) 기도 응답의 경험도 여럿 있었다. 나는 이전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 같다. 이 분의 순수함과 열정만큼이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누구‘이신지 알기를 원한다. 만약 우리가 ‘누구‘보다는 ‘무엇‘에 강조점을 둔다면 근본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21쪽)

이 부분은 생각해볼 만했다. 여전히 ‘누구‘보다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하나님보다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교단에서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다(자비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41쪽)

이 글에는 100% 동감한다. 여러 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거룩과 자비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답답했다. 공의와 사랑을 다르게 말하는 것도 싫었다.

내가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109쪽)

이 질문을 보면서 마음에 찔림이 컸다. 이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면서 마음이 좋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기를.
몇 년 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중에서 저울질하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보다 선물을 더 좋아하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때 댓글을 달았던 어떤 지인이 하나님과 선물은 하나(?)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그 지인의 말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 성령님이 그 친구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보다도 성경공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이었다.‘(113쪽)는 부분을 보니 또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오래된 책이기도 하고, 교리적으로 다른 부분들을 보며 읽어서 그런지 와닿는 책은 아니었다. 아마 대학생 때 읽었으면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어쨌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정말 소중한 마음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냉랭한 나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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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당신에게 일은 무엇인가
제임스 해밀턴 지음, 이대은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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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일은 무엇인가](제임스 해밀턴/이대은 옮김, 생명의말씀사) 전자책/종이책 175쪽(누적 1581쪽)

한 번씩 지독한 무기력함에 빠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 있는다. 문제는 그 지경이 되도록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모른다는 데 있다. 어느 순간 무기력함에 빠져 있다. 1월부터 이 증상이 있었는데 거의 두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성으로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으로는(?)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여겼다. 일을 하지 않음에 대한-학교 일은 겨우 하고 집에 오면 에너지가 없어 드러누워 있는-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기력에 대한 책, 일, 쉼에 대한 책을 계속 찾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번아웃이었던 것 같지만(참고로 이 책은 1월에 읽었다.).
이 책은 ‘일‘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풀어낸 흥미로운 책이다. 최근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중 조직신학에 기울어 있는데, 구속사적 관점은 성경신학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창조-타락-구속-성화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데, 마지막 성화 대신에 회복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회복‘을 오용하시던 분 때문에 회복에 부정적 느낌이 잔재하고 있지만, 아무튼. ‘창세기 1-2장을 보며 에덴동산에서의 일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고, 신명기 28장 1-14절에 나오는 언약적 복과 비교하며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런 후에는 창세기 3장 16-19절을 보며, 하나님이 주신 임무에 심판이 내려지면서 일이 어떻게 무익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롬 8:20 참조).‘(17쪽)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첫 번째 파트 ‘창조,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신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야(창 2:18-25)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야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일은 결혼 및 가정과 분리될 수 없다.‘(19쪽) 일을 가정과 연결지은 통찰력이 돋보였다. ‘한 사람이 자기 일을 하는 방식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 자신만의 목적의식은 그가 자기 일을 하는 방식에 분명하게 드러난다.‘(21쪽) 내가 일을 하는 방식에 이러한 것들이 드러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다 까발려지는 느낌이 들어 내가 일하는 방식을 파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내가 일하는 방식을 파야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더 이상 번아웃에 쉽게 빠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동산에 두시고 쉬도록(누아흐) 일하게 하셨다. ...(중략)... 아담이 동산에서 쉬도록 일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창세기 2장 15절 말씀은 마치 일과 쉼의 균형을 말하는 듯하다. 아니, 쉼이 되는 일을 말하는 듯하다.(23쪽)

