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볶아둔 감자, 양파, 당근에 피망, 버섯을 추가하니 완벽한 볶음밥이 되었다. 정확하게 내가 먹고 싶었던 맛의 볶음밥. 채소에 소금 간을 하고 팬에 간장 한 숟갈 정도 그을리니 딱 맞다. 후추는 좋아하니까 듬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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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23-02-05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주 안주로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뭘 몰랐을 때는 소주 마실 때, 흰살 회니, 국물..... 같은 걸 고집스레 찾곤 했는데

요새는 ‘간명하게‘ - 단어의 뜻보다는 단어의 형상 때문에 구사하는 점, 이해 바라요- 집어 먹거나 떠먹을 수 있는 요리안주가 더 당겨요.

뭐, 그냥 그렇다구요. ;)
 

어제의 내가 처리하지 않은 일을 오늘의 내가 꼭 처리할 필요는 없다. 설혹 처리해야 한다 해도 우선순위가 바뀐다. 어제 저녁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욕실 줄눈 보수를 하지 않았는데, 오늘의 나는 욕실 줄눈 보수를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나는 오늘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어제 세탁한 빨래들이 말라서 건조기로 먼지를 털고 있다. 수건 한 번, 속옷 및 잠옷류 한 번, 겉옷류 한 번. 고양이가 있어서 세탁하는 모든 빨래는 반드시 먼지와 고양이털을 털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청소기를 돌릴 때도 따로 침구 청소기를 사용해 패브릭에 붙은 먼지와 고양털을 제거해야 한다. 지 털이어도 깨끗한 이불과 방석을 고양이는 더 좋아한다. 어쩌다 방석에 자기가 묻힌 얼룩이 있으면 계속 신경 쓰며 그 자리를 피해 앉고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런 걸로 뭐라고 한 적 없는데 자리에 실례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얼굴을 한다. "괜찮아. 이렇게 닦아내면 되지." 하고 내가 물티슈로 슥삭슥삭 닦아내면 내 생각만일 수도 있겠지만 퍽 고마워하는 눈치다. 


소파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침대에서 줄곧 칭얼대던 고양이가 소파로 온다. 그리고 얌전히 빨래 바구니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니가 빨래를 다 개고 나면 그래서 바구니가 비면 바구니에 들어갈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빨래를 집어들기도 전에 마음이 급한 고양이는 일어나서 벌써 앞발을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어렸을 때 내가 버릇을  잘못 들였다. 심하게 칭얼대는 아기 고양이를 달랜다고 바구니에 담아 곧잘 놀아주곤 해서 이제 4살이 다 되어가는데도 삼월이는 바구니만 보면 들어가고 싶어한다. 



바구니에 고양이가 담기면 바구니를 들고 나는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고양이를 판다. "고양이 사세요. 귀여운 삼색 고양이 있어요. 싸게 팔아요." 그렇게 평소에는 키가 안 닿아서 보지 못했던 싱크대며 찬장이며 수납장 위, 책장 위 등을 천천히 구경시켜준다. 내 딴에는 제가 좋아하는 곳에서 내려주고 싶은데 고양이는 바구니에서 내릴 생각이 도통 없다. 넓은 집이 아니어서 몇 바퀴를 돌고 돌아 대개는 밥그릇 앞에서 멈춘다. "명절이라 사람들이 고양이를 벌써 다 샀나 봐. 오늘은 그냥 맛있는 거나 먹고 가자. 괜찮지?" 여행은 그렇게 끝난다. 



# 바구니 또 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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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지 않는 아침. 50분쯤 일기를 쓰고 40분쯤 책을 읽고 잠깐 고양이를 희롱하다 다시 1시간쯤 나머지 잠을 자고 일어난다. 그렇게 10시를 당연하게 넘긴다. 이제 네 살이 되어가는 귀여운 삼색 고양이는 자기가 잔소리를 해야 내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신기하게도 '오늘은 휴일이니까 30분만 더 자고 일어날게'라는 말은 용케 알아듣는 듯하다. 그 말을 할 때의 내 표정과 억양 같은 것이 있나 보다. 


# 저 인간이 책을 읽다 곧 또 잠들 거라는 걸 아는 고양이는.




김치볶음밥을 해 먹으려다 이미 냉장고에 너무 오래 있었던 양파와 감자와 당근이 보였다. 다 볶고 나니 피망과 새송이버섯도 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버섯과 피망의 향, 질감이 더해졌더라면 더 맛있었을 텐데 아쉽다. 양파와 당근은 볶았을 때 부드러운 단맛이 나고, 감자와 당근은 식감이 비슷하다. 감자와 밥은 또 같은 탄수화물이라 변별력이 적고. 후춧가루와 희미한 간장이 간신히 무료함을 달래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피망과 버섯을 까먹은 이유가 짐작이 간다. 내일 양파, 당근, 피망, 새송이버섯을 넣고 잡채를 하면 어떨까 잠깐 생각했던 것이다. 


