볶음밥에 단지 파프리카를 넣었을 뿐인데 내가 원하는 볶음밥이 되었다. 

양파, 당근, (씨 뺀) 청양고추, 파프리카. 소금, 간장, 후추. 달걀.

파프리카의 아삭하고 주시함이 볶음밥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볶음밥은 기본적으로 밥과 채소의 수분을 날려줘야 하는데, 수분이 모두 날아가버린 볶음밥은 필연적으로 먹으면서 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파프리카가 제 안에 가지고 있던 수분을 입 안에서 터뜨려줌으로써 볶음밥의 딜레마랄까 한계가 단박에 해소되었다.

음... 과연 인사가 만사로군.



"누나~ 누나~ 누나~ ㅇ로ㅓㅎ푸아사푸ㅠㅇ라ㅣㅜㅍ아ㅓㅟㅜ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삼월이가 나를 미친듯이 불러댄다. 옆집에 미안할 정도로. 

"삼월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용히 해!"

설거지를 마치고 베란다에 나가보니 세탁기가 다리 한 쪽이 밑으로 빠진 채 쿵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다. 수평이 맞지 않아 덜덜거리더니 앞으로 전진해오다 결국 다리 하나가 빠진 것이다.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던 삼월이는 세탁기가 덜덜덜 굉음을 내며 자신을 향해 전진해오니 깜짝 놀랐겠다. 그래서 나를 불렀나 보다.

"언니, 언니, 큰일 났어! 세탁기가 앞으로 와! 얼른 와 봐! 세탁기가 움직인다고! 나한테 막 온다니까!"

사물함을 뒤져 세탁기 수평조절용 다리 받침대를 찾아 내 안의 작지만 힘센 요정 서넛을 불러 함께 힘을 내어 세탁기의 수평을 맞추고 뒤로 밀었다.

수평이 맞춰진 세탁기는 다시 평온을 찾았고 삼월이는 염려하며 세탁기를 살핀다.  



삼월이의 귀여운 얼굴 사용법.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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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5-2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도 정갈하게 잘 하시는 Joule님♡삼월 똑똑하고 귀여워요^^

Joule 2024-05-27 21:53   좋아요 0 | URL
삼월이가 생각은 열심히는 하는데... 안타깝게도 똑똑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ㅜㅜ
 

연휴 마지막 날. 출근할 때 입을 셔츠들을 다림질했고, 산더미 같은 파스타를 먹었다. 어제 볶음밥을 하면서 채소 재고를 남기지 않으려고 모두 깍둑 썰어 볶아둔 채소를 먹을 방법이 달리 없었다. 달걀도 없고 냉동해둔 밥도 없었다. 


전기주전자로 물을 끓여(시간과 연료 절약) 프라이팬에 붓고 소금 한 숟갈과 스파게티 면을 넣어 10분쯤 끓이다 면이 익으면 짜파게티 끓일 때처럼 물을 대부분 버리고 거기에 소스와 볶아둔 채소들을 넣고 불 위에서 섞는다. 음, 써놓고 보니 정말 짜파게티 조리법 같구나. 


4일 동안 나는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고양이를 돌보고 빨래를 하면서. 평온해졌고 단단해졌다. 



  

# 어떤 날은 이런 바닷가 마을로 출장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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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1-2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귀여워욧! >.< 사람같은데요. 누운 자세와 표정이ㅎㅎ^^;

Joule 2023-01-23 20:11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잠이나 자야 멀쩡한 얼굴을 찍을 수 있네요. 사진 찍는 걸 너무 싫어해서 휴대폰 갖다대면 얼굴을 엄청 이상하게 만들어요.

moonnight 2023-01-24 07:1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행동도 사람 같군요. 우리 조카들.ㅎㅎ 사진 찍는 거 정말 극혐ㅎㅎ;;; 해피 뉴 이어 Joule님♡(하트 사과 드려요ㅎㅎ;;)
 


어제 볶아둔 감자, 양파, 당근에 피망, 버섯을 추가하니 완벽한 볶음밥이 되었다. 정확하게 내가 먹고 싶었던 맛의 볶음밥. 채소에 소금 간을 하고 팬에 간장 한 숟갈 정도 그을리니 딱 맞다. 후추는 좋아하니까 듬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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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23-02-05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주 안주로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뭘 몰랐을 때는 소주 마실 때, 흰살 회니, 국물..... 같은 걸 고집스레 찾곤 했는데

요새는 ‘간명하게‘ - 단어의 뜻보다는 단어의 형상 때문에 구사하는 점, 이해 바라요- 집어 먹거나 떠먹을 수 있는 요리안주가 더 당겨요.

뭐, 그냥 그렇다구요. ;)
 

어제의 내가 처리하지 않은 일을 오늘의 내가 꼭 처리할 필요는 없다. 설혹 처리해야 한다 해도 우선순위가 바뀐다. 어제 저녁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욕실 줄눈 보수를 하지 않았는데, 오늘의 나는 욕실 줄눈 보수를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나는 오늘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어제 세탁한 빨래들이 말라서 건조기로 먼지를 털고 있다. 수건 한 번, 속옷 및 잠옷류 한 번, 겉옷류 한 번. 고양이가 있어서 세탁하는 모든 빨래는 반드시 먼지와 고양이털을 털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청소기를 돌릴 때도 따로 침구 청소기를 사용해 패브릭에 붙은 먼지와 고양털을 제거해야 한다. 지 털이어도 깨끗한 이불과 방석을 고양이는 더 좋아한다. 어쩌다 방석에 자기가 묻힌 얼룩이 있으면 계속 신경 쓰며 그 자리를 피해 앉고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런 걸로 뭐라고 한 적 없는데 자리에 실례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얼굴을 한다. "괜찮아. 이렇게 닦아내면 되지." 하고 내가 물티슈로 슥삭슥삭 닦아내면 내 생각만일 수도 있겠지만 퍽 고마워하는 눈치다. 


소파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침대에서 줄곧 칭얼대던 고양이가 소파로 온다. 그리고 얌전히 빨래 바구니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니가 빨래를 다 개고 나면 그래서 바구니가 비면 바구니에 들어갈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빨래를 집어들기도 전에 마음이 급한 고양이는 일어나서 벌써 앞발을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어렸을 때 내가 버릇을  잘못 들였다. 심하게 칭얼대는 아기 고양이를 달랜다고 바구니에 담아 곧잘 놀아주곤 해서 이제 4살이 다 되어가는데도 삼월이는 바구니만 보면 들어가고 싶어한다. 



바구니에 고양이가 담기면 바구니를 들고 나는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고양이를 판다. "고양이 사세요. 귀여운 삼색 고양이 있어요. 싸게 팔아요." 그렇게 평소에는 키가 안 닿아서 보지 못했던 싱크대며 찬장이며 수납장 위, 책장 위 등을 천천히 구경시켜준다. 내 딴에는 제가 좋아하는 곳에서 내려주고 싶은데 고양이는 바구니에서 내릴 생각이 도통 없다. 넓은 집이 아니어서 몇 바퀴를 돌고 돌아 대개는 밥그릇 앞에서 멈춘다. "명절이라 사람들이 고양이를 벌써 다 샀나 봐. 오늘은 그냥 맛있는 거나 먹고 가자. 괜찮지?" 여행은 그렇게 끝난다. 



# 바구니 또 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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