이 말은 ‘쉬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뜻하는 걸까? 어찌 보면 우리는, 나는 대체로 거꾸로 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하기 위해 쉰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생각을 달리 해야 할 것 같다. 주 목적은 ‘일‘이 아니라 ‘쉼‘인 걸까.
‘성경의 거대 서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남자와 여자가 아닌,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일에 임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39쪽)라는 통찰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놀라움은 첫 번째 파트의 마지막 쪽에서 절정에 달했다. ‘안위의 핵심은, 사람이 일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일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 제거되는 것이다.‘(41쪽) ‘일‘에 대해 ‘창조‘와 관련하여 이처럼 잘 풀어낸 사람이 있을까.
타락과 구속 파트까지는 어느 정도 동의가 되었지만, 회복 파트에서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어쨌든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일을 하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날 것이다.‘(35쪽)라는 것.-하지만 이마저도, [이것이 개혁신앙이다]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지, 결과론적이 되면 안 될 것 같다. 즉, 기억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건데... 역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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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비록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14)고 말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구별이다. 죄인 안에 죄말고 무엇이 있는가? 그의 "머리 전체가 병들었고 그의 "마음 전체가 쇠약해"졌으며,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은 성자를 경멸하고 거부하고 있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맞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그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죄 중에 머물러도 안전하다는 생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인 것이다.  - P302

오늘날 (건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죄인들에게그리스도를 너무나 지나치게 제시하고 있으며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가필요하다는 사실을 즉, 죄인들이 절대적으로 파탄된 상태에 있으며 죄인들은 다가올 진노를 겪게될 무서운 위험이 임박하며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책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적게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적도 없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죄를 짓는 것과 같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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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허구성
정태홍 지음 / RPTMINISTRIES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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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허구성](정태홍, RPTMINISTRIES]

