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책을 접한 계기부터 말하고 싶다. 코로나로 뒤덮인 뉴스를 보며 우울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감정을 왔다 갔다 하며 보내던 지난 주말. SNS를 통해 시공북클럽을 알게 되었다. 얼핏 이전부터 알기는 했는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시공사를 통해 책을 출판하고, 출판사가 그 책을 열심히 홍보한 것을 보고 짜게 식은 기억이 있다. 감정 탓인지, 무언가에 끌리듯 가입을 했고 시공북클럽 굿즈가 오기 전에 완독클럽 책이라며 이 책을 대여해 주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제목은 조금 가볍다는 느낌이었는데 책의 두 챕터를 읽고, 이 책을 무조건 이번 주 안에(완독클럽 마감기한)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쉬우면서 어렵다였다. 살면서 한번쯤은 했을, 현재 하고 있을지 모를 고민을 철학자의 사상으로 친절하게 풀어준다. 나는 내 고민을 들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책장이 넘어간다. 심지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쉽다고 느꼈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로 넘어가거나 완독을 한 지금, 구체적인 철학 사상을 내 언어로 설명할 자신은 없다. 딱히 떠오르는 지식이 없네? 그래서 어렵다고 느낀다.

철학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철학적 지식도 전달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작가의 의도는 '삶의 철학'만큼 '앎의 철학'도 중요하고, '앎'이 없다면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자가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책과 독자 사이에도 어떤 운명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사랑의 타이밍처럼 독서의 타이밍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요 근래 내가 자주 하던 고민을 들어준 책이다. 지인에게도 구체적으로 전할 수 없었던 속 이야기를 이 책이 대신 들어준 것 같다.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얻었다.

덧붙여, 완독클럽을 운영하는 시공북클럽의 프로그램이 무척 마음에 든다. 작년에는 타 출판사의 멤버십에 가입을 했는데, 인기 있게 운영되는 것에 비해 나는 조금 실망을 했었다. 완독클럽은 회원들을 선착순으로 불러들여 책을 구입하게 하거나, 해당 출판사의 책을 판매하는 통로로 운영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무료로 책을 대여해 주고, 어렵지 않은 질문을 던져 누구나 온라인 댓글을 남길 수 있게 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쉽게 엿볼 수 있게 되어있다. 게다가 포인트도 준다. 나는 이번에 받는 포인트로 이 책을 구입할 계획이다. 어제 이미 3월 완독클럽 책도 보내주었는데, 책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얼른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2~3개월 동안 나를 괴롭힌 '삶에 대한 고민'이 조금 덜어져서 홀가분하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내 삶에 철학도 쭉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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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는 야만인의 사고도, 미개인이나 원시인의 사고도 아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세련화되었다든가 길들여진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다.
《야생의 사고》

‘문명의 사고‘로써의 계획은 쓸모없다. 아니 그 계획은 우리의 삶을 더 큰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삶의 우발성과 우연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야생의 사고로 사는 것! 이것은 가장 먼저 ‘야생의 사고‘는 ‘문명의 사고‘ 보다 열등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오감과 직관을 믿고 온몸으로 삶을 살아내려는 ‘브리콜뢰르‘가 되려고 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내가 레비-스토로스에게서 배운 삶의 지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그의 삶의 맥락이 만들어낸 언어 규칙을 거의 맹목적인 수준으로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 규칙을 상대에게 강요하느라 대화할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여기서 맹목적이란 말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상대를 신처럼 떠받들라는 말은 아니다. 상대의 언어 규칙을 파악한다는 말은 결국 그의 삶의 맥락을 파악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인간인지라, 진중하고 섬세하게 타인의 삶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화, 그것은 사랑이 없다면 애초에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없는 대화는 설득과 싸움, 그리고 포기가 난무하는 폭력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기에 그들의 삶의 맥락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그들의 언어 규칙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된다면 상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까?"

쿤에 따르면, 과학은 연속적이고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으로 진행된다. 비단 과학만 그럴까?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과학의 변화가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과정으로 진행되듯이 우리도 그렇다. 나의 믿음과 달리 공부, 운동,
업무 등 어떤 분야이든 연속적이고 누적적으로 발전하기보다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계단식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그 불연속과 단절(성과)의 임계치까지 가는 과정에서 연속적이고 누적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노력의 양이 충분하다면 노력의 방향을 점검해야 한다. ‘노력‘은 의지의 문제이지만, ‘노력의 방향‘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혁명의 문제다. ‘노력의 방향‘은 ‘노력‘ 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혁명만이 노력의 방향을 바꾼다. 이전 세계관을 폐기하고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뜨게 만드는 혁명. 그런 혁명이 없다면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노력의 방향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저 하던 대로 더 노력할 뿐. 우리가 그리도 원하던 불연속적 · 단절적인 발전은 노력 자체가 아니라 노력의 방향전환에서 온다.

