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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이 소설의 미덕은 독특한 구성에 있다. 헤럴드 배너가 쓴 소설, 앤드류 베벨의 회고록(미완), 대필자인 아이다 파르텐자의 서술, 그리고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로 이어지는 4부작의 구성.
처음에 <채권>이라는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그 소설이 그럴듯한 도입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사실 이 소설에는 여성인 내게는 <82년생 김지영>민큼이나 뻔한(?) 반전이 있었다는 점만 적어둔다.
다만, 마지막 4부이 밀드레드 베벨의 기록(일기)은 여러번 다시 읽어도 좋을 아름다움, 그리고 속시원함 같은 게 있었다.
결국 이건, 남자가 주인공인,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무정부주의자인 아버지는 현재의 젠더 체제를 온전히 유지하는 데 미성년 노동이 필요하다는 걸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 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약 등등- 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즉,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베벨이 글로 옮기고 싶어하는 확신이라는 걸 알았다.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 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 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배너가 밀드레드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 것은 단지 그게 더 나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었다고(설령 밀드레드에게 모욕이 되고 결국은 배너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가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배너는 역사 전체에 걸쳐 출현한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구경거리로 내놓는 그런 여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지로 밀드레드를 끼워맞췄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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