12월 마지막에 읽을 종이책으로 어떤 책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낙찰한 책이었다. 왜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원래 신랑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도 안 읽은 책이 많아서 신랑 책까지 넘볼 생각을 못했는데, 요즘 교회들이 워낙 심리상담과 교리를 섞어 가르치는 게(교리를 가르친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꼴보기 싫은 단계까지 도달해서 집어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표지가 아무런 디자인 없이 새빨갛기만 한 게 좀 부담스럽긴 한데 의도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용적 편집이나 맞춤법 부분에 있어서도 조금은 아쉬웠다. 또, 굳이 주서택목사의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분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주서택목사의 교재를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시작은 제이 아담스였다. 대학원에서 ‘기독교 상담의 이론과 실제‘ 강의를 들을 때 심리학 위에 신학을 쌓은 사람이 게리 콜린스, 심리학과 신학을 섞은 사람이 로렌스 크랩, 신학 위에 심리학-신학이 심리학에 우선한다-을 쌓은 사람이 제이 아담스라고 했었다. 게리 콜린스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워낙 비판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참고 문헌에 로렌스 크랩과 제이 아담스는 등장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또, 처음에 내가 좋아했던 로렌스 크랩은 상담을 배울수록 성경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제이 아담스로 옮겨 가게 되었던 건데, 이 책에서는 제이 아담스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1차 충격을 받았다(내가 서평 쓰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지점이다.).-(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제이 아담스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제이 아담스의 상담 이론은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본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잘 몰랐다. 내가 힘들었던 상처에만 집중하고 상담을 배울 생각을 했지, 내 문제의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물론 성경은 심리학 책이 아니고, 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상담을 공부하려 했다는 것도 한참 뒤에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았던 게 2012년 1월 말씀묵상캠프였는데, 말씀묵상캠프를 담당하신 목사님의 성경 묵상을 통한 질문과 통찰력이 상담을 통한 질문, 통찰력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상담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내 속의 어리석음을 발견했다. ‘아, 나는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담을 공부해서 채우려고 했던 거구나!‘ 그런데 이 책에서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성경만으로 부족한 목사와 성도‘(24쪽)).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에서조차) 심리학을 외치는 교회들이 많다. ‘아무리 개혁주의 신앙을 외치는 분이라 할지라도, 심리학에서만큼은 너무나 관대하고 자상하고 포용력이 한이 없습니다. 심리학을 비판하는 사람을 광신자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가장 개혁주의적인 목사라고 자부하며 개혁주의 모임을 주도합니다.‘(27쪽) ‘결국 설교는 성경으로 하고, 가정사역은 심리학으로 하겠다는 생각입니다.‘(36쪽) 내가 제일 싫은 부분이 이런 부분이다. 개혁주의라고 한다면 칼빈의 5대 강령(칼빈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에 따라 ‘오직 성경으로‘여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심리학적 기술과 방법들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심리학적 기술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개혁주의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는 대학교 4학년 때 읽었던 책이다. 그 책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볼 수 있을까?(주서택목사는 그것을 성령님의 인도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건, 주서택목사가 하는 이 방법 ‘시간여행‘은 브래드쇼의 명상 방법과 똑같았다(167~183쪽). 그렇다면 명상은 성령님의 인도인가?
또 다른 문제점은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과 주서택목사가 말하는 ‘속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속사람‘이 두 번 나오는데, 두 번의 내용 다 주서택목사의 ‘속사람‘(내면아이)과는 다른 의미이다(78쪽 참조). 비단 ‘속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 의미의 낱말과 성경에 나오는 낱말이 같은 뜻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용어 사용은 ‘속사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 가지는 구상화(Visualization)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꿈은 이루어진다‘를 뜻한다. 내가 지난 여름에 [미라클모닝]을 읽으면서 찝찝했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바를 상상하고 소리내어 말해보라는 단계가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적이지는 않아서 그 단계를 뺐더랬다. 그게 아마 ‘구상화‘를 말하는 것 같다. 대학원에서 심리검사 수업을 들을 때도 이상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 그림이 답(미래)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 오는 날의 사람‘ 그림을 공부할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구상화‘인 것 같다. 그 교수님이 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융이 영지주의를 끌어왔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인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상기도도 구상화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방언도 그렇지 않을까?(방언 유경험자임을 밝힘)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방언‘으로 보여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언의 유익은 거기서 끝이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방언은 아무 유익이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뜻도 모르는 소리를 계속 기도로 하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방언을 하나의 이적으로 본다면, 이적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에게서도 가능한 것이다.
‘구상화‘에서의 핵심은 ‘영적인 안내자‘이다(93쪽 참고). 나는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안내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가 제일 중요하다. 상상을 해서 떠오르는 대상, 그게 바로 ‘영적인 안내자‘이다. 기독교와 혼합이 되는 순간 그 ‘영적인 안내자‘는 예수님, 하나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주서택목사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기독교상담에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는데, 기독교상담을 하면서 마음이 변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일까? 일반 상담을 하면서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상담 아닌 것으로도 가능하다. 생각, 습관, 행동이 바뀌는 것을 전부 성령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반은총의 영역이 아닐까? ‘영적인 안내자‘는 예수님일까?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범신론을 인정하는 셈일 거다. 그렇다고 일반은총으로 보기에도 살짝 찝찝하다. 사실 나는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7권에서 이런 냄새(?)가 조금 났더랬다. 8년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지만.
‘내 과거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라는 결정론적 생각이 과연 성경적일까? ‘자아실현‘이 과연 성경적일까? 오늘날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행복‘은 ‘자아실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아실현‘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자기부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에 집착하는 것은 나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내 문제를 알아보겠다고 계속 과거를 파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게 더 집중할 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더 멀어진다. 나의 이해와 다른 사람의 이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해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해되어서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일 테니.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면아이‘로 돌아가서 지금의 나를 바꾸어 보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보겠다는 죄악된 생각이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속에 울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죄인‘으로서 나의 죄악을 회개하며 돌이키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83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며 과거가 우리를 이끌어 가지도 않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과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136쪽)

심리학이 기독교와 대치되는 이유 중 하나는 문제를 죄로 바라보느냐, 병리현상으로 바라보느냐의 관점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다루고 있기에 ‘인간은 죄인이다‘로 시작하는 기독교와 대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다. 나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려 할 테지만, 학교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 구상화의 ‘영적인 안내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눈에 직접 보이는 대상만 ‘영적인 안내자‘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릭 워렌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여러 모로 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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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hoo 2022-04-10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을 더 자주 접하고 싶네요.

Mulan 2023-04-17 01:03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