세탁기를 두 번, 건조기를 한 번 돌리고 아침에 청소도 잠깐 했다. 이따 마음 내킬 때 잠깐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내려 갔다 오면 오늘의 집안일은 충분히 한 셈. 아, 아무래도 깨끗해지지 않는 욕실 줄눈 몇 개를 백시멘트 이겨 새로 바르는 일이 남았구나. 욕실 인테리어의 핵심은 깨끗하고 하얀 타일 줄눈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에 안정과 기쁨을 가장 즉각적으로 가져다준다. 타일 줄눈 보수는 지난 번에 시행착오를 충분히 겪으면서 요령을 터득했다. 이제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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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점심 1조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후딱 먹고 식자재마트에 당근을 사러 간다. 당근은 월화에는 100g에 190원인데, 수요일이 되고 주말이 가까워지면 380원, 두 배가 된다. 당근과 함께 레몬도 샀다. 보통은 치토스 바비큐 맛도 한 봉 사는데 오늘은 점심을 두둑히 먹어서 군것질 생각이 안 났다. 아침에 해의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둔 탓에 차 안은 맙소사, 여름이다.


집에 잠깐 들렀다. 고양이는 오전 내 낮잠을 잔 모양이다. 어두컴컴한 작은 방 서랍장 위에서 잠이 덜 깬 멍한 얼굴로 나를 맞는다. 내가 점심 시간에 잠깐 집에 들르는 것을 삼월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긴 자기 생활 리듬이라는 게 있는데 불쑥 내가 나타나면 스케줄이 좀 흐트러지기는 하겠다. 그래도 고양이에게 다가가 고양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다정하게 코에 뽀뽀를 해준다. 잘 잤어? 오늘 해가 좋은데 일광욕이라도 해. 고양이의 귀여움은 광합성으로 생성되는 것. 무릇 귀여운 고양이라면 일광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햇볕에 배를 드러내고 발라당 누워서는 머리를 옆으로 꺾고 앞발을 오므려 귀여운 주먹을 만들며 '앙!' 하는 삼월이는 그래서인지 정말 귀엽다. 확신의 귀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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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가 돌아왔다. 석 달 전 죽은 줄 알았는데. 벌써 서른 번도 넘는 환생이지만 매번 살아 돌아오는 라지를 볼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엄마 껌딱지였던 진식이가 풀죽은 모습으로 패기와 어울려 다녔던 것도, 라지가 최근 거처로 삼았던 집 앞을 내가 기웃거렸을 때 라지의 기척이 나지 않았던 것도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뒷베란다에 나갔다가 습관처럼 창 밖을 내다보니 눈에 익은 삼색 고양이의 뒷모습이 고양이식당 앞에서 서성거린다. 소리나게 방충문을 열고 닫아 라지를 부른다. 라지는 쳐다보지 않고 그냥 식당 앞에 예쁘게 자세를 고쳐 잡고 앉는다. 기다릴테니 내려오라는 뜻이다. 오늘따라 늦게 일어난 터라 출근 준비에 마음이 급했지만 여차하면 전화해서 연차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는다.


3년 전 중성화수술 이후로 라지는 나와 사이가 멀어져 거처를 옮기고 내가 주는 것은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 해도 먹지 않으며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래도 알은척은 해준다. 내가 사는 다가구주택 단지에 가끔 마실도 오고 나를 보면 반갑게 야옹~ 인사도 하고 달려와서 자기를 쓰다듬게도 해준다. 그래도 눈만은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라지의 결심 같은 것인 듯하다. 라지의 그윽하고 따뜻한 시선이 그립기는 하지만 괜찮다. 내가 라지에게 잘못했으니까.


배가 고플 것 같아서 먹든 안 먹든 국물이 걸쭉한 파우치 두 개를 종이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라지는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해도 너라는 인간을 섣불리 믿을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한참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할짝할짝 국물을 핥는다. 고맙다. 나는 라지가 먹기 편하라고 접시를 들어준다.


3년 전, 그러니까 삼월이가 태어나기 전, 라지가 중성화되기 전, 내가 아직 취준생이었을 무렵, 라지와 나는 둘이서 함께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라지도 나도 딱히 서로가 마음에 들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세상에 둘만 남아 버려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돌아다니는 무리처럼 우리 사이에는 적당한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라지는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와 기다렸고 나는 라지에게 손을 흔들며 우리는 즐겁게 계절들을 통과했다. 어떤 날들에는 솟구치는 애정에 숟가락으로 라지의 밥을 떠먹여줄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라지는 아기처럼 얌전하게 숟가락을 핥았다. 라지의 접시를 들고 있는데 가만히 그때 생각이 났다.


밥을 먹고 있는 라지를 보고 있으려니 문득 우리 엄마 같다. 늙은 우리 엄마. 물론 우리 엄마는 라지처럼 상냥하고 노련하고 유능하지 않다. 그래서 한때 나는 정말로 라지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나도 라지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었다. 나의 늙어가는 엄마를 보면서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나이든 나의 고양이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까. 라지는 제 양을 다 먹고 그대로 돌아서 떠난다. 나중에 출근하면서 보니 라지가 근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나는 항상 라지가 어디 사는지 궁금하다. 그런 걸 보면 라지는 내 친구가 맞는 것 같다.         

 


2021. 4. 25.(일) 오전 11:21  라지와 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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