패러다임의 전환도, 그걸 끌어낼(과학)혁명도 결국 우리 내부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극렬한 정서적 불안정을 불러일으키는 "개종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에 패러다임 전환의 성패가 달렸다. 어쩌면, 슬럼프는 개종의 경험을 받아들일 내면의 강건함이 없다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생은 틀렸으니 리셋을 해야 할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 없다! 배치를 달리하는 것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제껏 나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이질적인 항들의 배치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존재로 생성된다. 지금의 모습을 긍정하면서 다른 배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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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주어진 본질 밖으로 나설 수 있는 자유로운 ‘탈존‘이니까.

그렇다면 천직이 주는 행복은 무엇일까? 육체와 영혼이 소모되는 직장을 벗어난 것? 매일 해도 즐거운 일을 찾은 것? 둘 다 피상적인 답이다. 천직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없애는 것에서 온다. 천직은 하늘이 내려준 직업이다. 하늘이 내려주었기에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천직을 찾은 사람들이 종종 자신은 어떤 행위(연기, 노래, 글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더 이상 직업적 혼란이나 불안을 겪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특정한 본질에 가두는 일이기도 하다.

천직은 그것을 찾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 천직을 찾을때 우리는 자유로운 ‘탈존‘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직을 찾았지만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라는 식으로 자신의 본질을 가둘 때 다시 우리는 부자유한
‘존재‘로 전락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과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사르트르가 했던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라는 말과 같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는 이토록 무거운 것이다.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져서 어떠한 목적도 없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인간 각자는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자유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창조적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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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말과 글을 배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국인은 단순히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 걸맞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다. 언어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기 마련이다.

‘생각이 말(언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언어)이 생각을 지배한다‘ 라는 소쉬르의 이야기를 기억하자.

철학적 삶은 ‘더함‘이 아닌 ‘덜기‘에 있습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각자의 삶에서 무엇을 덜어 낼지 말해줍니다. 어떤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특별해지는 삶이 바로 철학적 삶입니다. 철학적 삶이 특별한, 그래서 근사한 이유는 철학이 각자의 삶에 어떤 ‘포기‘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삶‘의 비밀은 진정한 시간, ‘지속‘에 있다.
‘지속‘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까닭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속‘을 통해 질적인 차이가 만들어지고, 그 질적인 변화로 인해 본성이 바뀐다. ‘지속‘은 양적인 변화가 아닌 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더 나은 삶은 ‘지속‘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을 읽다가 동이 터오는 독서. 깔깔거리고, 훌쩍거리게 만드는 독서. 마음을 울리는 글귀 하나에 꽂혀 온종일 읊조리게 만드는 독서. 이런 ‘지속‘된 독서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지속‘은 ‘더 나은 삶으로 이끈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것은 두꺼운 논문 100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랑에 대해 눈뜨게 만든 얇은 시집한 권이다. 아니, 그 시집의 어느 시 한 구절이다.
‘더 나은 삶으로 이끄는 것은 무미건조한 100명과의 만남이 아니다. 조바심과 설렘으로 ‘지속되는 단 한 명과의 만남이다. 뜨겁기에 ‘지속‘ 된, ‘지속‘ 되었기에 뜨거운, 그 만남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만남은 베르그손의 말처럼 반드시 지속 자체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지속‘을 관통했기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것이니까. ‘더 나은 삶은 ‘지속‘을 통해 질적으로 변화된 삶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

잊지 말자. 결국 잘산다는 건,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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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과 별개로 이 책을 구입했을 때 상황이 떠올랐다. 2019년 가을쯤, 동네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다. 매대에 한 권만 있었는데, 사진 이야기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다. 구입하고 한참 지난 후 책을 펼치는데, 보이지 않은 표지의 접힘 부분이 눈에 띄었다. 보통 알라딘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데, 어쩌다 오프라인에서 책을 구입했더니, 이런 경우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책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굉장히 꺼리는 편이다. 그 동네서점에서, 이 책 앞에서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이 남았다는 점을 오프라인에서 책을 사면 겪을 수 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요즘은 사진을 많이 찍지 않지만, 그래도 취미 생활이 뭐냐고 물으면 사진이라고 꼭 대답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참고로 필름사진) 셔터소리, 뷰파인더로 보이는 풍경, 초점이 서서히 맞춰질 때의 부드러움, 현상과 인화를 기다리는 시간 등. 개인적으로 좋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다.

 

 

작가는 사진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조금 부럽다. 사진은 찰나를 담고 있지만, 영원을 이야기한다.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역사를, 사회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 사진이 가진 이런 본질을 잘 담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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